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쟈르스는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엔 세실레가 서 있었다.
그는 세실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나 세실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썹을 찌푸렸다.
디젤라의 방에서 쟈르스가 나오는 것이 어느 사이에 당연시되었다.
디젤라의 치료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못마땅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탐탁지 않아도, 쟈르스를 디젤라의 곁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세실레는 말을 삼켰다.
쟈르스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디젤라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
침묵하는 세실레를 두고 쟈르스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디젤라가 말한 자료를 보러 왔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물어보지.”
세실레는 가타부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디젤라가 보였다.
디젤라는 세실레를 보곤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
“네가 말한 자료를 보고 싶어서.”
“아까는 필요 없다더니.”
뾰족한 대꾸에 세실레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깐 말이 좀 심했던 것 같아. 사과할게.”
“……뭐, 그래.”
순순한 사과에 디젤라는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내고 싶기는 했지만, 한 편으론 언니가 황제와 사이가 나쁜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이혼도 못 할 테고.’
애초에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다. 정략혼이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 이런 건가.’
슬픈 현실이었다. 자신이 사랑에 흠뻑 빠져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더욱.
씁쓸한 사실을 깨달은 디젤라는 책장으로 갔다.
책장 한편에 가지런히 꽂힌 자료를 보니 더욱 한숨이 나왔다.
‘이게 정말로 두 사람의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자료에 적힌 이야기와는 달리, 황제 부부의 사이는 영영 좋아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디젤라는 울적한 표정으로 세실레에게 자료를 내밀었다.
세실레는 자료를 건네받고는 가볍게 훑었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군.’
오래된 잉크를 머금은 종이는 누렇게 변색 된 데다 부분부분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읽는 데 큰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찬찬히 자료를 훑던 세실레는 이윽고 무언갈 발견하곤 안색을 굳혔다.
“……이건.”
자료엔 그녀와 아르베우타의 이름이 보란 듯이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필체도 아르베우타의 것이었다.
본래 흘려 쓰는 것을 즐기는 그의 평소 습관과는 달리,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는지 필체가 발랐다.
무심코 자료를 훑던 세실레가 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간 지켜본 바로 아르베우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세실레로서는 예측하기 힘든 힘을 사용했다.
‘자료를 위조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괜한 것을 본 기분이었다.
온통 거짓말투성일 게 분명했다. 아예 보지 않는 편이 날 터였다.
그러나 세실레는 자료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르베우타가 적은 증상이 디젤라의 초기 증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젤라가 쟈르스로 인해 증상이 완화되었던 것처럼, 그도 누군가로 인해 증상이 완화되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세실레, 본인이었다.
세실레는 떨리는 눈으로 자료를 훑었다.
그곳엔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세실레가 곁에 있을 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세실레 없이 더는 살 수 없다. 그녀도 마찬가지일까?
이제 한계인 것 같다. 세실레가 곁에 있어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는다.
……이 말하길,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곧 정신을 잃을 것이다.
무섭다. 나는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깨어났을 때, 세실레는 곁에 있을까.
세실레는 화급히 자료를 덮었다.
그러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여기 적힌 건 어디까지 믿을 수 있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자료에 적힌 것들이 그녀가 찾아 헤매던 각성자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도통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혼란스러웠지만, 지금까지 봐온 디젤라의 증상과 상당수 흡사했다.
겨우 자료를 펼쳐, 마지막 장까지 훑은 세실레는 다시 자료를 디젤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때까지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디젤라가 넌지시 물어왔다.
“어때? 이제 내 말에 신뢰가 가?”
“……그가 너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조차 아르베우타가 꾸며낸 일인지도 모르지.”
차분한 대답에 디젤라가 성이 나선 소리쳤다.
“언니! 그 정도면 의심병 아냐?”
“그럴지도.”
진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자료가 중간에서 끊긴 것 같아. 기록을 위해서라면 각성 후의 변화나 능력에 대해서도 적었을 텐데.”
세실레의 깐깐한 태도에 디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어쨌든 내게 쟈르스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진 알겠지? 언니도 그랬다며.”
“무슨 소리야? 내 기억엔 없는 일이야.”
세실레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뒤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실레는 도망치듯 디젤라의 침실을 나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구석에 다다라서야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애초에 몇백 년 전에 사람이 살아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세실레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호흡이 흐트러졌다.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다.
쉼 없이 감정이 울컥거리더니 기어코 손발이 떨렸다.
고작 자료를 읽었을 뿐인데,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로 저기에 적힌 세실레가 자신이라는 듯이.
세실레는 혼란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리자.’
그녀는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었다.
자신이 수백 년 전 사람일 리가 없었다.
제 탄생을 신관들이 지켜봤고 부모님이 지켜봤다. 자리엔 산파마저 있었다.
그건 아르베우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두 눈으로 아르베우타의 성장 과정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저와 같이 어릴 때 만나, 청소년기를 보냈고 어른이 되었다.
그도 저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수백 년 전,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리 없단 뜻이었다.
분명 그러할 진데.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알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자꾸만 시선이 외궁을 향하고 몸이 움찔거렸다.
세실레는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르베우타를 보고 싶었다.
당장 아르베우타를 만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손끝을 말아쥐며 버티던 세실레는 기어코 몸을 돌렸다.
이지를 배반한 몸이, 어느새 필사적으로 외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인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끝에 다다르고 시야가 눈물에 젖어 흐릿했다.
그럼에도 멈춰설 수 없었다. 뛰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것처럼.
마침내 복도를 빠져나와 외궁의 통로에 다다라서야, 세실레는 멈춰 섰다.
그러곤 멀리 보이는 집무실을 눈에 담으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벽에 몸을 기대었다.
가쁜 호흡을 고르느라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어찌나 서둘렀던지 목 언저리에서 피 맛이 났다.
그러나 숨이 차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시선은 자꾸만 아르베우타가 있을 집무실을 향했다.
얼마 남지 않은 곳에 그가 있었다.
세실레는 조용히 아르베우타의 기척을 느끼었다.
‘오늘도 저기 있네.’
무심코 깨달은 사실에 입안이 씁쓸했다.
그는 언제나 집무실에 있었다.
언제 자리를 비우는가 싶을 정도로, 항상 일에 묻혀 살았다.
곰곰이 과거를 떠올리던 세실레가 치맛자락을 말아쥐었다.
‘……나는 그가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세실레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었다.
그가 말해주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녀 또한 따로 알아보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잘난 사람이니, 알아서 잘할 거라 단정 짓고 말았다.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간 무얼 하고 살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찰나였다.
머릿속으로 벼락같은 목소리가 스미어든 탓이었다.
‘이런 식의 접근도 피로하다는 뜻이지.’
숨이 멎었다.
들끓던 마음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집무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곳에서 아르베우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또한 자신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다.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손끝이 떨렸다. 세실레는 떨림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들었다.
세실레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집무실에 있는 줄 알았던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세실레는 갑작스레 나타난 아르베우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일하기 위함인지 검갈색 머리칼을 한데 모아 묶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옅게 찌푸린 눈매, 우뚝 선 콧대와 다부지게 다물린 입술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만큼은 세실레를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힘주어 쥔 세실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들더니, 조심스레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윽고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손등에 닿았다.
짧은 접촉이었으나 기대와는 달리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기억하던 감각과 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기억하던 감각?’
묘한 괴리를 알아차린 세실레가 급히 손을 잡아뺐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왜 도망가지? 나는 그대의 남편인데.”
세실레는 침묵했다. 대신 또렷한 시선으로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아르베우타가 아니었다.
아르베우타라면 남편이라는 식의 말을 할 리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보지 않았으니까.
세실레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아르베우타의 모습을 한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러는 중에도 남자는 착실하게 세실레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거리가 성큼 가까워졌다. 세실레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그대는 황제 폐하가 아니로군. ……테르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