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오랜만이군.”
“…….”
“네가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
테르델이 눈매를 좁혔다. 그의 뒤엔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그는 테르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힘을 개방한 채였다.
그제야 군데군데 놓인 덫을 확인한 테르델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로 올 줄 어떻게 알았지?”
“루탱 백작의 뒤를 쫓았다.”
“허, 나와 접촉한 이들을 파악한 모양이지?”
테르델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읊조렸다.
“비열한 방식은 여전해.”
아르베우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힘을 풀어낼 뿐이었다.
그들의 바로 옆엔 신력이 흐르는 강이 있었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가 전적으로 유리했다.
아르베우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눈동자엔 얼핏 희열이 어려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테르델이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보아하니 아르베우타는 힘을 완전히 각성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아르베우타의 기세가 만만찮았다.
그간 세실레를 곁에 두고 취한 이득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테르델에게 있어, 신력은 양면의 검과 같았다.
그는 신력을 타락시킬 수도, 반대로 신력에 정화될 수도 있었으므로.
‘세실레를 먼저 타락시켰어야 했는데.’
이렇듯 성수를 퍼다 날랐을 줄은 몰랐다. 분명 아르베우타와 세실레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테르델이 주저하는 사이, 아르베우타의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아르베우타는 호흡을 고르고는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대기가 반으로 갈라지며 귀가 떨어질 정도의 공명음이 들렸다.
거대하게 몰아치는 힘에 테르델이 몸을 떨었다. 전율이 일 정도의 거대한 힘이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강해졌군. 힘을 갈구하던 꼬맹이였으면서.”
아르베우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르델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각성자, 네 손으로 대륙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를 고대했는데.”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게 됐군.”
“다른 각성자는 누구지?”
“네가 알 필요 없다.”
“아니, 내가 필요할 거야.”
“필요 없어. 이미 열쇠를 찾았거든, 나처럼.”
아르베우타는 더는 이야기를 끌 생각이 없다는 듯 테르델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크게 칼을 휘둘러 종으로 베었다.
그러자 테르델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르베우타는 곧장 눈을 감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아르베우타의 손에 쥐고 있던 검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도망친 건가.’
처음부터 허상이었다기엔, 테르델의 실체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게 가능한가.’
세실레에게서도 도망친 걸 보면, 정말로 대단한 힘을 얻기는 한 모양이었다.
‘피곤하게 됐군.’
아르베우타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곤 제 앞에 온 이를 조용히 응시했다.
“……세실레.”
그곳엔 기대치도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
세실레는 황후궁에 있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뭐였지?’
멀리서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한 기운에 세실레의 눈썹이 어그러졌다.
“분명 어디선가 느껴봤는데…….”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세실레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인지라, 이능을 쓰는 데 많은 힘이 필요했다.
게다가 조금 전 수련을 마친 탓에 기력이 남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테레사를 바라봤다.
“테레사, 힘 느껴져?”
“네.”
“저리로 데려다줘.”
테레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실레가 낮에도 이능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지만, 위험했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읊조렸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봐야겠어. 네가 망설이면, 나 혼자서라도 갈 거야.”
미지의 힘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치 아르베우타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의 파동처럼.
‘어쩌면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르지.’
세실레가 곧장 테라스로 나아갔다. 푸르른 눈동자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제야 테레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세실레 보다 앞서나간 테레사가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허공에 붉은 날개를 가진 거대한 새가 떠올랐다.
붉은 새는 난간 가까이에 몸을 대어, 세실레가 올라타기 편하게끔 했다. 세실레는 테레사의 위로 올라타며 깃털을 쥐었다.
“고마워.”
세실레는 가볍게 테레사의 머리 부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테레사가 비행하며 몸을 위로 띄웠다.
***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황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울리베 강의 상류였다.
지형이 거칠어,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수풀이 울창하게 솟은 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을 살펴보던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베우타?’
어째서 황제가 밖으로 나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능을 써, 시력을 돋운 그녀는 아래에서 보이는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테르델 대공.’
아르베우타와 테르델이 함께 있었다.
그러다 힘이 소용돌이치더니 테르델 대공이 묘연하게 사라졌다.
앞뒤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르베우타와 테르델이 만났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둘이 무슨 관계인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직 정황을 모르는데도, 지나친 실망감이 그녀를 맴돌았다.
‘성급하지 말자.’
찬찬히 상황을 알아보는 게 먼저였다. 세실레는 무겁게 내려앉은 심장 부근을 쥐며 겨우 아래로 내려섰다.
땅에 발을 딛고도,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실레가 망설이는 낯으로 아르베우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실레.”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선지 머리가 울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상한 반응을 무어라 해석하면 좋을지 몰랐다.
분명한 사실은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진실을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아르베우타가 테르델과 공모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버티지 못할지도 몰랐다.
세실레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여리게 몸을 떠는 세실레를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몸을 떠는군. 괜찮은 건가.”
돌연 세실레가 걸음을 멎고 우뚝 섰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쳐다보았다.
그의 낯은 태연했고 음성은 깊고 묵직했다.
태연자약한 태도를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는…….”
“…….”
“아니,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세실레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느릿한 숨이 흘렀다.
아르베우타의 시선이 세실레를 훑었다.
세게 쥔 손에서 뼈마디가 두드러졌고 남몰래 볼살을 문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무엇을 봤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와 테르델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변명이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세실레가 이번 일을 알아선 안 돼.’
테르델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세실레에게 접근할 게 분명했다.
간악한 말로 그녀를 유혹하고 흔들리게 할 것이다.
마침내 세실레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까지.
그게 바로 테르델이 원하는 것이었다.
세실레가 추락하여, 어둠에 물드는 것. 오키드리아 대륙에 신의 축복을 걷고 다시금 악령이 들끓던 세상이 도래하는 것.
테르델이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르베우타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곤 입을 열었다.
“봤나?”
“…….”
“봤나 보군. 황후궁 폐쇄를 해서 밖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
“조심성이 부족했군.”
세실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르베우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탓이었다.
하지만 테르델과 그가 같은 편이라기엔, 수상쩍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테르델은 아르베우타를 경계하라고 했다.
‘현 황제를 믿지 마세요. 그는 신을 저주하며 당신을 나락으로 이끌 자입니다. 최근에도 이상한 경험을 하셨죠? 황제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거나, 괜히 마음이 가는 등의.’
그런데 둘이 같은 편일 리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세실레의 심장이 재게 뛰었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또다시 이유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가 찾아왔다.
휩쓸려서는 안 됐다. 세실레는 입술을 짓씹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르베우타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을 애써 감춘 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테르델 대공과 무슨 사이죠?”
“이미 봤을 텐데.”
“아니, 그럴 리 없어. 대공은 분명…….”
세실레는 말을 삼켰다.
아르베우타의 앞에서 테르델이 한 말을 낱낱이 알려줘도 좋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세실레가 망설이자 아르베우타의 입꼬리가 휘었다.
그는 테르델이 무슨 말을 했을지 금방 예측했다. 테르델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좋게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시점이라면, 테르델 또한 세실레의 기억이 서서히 되돌아오고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세실레를 동요시킬 말은 하나였다.
‘나를 믿지 말라고 했겠지.’
속 쓰린 일이지만, 아르베우타는 테르델의 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흔들리는 세실레가 마음을 다잡기엔, 가장 효과적인 일일 테니까.
그는 헛숨을 뱉으며 읊조렸다.
“정말이지 순진한 여자군.”
“……뭐라고요?”
“내가 부탁한 일이야. 그대가 나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아서.”
“…….”
“이런 식의 접근도 피로하다는 뜻이지.”
아르베우타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표정도, 걸음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