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디젤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더 좋아졌다.
얼굴에 윤기가 흘렀고 식욕도 왕성해졌다. 덕분에 빼빼 마른 몸에 살이 붙어 훨씬 보기 좋아졌다.
‘사랑의 힘인가.’
첫눈에 반해서 악한 기운을 이겨냈다는, 로맨틱한 가설이 영 틀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세실레가 조용히 침묵하자, 디젤라가 쾅 테이블을 두드렸다.
“언니! 진짜 이러기야?”
“……언제는 끼어들지 말라면서.”
“끼어들지 마란다고 정말 끼어들지 않아? 가서 한마디 좀 해줘. 저거, 완전 날 잡은 물고기 취급한다니까?”
정말로 그랬다간 왜 벌을 주냐며 화를 낼 테다.
디젤라의 행동을 꿰뚫고 있는 세실레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데?”
“감옥에라도 가둬야겠어! 다시 내게 애원하며 매달리도록.”
과격한 처사였지만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디젤라의 화는 금방 풀렸다.
게다가 쟈르스는 이미 눈 밖에 난 사람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무슨 고생을 하든 관심 밖이었다.
‘원래 평생 가둬놓을 생각이었는걸, 뭐.’
세실레는 평온한 어조로 읊조렸다.
“쟈르스를 감옥에 가둬. 도르데아를 찾을 겸,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가두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곳에 24시간 있다 보면, 무언가 특별한 점을 발견할지도 몰랐다.
그러자 디젤라가 턱을 괴며 물어왔다.
“그 할머니는 아직도 못 찾았어?”
“……디젤라, 할머니라니.”
“아, 할머니까지는 아닌가? 어쨌든 그 까칠한 아줌마 말이야.”
가차 없는 말에 세실레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루베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디젤라의 교육부터 시작해야 할 참이었다.
‘좋은 선생을 구해봐야겠군.’
되도록 엄하지 않고 상냥한 사람으로 구할 생각이었다. 디젤라의 불같은 성격도 감내할 수 있는.
하지만 세실레는 알고 있는 귀족들이 많지 않았다.
‘이럴 때 도르데아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 텐데.’
도르데아의 훈육법은 엄격해서 디젤라와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많은 귀부인을 알고 있으니 여럿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문득 도르데아의 빈자리를 느끼던 세실레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여러모로 의심했지만, 쌓인 정이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세실레가 입을 다물자 디젤라가 세실레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언니! 또 그러지?”
“……뭐가.”
“또 넋 놓고 있잖아!”
세실레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더듬었다.
그러자 루베르가 디젤라를 향해 바락 소리쳤다.
“왜 우리 엄마한테 화내여!”
“넌 뭐야. 진짜 아들도 아닌 게.”
“아들 마자! 엄마, 나 이 아줌마 시러!”
“아줌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못 생겨써!!”
루베르는 무심코 소리치고는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다음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 세실레를 쳐다봤다.
눈치를 보는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디젤라 마저 화를 가라앉힐 정도로.
하지만 이대로 보아 넘기면 또 못된 말을 할 게 분명했다.
세실레는 엄한 표정으로 루베르를 다그쳤다.
“루베르, 그런 말 하면 못써.”
“으응, 하지만…….”
“안 돼.”
“응……잘못해써요.”
루베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아래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세실레는 루베르의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디젤라도 크게 화가 나진 않았는지, 조용하게 웅얼거렸다.
“뭐, 나도……미안.”
“웅, 특별히 용서해주께.”
“……뭐? 하아, 아니다 내가 어린 애랑 무얼 하는 건지.”
“응, 루베르 어리니까 누나가 이해해조.”
당당한 읊조림에 디젤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대꾸하는 대신 입에 파이를 집어넣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진짜 가족끼리 모여있는 기분인걸.’
세실레는 간만의 여유를 즐겼다.
***
수도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납치 사건과 더불어 곳곳에서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황제의 부도덕함 때문이라고 했다.
“황제가 천륜을 저버렸다면서.”
“친어미를 유폐했다던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여론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애당초 황후가 사라진 후의 일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탓에, 사람들은 황후를 드러내놓고 비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니었다. 도리어 지난 이년 간의 원망을 담아 더욱 노골적으로 소문이 났다.
“부부 관계도 소원하다더군.”
“황후 폐하께서 만나주지도 않는다지 않나.”
“허……이거 참 문제구먼, 나라가 어찌 되려고!”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분위기를 테르델 또한 눈치챘다.
***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한 허름한 주택이었다.
거리엔 악취가 풍겼고 쥐나 들개 따위의 배설물이 군데군데 널렸다.
저잣거리의 거지도 발을 들이지 않는 음침한 구역이었다.
모두가 피하는 골목에 자리한 낡은 집에 관심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테르델이 있었다. 그는 제 머리 색과 꼭 닮은 자줏빛 와인을 음미하며 보고를 들었다.
“……해서, 황제의 책임이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도는 모양입니다.”
“부질없는 짓을 하는군.”
테르델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해서라도 세실레를 지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 얄팍한 수로 테르델이 쳐놓은 덫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야.”
테르델은 아르베우타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나와주면 나와 고맙지.’
테르델은 바닥에 엎드린 종을 향해 중얼거렸다.
“아르베우타는 죽인다.”
“하지만 그는……접근하기 쉽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 벌써 죽일 생각은 없어.”
어차피 아르베우타는 그가 처리할 생각이었다.
저런 조무래기들은 아르베우타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까.
테르델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맺혔다. 눈치를 보던 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제의 친위대가 타리베르 가문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습니다.”
“아아, 그래. 그렇댔지.”
“어찌할까요?”
타르델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천천히 돌리며 중얼거렸다.
“목을 베어 황제에게 선물로 주도록 하지.”
“황제를 자극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그쪽은 나를 찾아내지도 못한다.”
이번 일로 황제의 무능력은 더욱 두드러질 터였다. 테르델은 아르베우타가 부풀린 소문에 잡아먹히길 바랐다.
‘수습하려 들 땐, 손댈 엄두조차 낼 수 없도록.’
자신의 것을 앗아간 사람이었다. 결코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졌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에겐 더 많은 피와 눈물이 필요했다.
곧 그렇게 될 터였다. 테르델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낡은 나무문이 열리더니 안색이 창백해진 이가 비틀비틀 걸어왔다.
“테, 테르델님. 살려주십……커억!”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는 수도의 유망한 귀족 중 하나였다.
“이름이?”
“루, 루탱 피오르 백작입니다.”
“아하.”
그는 백작의 얼굴을 가만 살폈다.
까뒤집은 눈과 시퍼렇게 변색된 입술이 꼭 독에 중독된 듯 보였다.
두드러지게 그는 흰자위가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성수를 마신 모양이군.”
테르델이 혀를 찼다. 후유증을 앓는 자에게 성수는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동반되는 고통만 크고, 죽지도 않았다. 즉, 절대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테르델이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 무슨 생각으로 성수를 마셨지?”
“마, 마신 적 없, 크윽.”
“마신 적 없다? 그럼 널 미워하는 이가 성수를 마시게 한 모양이군.”
테르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고통이 어떠하든 상관없었다. 제 손으로 성수를 마신 머저리에겐 해줄 것이 없었다.
테르델은 종을 향해 심심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폐기해.”
“알겠습니다.”
“대, 대공 전……읍!”
백작이 발악했다. 끌려가지 않으려 땅을 긁는 손톱이 부스러졌다.
테르델은 백작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그러곤 손을 들어, 종을 저지했다.
“그만.”
백작이 애걸하며 말을 이었다.
“대, 대공 전하. 저는 정말로 성수를 마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 생각해보니, 성수를 구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
“그, 그렇습니다!”
백작이 동아줄을 잡은 사람처럼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테르델의 눈동자는 전보다 더욱 살벌해졌다. 그의 자주색 눈동자가 짙게 변했다.
테르델이 잇새를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 짓이로군.”
성수는 신전과 황후궁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지난번 자신의 출입으로 황후궁은 폐쇄됐다.
그런 와중에 성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거기에 성수의 효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지.’
하지만 아르베우타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일전에 자신에게도 같은 수를 부린 적이 있으므로.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아르베우타.”
테르델은 성큼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순식간에 강가로 향했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울리베 강이었다. 제국의 식수를 담당하는 큰 강이었다.
강으로부터 거대한 신력이 피어올랐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신력에 중독될 정도로.
‘지독하군.’
테르델은 곧장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참기 힘들다는 듯 소매로 코를 가렸다.
이 정도로 많은 성수를 뿌렸다는 건, 아르베우타 또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아예 약을 만들지 못하게 수를 쓴 거로군.’
갓난아이가 성수를 먹고 성수로 씻으면 더 이상 약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이렇게 반응이 빠를 줄은 몰랐는데.’
테르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