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테레사는 세실레를 추스르곤 자리에 앉혔다. 그런 다음 흐트러진 머리를 빗겨주고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더운 날인지라, 과한 보살핌이었지만 세실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실레는 테레사가 할 일을 마칠 때까지 앉아 있다가, 느리게 입을 뗐다.
“넌 테르델이 누군지 알아?”
“모릅니다.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으면 바로 왔을 텐데, 그마저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구나.”
세실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테르델이 등장할 때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세실레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게다가 아르베우타는 왜 말을 아끼는지. 어째서 갑자기 행동을 달리하는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답답했다. 세실레는 테르델 대공의 벌인 일을 잠시 생각하다, 테레사를 향해 물었다.
“테레사. 내가 달로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이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테레사가 낯을 굳혔다. 하지만 세실레는 테레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테레사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죠.”
“그게 무슨 말이야. 똑바로 말해.”
“신화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세렌디 신이 지상을 위해 내린 딸, 그게 황후 폐하이니까요.”
들을수록 모호한 말이었다. 세실레는 침묵한 채 테레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테레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지니신 이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습니까. 신관들의 신력은요? 신이 허구가 아님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은 세렌디의 딸이시고. 슬슬 돌아갈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실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가 거짓이 아니란 건 알케덴에서 다른 대륙으로 떠날 때 이미 실감했다.
그러자 테레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달로 돌아가는 길은 쉬이 열리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의지로 문을 닫았으니까요.”
“……내가 문을 닫았다고?”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곧 승계가 시작될 겁니다. 그 전엔 돌아가셔야 합니다.”
“승계?”
“세렌디의 수명의 다하고 있다는 뜻이죠.”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신의 수명이 다한다니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세실레를 위해 테레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달의 힘은 유한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이능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세렌디 신의 힘은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그건.”
“그러지 않으면 지상이 붕괴될 겁니다. 알케덴을 떠나려 하실 때 느끼셨던 것처럼요.”
“…….”
“그러니 이제부터 준비하셔야 합니다. 우선은 이능을 잘 다루시도록 연습하시는 편이 좋겠군요.”
세실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의 말이 온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힘을 기르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도망쳤지.’
테르델, 그자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하는 행동도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그런 자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힘이 필요했다. 세실레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
세실레는 이능을 수련하기 위해 황후궁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를 도와주기로 한 신관 여럿만 드나들 뿐이었다.
특이한 행보였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황제는 이번 일을 극히 격려했다.
“잘 되었군. 지금은 밖에 나오지 않는 편이 좋다.”
마침 수도에선 심상찮은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세실레가 소식을 늦게 전해 들을수록 좋았다.
아르베우타는 잘되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보고하러 온 시종을 향해 물었다.
“어젯밤은 어땠지?”
“열 곳에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점점 심각해지는군.”
며칠 사이에 영아 납치가 급증했다. 덩달아 꺼림칙한 소문이 곳곳에 퍼졌다. 이 모든 게 황후 때문이라는 식의 소문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을 정리해 놓은 서류를 읽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은 하나같이 노골적으로 세실레를 비난하고 있었다.
‘황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식이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황후의 귀환에 눈물을 흘렸으면서, 참으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린 소문이었지만, 사람들은 점점 동조했다. 실제로 영아 납치가 만연했으니 더더욱.
아이의 부모는 문을 걸어 잠갔고 놀이터는 텅텅 비었다. 수도의 경비도 날로 삼엄해졌다. 그런다 해도 분위기는 완화되지 않았다.
비서관은 침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황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보고에 아르베우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전부터 계획해 놓은 듯 철저하고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범죄 현장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테르델의 짓이다.’
하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었다. 게다가 감시 중인 귀족들은 저택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도 않았다.
기습 점검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수상한 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괴이한 힘을 얻은 모양이지.’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르베우타는 초조한 표정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침묵하는 그를 향해 비서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경비를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늘어나는 경비에 비해 치안은 더욱 안 좋아졌다며, 항의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경비의 수는 줄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비서관이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그는 친위대장을 불러 물었다.
“소문의 근원지는?”
“평범한 술집입니다. 최초 유포자를 잡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발뺌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이번엔 우리 쪽에서 풀어.”
“어떻게 말입니까?”
아르베우타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건 황제가 부도덕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신이 노해서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라.”
친위대장이 당황한 낯으로 아르베우타를 바라봤다. 명령에 복종하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따를 수 없었다.
친위대장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안 됩니다. 저는 못 합니다.”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친위대장이 무얼 걱정하는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황실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 소문을 부채질하라고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소문을 쉬이 잠재울 수 없었다. 범인도 쉽게 잡히지 않을 터였다.
그들이 지금 노리는 것은 세실레의 추락이었다. 이 모든 일을 황후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려는 게 분명했다.
‘그래선 안 되지.’
단지 그녀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세실레가 흔들리면 나라 전체가 흔들렸다.
‘지금은 수련한다고 황후궁을 폐쇄해서 다행이지만.’
소문을 듣자마자 세실레는 흔들릴 게 분명했다. 어쩌면 범인을 잡겠다며 황궁을 나설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발생해선 안 됐다. 지금은 신력으로 가득한 황궁이 그녀에게 가장 안전했다.
아르베우타는 이번 일이 세실레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힘들다면, 세실레마저 이번 일이 자신의 탓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물어뜯을 거리를 제공해 주어야지.’
절대로 테르델의 뜻대로 흘러가게 둘 생각은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읊조렸다.
“현 황제는 어머니를 유폐할 정도로 부도덕하다. 그의 부도덕함의 질린 황후가 도망쳤을 만큼.”
“폐하!”
“결국, 신의 노여움을 사 멀쩡하던 달이 사라졌다.”
친위대장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달이 사라진다니, 황제가 허투루 말했을 리는 없으니 또다시 달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지난 이년의 시간을 떠올리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달이…….”
“사라질 것이다. 테르델이 그렇게 만들겠지.”
“하지만 그는 아직 대공 성에 있습니다.”
“아니, 그는 이곳에 있다. 얼마 전에 황후를 만나고 간 참이지.”
갈수록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친위대장이 기함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는 언제고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그러니 추적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또한 이상한 힘을 부리니, 문을 걸어 잠가도 아이를 납치해갈 수 있다.”
“……그럼 어떡합니까.”
“죽여야지.”
친위기사가 눈을 홉떴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이미 한 번 죽었던 자다.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밟아주어야지.”
그의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하지만 친위대장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황제의 뜻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제의 위신이 추락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황후와의 오해도 더욱 깊어질 게 분명했다.
친위대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못 하겠습니다.”
아르베우타가 쓴웃음을 흘렸다. 딱히 훌륭한 주군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리 충심을 지키려 드니 곤란할 따름이었다.
그는 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나?”
“그건…….”
“황후가 소문을 듣기 전에 처리해야 해. 그녀의 귀에 들어가면 위험이 커진다. 만약 황후를 잃게 되어 제국이 멸망하면 네가 책임질 텐가?”
“어불성설입니다. 소문을 듣게 된다고 황후 폐하를 잃게 된다는 법이 어딨습니까.”
“그것을 위해 삼백 년을 벼른 녀석이다. 위험을 최소화해야지.”
친위대장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전부터 그랬다.
아주 오래전부터 황제는 황후만 관련되면 이성을 잃곤 했다. 지금처럼.
친위대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세실레를 지키는 게 먼저야. 반문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
단호한 목소리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친위대장의 낭패한 표정에 아르베우타가 옅게 웃었다.
“걱정이 너무 많군.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럴 줄 알고.”
“하지만 위험이 너무 큽니다!”
성토하는 목소리에 아르베우타가 나직이 뒷말을 덧붙였다.
“황후궁에 있는 호숫물을 떠, 강가에 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