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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64화 (6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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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레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러곤 헛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무얼 기대한 거지, 나는?”

자신이 우스웠다. 우습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이리저리 이용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수도로 돌아왔던가.

애써 다잡은 마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기어코 넘어지려는 것을 테레사가 다가와 부축했다.

하지만 세실레는 지금 테레사의 존재조차 벅찼다.

세실레는 테레사를 쳐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혼자 있고 싶어.”

“……폐하.”

“가.”

세실레는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는 달리, 억눌렀던 감정이 둑 터지듯 흘러넘쳤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세실레는 강가의 바위에 앉았다. 그녀에게 있어 감정을 죽이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잔잔한 강물처럼 아무렇지 않게 될 것이다.

‘애초에 기대할 것도 없었잖아.’

혼자 설레발 친 것은 자신뿐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 그간의 혼란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잘 됐지.’

더한 감정이 솟구치기 전에 저지당해 다행이었다.

세실레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아르베우타는 빠르게 숲을 벗어났다.

그러나 점잖던 걸음은 어느새 빨라졌고 숨은 턱 끝에 다다랐다.

마침내 세실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서야 아르베우타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다, 두 손으로 수어 번 마른세수했다.

안색이 희게 질려 창백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헛숨이 흘렀다.

“……말도 안 돼.”

세실레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허망하다 못해, 체념한 듯한 표정.

맹세코 그는 세실레가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기억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의 감정도 그리 깊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혼란스러운 정도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다른,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는 게 맞았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최선이라 생각한 방법이 지금은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러니 당장 가서 방금 한 말은 거짓이었다고, 테르델은 적이니 경계하라고 말해주어야 했다.

멋대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찰나의 실수에 좌절했다.

그러나 혼란은 잠시였다. 금방 안정을 되찾은 아르베우타가 입매를 굳혔다.

‘……어차피 믿지 않겠지.’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과 테르델을 같은 선상에 놓고 더욱 의심할 게 분명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테르델의 꾐에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둘 다 악으로 남는 것이 나았다. 상종도 못 할 파렴치한으로 여겨, 마음을 줄 여지 따윈 남지 않도록.

‘차라리 잘된 일이군.’

충격이 크다면, 그만큼 경계심도 높아질 터였다. 지금은 세실레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편이 나았다.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사랑하지 말고.

세렌디가 원하던 ‘신’의 모습 그대로-.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어렸다. 일전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무서워요.’

‘어째서입니까?’

‘……음, 어머니는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를 바라세요. 이 아름다운 자연도, 그리고 당신도.’

‘…….’

‘모든 것에 초연해지라는 말이, 나는 너무 무서워요. 더는 당신을 보고도 설레지 않게 될까 봐.’

아르베우타는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두툼한 팔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이가 갈리고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머릿속은 기어코 기억을 되살려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되어도, 나는 그대 곁을 지킬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의 곁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었다.

‘기억만 돌아오면.’

모든 것이 원위치를 찾을 테니까. 그때까지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

황궁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은 따스해지나 싶었던 황제 부부 사이에 냉기가 흘렀다.

황제는 집무실에 틀어박혔고 황후궁은 여전히 폐쇄 상태였다.

게다가 황제의 전 수석 비서관인 쟈르스가 다시금 황후궁 지하 감옥에 갇혔단 소문이 돌면서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졌다.

수도에서 도는 소문이 심상찮았다.

황제의 부도덕함을 탓하는 소문엔, 그로 인해 황후가 황제를 멀리하고 있다고 했다.

황후는 세렌디의 딸이었고 지난 이년 간의 끔찍한 세월을 끝으로 돌아왔다.

지난 이년을 기억하는 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가 수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덕택에 황제에게로 항의 서신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

아르베우타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를 심란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황후궁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군.’

내내 소식을 보고 받던 창구가 막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실레의 일과를 매일같이 보고 받아온 아르베우타로서는 속이 갑갑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경계가 삼엄해져 무엇도 쉽지 않았다.

‘몰래 들어갈 수도 없고.’

아르베우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군.’

세실레의 얼굴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그러진 눈매는 꼭 울기 직전이었다.

물론, 아르베우타의 시야에 어른거리는 잔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세실레는 그저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기만 했다.

그녀는 강인했다. 쉬이 흔들릴지언정,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를 영영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르베우타는 주먹을 힘주어 말아쥐었다.

그럴 리 없었다. 세실레는 약속대로 모든 기억을 되찾을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예전처럼 저를 보고, 이름을 부르고, 안아줄 것이다.

그는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버텨야 했다. 이것은 그녀와의 약속이었다.

세실레가 모든 기억을 되찾고 그녀의 판단으로 모든 걸 선택할 때까지, 곁을 지키기로 했으니까.

‘약속해줘요. 나를 돕겠다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곳에 남을지 혹은 달로 돌아갈지. 모든 건 내가 선택할 거예요. 그러니 언젠가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당신은 내가 지상에 머물도록 해야 해, 알겠죠?’

그녀가 어디까지 예측했던 건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세실레는 이러한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제게 신신당부했을 정도로.

그러니 세실레가 기억을 되찾은 후에,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구원하는 것도 그 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단순했다.

세실레가 타의로 달로 돌아가는 일을 막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세실레가 테르델에 의해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군.’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세실레는 착실하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고 낮에도 이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정황이 세실레의 각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기나긴 기다림의 끝을 보는 것이다.

아르베우타는 항의 서신을 구겨 쥐며 중얼거렸다.

“신전에 감시를 붙여.”

황후궁 접근이 어려우니, 신전이라도 감시해야 했다.

언제고 통로가 열릴 때, 막아설 수 있도록.

***

수도는 혼비백산이었다. 후유증을 앓던 이들이 모두 반 시체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황후께서 노하셨다며 사방이 난리였다.

이들의 외침은 폐쇄된 황후궁에까지 다다랐다.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 들은 이는 테레사였다. 그녀는 황후에게로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매일같이 자비를 내려달라며 성 앞에서 울부짖는답니다.”

“…….”

“혹여 짐작 가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성수 때문이었다. 후유증을 앓던 이들이 성수를 마신 탓에 정화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세실레는 이유는 짐작했으나 딱히 해줄 일이 없었다.

‘강 상류에 성수를 부었으니.’

이미 이곳저곳 스며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렇군요.”

테레사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황후와 관련해서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 걱정하는 투였다.

그럴듯한 인과관계였다. 백성들이 고통받는 데도 치유하지 못하는 성녀,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모든 현상이 황제의 부도덕함 때문이라 소문이 났단다.

덕분에 그들의 비난도 모조리 황제를 향했다.

세실레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꼭 죄를 뒤집어쓰는 것 같군.’

아르베우타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일곱 살, 세실레가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왔을 때도 아르베우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실레는 그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자신을 못마땅히 여기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에게 시선 한 번 주는 적이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여겼다. 그 취급이 섭섭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실은 그 정도 일에 섭섭할 여력조차 없었다. 곳곳에 그녀의 행동을 꼬투리 잡으려는 사람이 넘쳐났으니까.

그래선지 어릴 적엔 자주 떨었다. 공식 석상에서도 몸을 떨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르베우타에게서 라벤더 향이 났다.

남자 황족이 즐겨 쓰는 향이 아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라벤더 향을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으니까.

‘또……다른 일도 있었지.’

어릴 적 세실레는 유달리 체구가 작았다. 그녀에게 있어 커다란 의자에 오르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의범절을 강요하는 이들은 세실레의 체격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자세가 흐트러졌다며 혼내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발밑에 발 받침대가 놓였다. 아르베우타의 밑에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틈을 타, 조용히 물었다.

‘저기, 이거…….’

‘…….’

‘아무것도 아녜요.’

그가 침묵을 지켜 무안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때마침 주변은 그녀가 좋아하는 백합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독할 정도로 강한 향기가 다른 꽃들 사이에서도 유독 도드라졌다.

어릴 적 저택에서 키웠던 꽃이었다. 익숙한 향기에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덕분에 세실레는 그날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것에 트집이 잡혔으나 무던히 흘러간 하루였다.

돌아와서 배앓이를 하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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