68
“……황후 폐하께선 눈치가 참 빠르시군요.”
테르델은 자신이 변장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성큼 세실레의 앞으로 다가섰다.
가슴팍에 세실레의 머리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세실레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는 사이 테르델은 한 손으로 세실레의 손목 안쪽을 짚었다.
엷은 살갗 아래로 동맥혈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를 앞에 두고, 세실레가 설레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설레는 것이었으나 테르델은 희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중얼거렸다.
“저인 걸 아시고도 심장이 두근거리는군요.”
“……당황했을 뿐이야.”
“그렇겠지요.”
테르델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를 위협하지도 않았다.
일전에도 그랬다. 그때도 그는 대화만 나누고 사라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그가 아무런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면, 세실레 또한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겨우 숨을 고른 세실레가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왜 찾아온 거지?”
혼란으로 얼룩졌던 푸른 눈동자가 어느새 단단해졌다.
결의가 느껴지는 눈빛에 테르델이 아쉬움을 표했다.
“이런 모습도 좋지만.”
“…….”
“당신은 역시, 울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헛소리로군.”
들어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세실레는 노골적으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테르델이 모습까지 바꿔가며 접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들은 목표를 이뤘다.
세실레는 지금 미칠 듯이 혼란스러웠으니까.
무엇을 원하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모든 것이 모호했다.
‘우선 잡자.’
세실레는 치맛자락에 숨긴 손안에 이능을 모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세실레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테르델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려한 자줏빛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둥그렇게 휜 눈매는 곱게 접혀 있었다.
그가 즐거이 웃으며 말했다.
“무얼 원하냐고 물으셨습니까.”
“…….”
“전 당신의 타락을 원합니다. 당신의 절망, 눈물, 아픔이 제겐 희열이 되지요. 그러니 황후 폐하.”
테르델의 세실레의 은빛 머리칼을 모아들었다. 그의 손에서 은빛 머리칼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테르델은 황홀한 표정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실레가 몸을 휘청였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세실레는 흐릿한 시야로도 테르델을 응시했다.
하지만 테르델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또 어디로……!”
테르델의 기척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다시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가 이능을 모으고 있단 사실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세실레의 손아귀로 은빛의 빛무리가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세실레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선물 때문인가.’
테르델이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한 모양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상체를 숙이자 어디선가 달려온 이들이 그녀를 잡아주었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기척이었다.
마치 테르델과 함께 있던 동안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듯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째서 여기에…….”
“호위! 호위는 무얼 했나!”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아득히 멀어졌다. 대신, 눈앞에 어떠한 장면이 일렁였다.
피가 흩뿌려진 대지에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인 채로 웃더니, 그녀를 발견하곤 앞으로 다가왔다.
‘세실레.’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세실레를 향해 속삭였다.
‘네가 죽으면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거야.’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밀어, 세실레의 뺨을 쓸었다.
“……헉!”
세실레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본능이 그녀가 본 것이 수백 년 전의 일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자료에 적힌 것처럼?’
정말로 자신이 수백 년 전에도 살아 있었을지도 몰랐다.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기척에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아르베우타였다. 그가 어째선지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낯이었다.
더불어 조금 전의 테르델과 마찬가지로 한 데 머리를 묶은 채였다.
묘한 기시감에 세실레는 한참이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자 의아함을 느낀 아르베우타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세실레, 괜찮은 건가.”
“……잠깐.”
숨이 막혔다. 세실레는 손을 들어,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끔 했다.
무어라 말할 여지조차 없었다.
겨우겨우 숨을 고르던 그녀는 느리게 시선을 들어 아르베우타를 응시했다.
무언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수풀이 우거진 숲, 자그맣게 세운 오두막을 등지고 선 아르베우타가 화색이 되어선 소리쳤다.
‘신 없이도 악령을 잠재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정말요?’
‘네, 악령은 신의 그림자에 속한 자들, 그러니 신을 소멸시켜버리면 된답니다.’
즐거워 보이는 아르베우타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억 속 그녀는 티를 내지 않으며 환히 웃었다.
온몸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기분임에도, 잘 되었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가슴을 관통한 절망에 여전히 가슴이 아렸다.
세실레는 시선을 들어 아르베우타를 응시했다.
조금 전 테르델이 선물이랍시고 보여준 영상이 떠오른 탓이었다.
‘가증스러워.’
이러니 어떻게 아르베우타를 믿을 수 있을까.
그간 외줄 타기를 하듯 흔들렸던 감정이 뚝 잘려버린 기분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또 후련했다.
테르델을 이용해서 굳이 이러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더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기억이 진짜든 거짓이든, 진위를 가릴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토록 싫다는데.’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세실레는 분기 어린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보며 읊조렸다.
“제가 말씀드렸죠.”
“……세실레.”
“조금이라도 제 심기를 어지럽혔다간, 다음 날 제가 그 자리에 없을 거라고.”
“…….”
“저는 정말로 많이 참아왔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또 제국을 위해서. 그런데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던 것 같네요.”
그녀를 중심에 두고 소용돌이치는 불안은 이걸로 끝이었다.
제발 그러기를 세실레는 빌었다.
그녀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되도록 저가 차분하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경고입니다. 다시는 저를 거스르지 마세요. 그러면 정말, 제국을 떠나버리고 말 테니까.”
이미 한 번 떠나봤다.
두 번, 세 번 떠나는 건 더욱 쉬울 터였다.
그럼에도 쉬이 황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를 얽매는 족쇄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편이라곤 없는 줄 알았던 세상에, 놓지 못할 인연들이 생겼다.
자신이 없으면 이유 없이 사람들이 다쳤다.
꿋꿋이 황궁에 남는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니 언젠가 족쇄가 풀리면, 그땐 정말로 황궁을 영영 떠나버릴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제쯤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는지 알아봐야겠어.’
세실레는 따라붙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한 것을 모른 척하면서.
***
세실레는 신전에 들렀다.
하지만 대신관은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성녀의 선출은 신의 뜻입니다. 저희는 기다릴 뿐이지요.”
세실레는 의아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보통은 이맘때쯤 성녀가 나오지 않았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근래 이런저런 일이 많은 탓인지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신탁이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세실레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기다려야겠어요.”
“그런데 성녀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힘든 일이 있으신지요.”
세실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속내가 밖에까지 드러났나 싶었다.
세실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대신관은 물러나지 않고 조심스레 뒤편의 신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직접 신탁을 받아보시면 어떻습니까?”
뜻밖의 제안에 세실레가 눈을 크게 뜨곤 물었다.
“……직접요?”
“네. 응답하실지도 모릅니다.”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의식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지식도 짧고 어찌하는지도 몰랐다.
세실레가 거절하자 대신관이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저 궁금하신 것을 물어보시면 됩니다.”
“……궁금한 것?”
“네, 무엇이든지. 궁금하신 것에 집중하신 채로 기도하십시오.”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전 신관들이 예배를 드릴 때 특별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만 드리면 된단 말이지.’
세실레는 실오라기라도 잡는 듯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번 해볼게요.”
***
대신관은 세실레를 위해 기도실을 비워주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기도실은 은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녀는 조명을 어둡게 한 기도실을 둘러보다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단상 위에는 새하얀 여신의 조각상이 놓여있었다.
정확한 외모는 구현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긴 머리칼에 흘러내리는 옷을 입은 것만 보면, 평범한 제국 귀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랑 비슷한 차림이네.’
실없는 생각을 하던 세실레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신관은 기도에 별다른 형식은 없다고 했다.
그저 진실하고 간절하기만 하면 된댔다.
그의 말에 따라 세실레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러곤 무언가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한 가지를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원래는 차기 성녀에 관해 물어보려 했지만, 그 외에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자신이 정말로 수백 년 전에도 살아 있었는지부터 어째서 저를 성녀로 뽑은 것인지까지.
고민하던 세실레는 천천히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다.
‘신이여. 저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