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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65화 (6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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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도 이유 모를 배려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신기한 건, 꼭 그럴 때마다 미열을 앓거나 어딘가를 다쳤다.

그러면 아르베우타의 배려도 사라졌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세실레의 눈동자가 차차 어둡게 변했다.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 착각일뿐이겠지.”

이번 일도, 과거의 일도 모두 착각일 터였다. 지난번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부탁한 일이야. 그대가 나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아서.’

세실레는 손을 말아쥐었다. 그러곤 재차 다짐했다.

그의 이유 없는 배려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

쟈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말 한 번 잘못했다고 또 감옥행이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군.’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말의 어디가 디젤라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하는 일 없냐고 했던 게 문젠가.’

그 외에도 짚이는 건 많았다.

‘한낮에 침대에 눕는 건 중죄라든지.’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이었다.

‘……교양을 쌓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는 말이 기분 나빴는지도.’

쟈르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이론은 간파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전 연애는 영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감옥에 가두다니.’

최소한 항변의 기회는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황궁에서 살다 보니 기본적인 인권마저 침해당하고 있었다.

애초에 황제의 개인사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타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쟈르스의 은퇴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빠르게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우디 왕국으로 도망쳐서 나무를 사들인 다음…….’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디젤라였다.

디젤라가 서늘한 시선으로 쟈르스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집중한 쟈르스는 디젤라의 기척을 알아차리기는커녕,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쟈르스를 보며, 디젤라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도망칠 생각해?”

“…….”

“내 말 안 들리지!”

“……아, 오셨습니까.”

쟈르스가 고개를 들었다. 회색빛 눈동자는 평온하기만 했다.

디젤라는 쟈르스가 평온한 것이 괜히 분했다.

‘나는 쟤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쟈르스가 없으면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거기다 황제가 준 자료를 읽고 나니 공포심은 배에 달했다.

‘쟈르스는 나 없이 살 수 있겠지.’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는 하는데, 디젤라는 그 말조차 입에 발린 말처럼 느껴졌다.

언제고 그가 떠날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디젤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제야 쟈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을 뻗어 디젤라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런, 피가 나겠군요.”

철창 속 얼굴은 여전히 전과 같았다. 하지만 디젤라는 우뚝 서선 내려다보는 시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 몸짓, 말 하나하나가 잠시 떨어져 있던 만큼 더욱 애틋하게 달아올랐다.

‘……사과를 받으려고 했는데.’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디젤라는 감옥의 문을 열쇠로 연 다음, 곧장 쟈르스를 껴안은 채 소리쳤다.

“날 떠나지 말랬잖아!”

“……당신이 저를 가두지 않았습니까.”

“몰라, 어쨌든 내 곁에만 있어.”

쟈르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이 흘렀다. 그러나 곤란한 것도 잠시 쟈르스는 손을 뻗어 디젤라를 가만 다독여주었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동안 쟈르스가 없을 때 디젤라가 보였던 반응을 보면, 이만치 버틴 것도 오래 버틴 것이었다.

‘그러게 감옥에 가두라는 말은 왜 해서.’

무어라 타박하려던 쟈르스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디젤라는 아이였다. 막 세상에 발을 디뎌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아이.

배운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

앞뒤 가리지 않는 거침 없는 성품은 매력적이었으나 이럴 땐 여러모로 곤란했다.

‘몸만 컸군.’

쟈르스 입장에선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도 사랑스러우니까.

하지만 디젤라의 지평을 넓혀줄 필요도 있었다.

‘배울 것이 많겠어.’

시간이 많으니 디젤라를 가르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 도주 계획은 슬그머니 밀려났다.

모든 것에서 디젤라를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쟈르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물러졌군, 나도.’

디젤라는 일방향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젤라의 생각은 틀렸다.

그 또한 착실히 디젤라에게 빠져들고 있었으니까.

다만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황제와 비슷한 길을 밟겠군.’

지금도 이런데, 시간이 더 흐르면 꼼짝없이 디젤라에게 휘둘릴 것이다.

쟈르스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디젤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엄한 눈빛이 디젤라를 응시했다.

“다시는 절 이런 곳에 가두지 마십시오.”

“……그럼 날 떠날 거야?”

디젤라의 눈망울이 아롱졌다. 집착과 서글픔으로 범벅된 눈동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그는 아닌 척, 단호하게 입매를 굳혔다.

“물론이죠. 불쾌합니다.”

“……불쾌해?”

“물론이죠. 저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디젤라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쟈르스가 우울해 보이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알겠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인 걸 아시면 됐습니다.”

쟈르스는 앞서 걸어 나갔다. 태연한 그를 보며, 디젤라가 눈을 치켜떴다.

“야! 너……. 아니다. 나랑 같이 가!”

“빨리 오십시오. 그렇게 늦어서 어디에 쓴답니까.”

또 타박을 들었다. 이러려고 쟈르스를 감옥에 가둔 것이 아니었는데.

디젤라는 이를 갈며 쟈르스의 팔짱을 끼었다. 그러곤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 또 감옥에 갇히고 싶지?”

“그럴 리가요.”

“그런데 또 이래?”

“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뻔뻔한 대꾸에 디젤라는 분을 냈다.

하지만 다년간 온갖 사람들을 상대해 온 쟈르스에게 디젤라의 화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냉철하게 상황을 살피며 행동을 결정했다.

‘달래주어야겠지.’

언젠가 읽었던 연애서 어딘가에 그런 공식이 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쟈르스는 한숨을 삼키며 가만가만 디젤라의 등을 도닥였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씨이, 너 자꾸 이런 식으로.”

“제가 뭘요.”

“너 나빠!”

“싫으면 가십……? 그런데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쟈르스가 멈춰섰다. 디젤라는 그조차 연기인 것 같아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소리! 또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거지?”

“아닙니다. 분명…….”

쟈르스가 주변을 훑었다. 디젤라는 그것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 생각하여 더 화가 났다.

그 순간, 그녀의 귀에도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 구해줘.]

디젤라가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구해달라고 했어.”

“그렇습니까. 저는 짐승 우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마주한 기분에 디젤라는 쟈르스를 잡아끌었다.

“빠, 빨리 가자.”

그러자 더욱 선명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있다. 그가 갇혔던 감옥에!]

“꺄악! 뭐, 뭐야!”

디젤라는 쟈르스가 갇혔던 감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언뜻 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무서운 상황에 디젤라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 난 몰라. 빨리 가자!”

디젤라는 쟈르스를 잡아끌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쟈르스 또한 기이한 현상에 낯을 굳힌 채 그녀를 묵묵히 따랐다.

그러는 중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꺼내달라니까. 나는 황후궁의…….]

“시끄러!”

마침내 지하 감옥의 계단을 모두 오른 디젤라가 화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곧장 세실레가 수련 중인 호숫가로 달려갔다.

“언니이이!”

***

세실레는 힘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빛무리가 응집되었다, 이내 흩어졌다.

고작 힘을 응축하고 움직였을 뿐인데도 몸에 비 오듯 땀이 흘렀다.

그녀는 흐린 숨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영 늘지를 않네.’

독학이라 더욱 발전이 더뎠다. 여럿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방법을 모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밤에 이능을 쓸 때와 비교하며 수련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과정은 더디고 체력은 금세 소진되었다.

세실레는 잠시 쉴 겸,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곤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수련 일지!’라고 적힌 종이에 한 자 한 자 글을 적었다.

‘공중에서 5초간 버팀.’

간단한 일지 작성을 마칠 무렵, 뒤에서 디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쟈르스의 기척도 함께였다.

‘결국 데리고 나왔군.’

세실레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디젤라가 행복한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세실레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디젤라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쟈르스도 상황은 비슷했다.

‘무슨 일이지.’

잠시나마 쟈르스를 의심했지만, 둘은 꼬옥 손을 잡고 있었다.

싸운 건 아닌 것 같았다.

세실레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자 디젤라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언니! 감옥에 유령이 있어.”

“……유령?”

“응, 막 구해달라고. 어휴, 소름 돋아!”

디젤라가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뻣뻣하게 굳어선 입도 벙긋 못하는 걸 보아하니 쟈르스도 상황은 비슷해 보였다.

‘뭐 때문이지.’

잠시 고민하던 세실레의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도르데아?’

세실레는 이능으로 도르데아의 기척을 느꼈다. 그녀의 기척은 여전히 쟈르스가 갇혀 있던 감옥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디젤라와 쟈르스는 방금 감옥을 나왔다.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르데아의 기척을 느낀 거로군.’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감옥을 향해 걸어갔다.

무어라 언질도 없이 서두르는 그녀를 보며, 디젤라가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저런담?”

***

세실레는 낱낱이 감옥을 살폈다.

도르데아를 찾아야 했다.

그간의 정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녀는 테르델의 능력에 대한 단서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도르데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 흐르도록 힘을 써도 매한가지였다.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쓴 이능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세실레는 부스러지는 이능을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째서…….’

힘을 모두 소진한 탓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잠시 감옥 벽에 몸을 기댄 그녀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피곤했다. 이대로면 곧 잠들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디젤라가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디젤라의 귀에는 들렸다고 했지.’

분명, 구해달라는 말을 했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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