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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는 그들이 약을 구하지 못해 발버둥 치는 틈을 타, 전부 쳐낼 예정이었다.
드디어 발버둥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움직임이 수상했다.
“알현 요청이라.”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타리베르 대공은 저택에 있나?”
“파악 불가입니다. 저택의 하인들조차 대공의 얼굴을 본 사람이 드물다더군요.”
“더더욱 수상하군.”
아르베우타는 생각에 잠겼다.
‘……황후에게 접근하려는 이유가 뭐지?’
세실레의 안전과 직결된 일이었다. 실낱같은 위험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멀찍이서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닥에 들러붙은 오물처럼 끈적거리고 불쾌한 느낌이었다.
‘설마.’
그 순간 내내 잊고 있던 이가 떠올랐다. 세실레가 처단했던 남자, 그러나 죽지 않아 북부 깊은 곳에 봉인했던 이가 한 명 있었다.
어떻게 잊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런데도 기억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기억에서 지워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억이 났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러는 중에도 끈적한 기운은 황후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르베우타가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물었다.
“테레사는 황후궁에 있나?”
“황후 폐하의 명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것으로 압니다.”
“……쓸모없기는.”
아르베우타는 뒤를 지키고 선 친위대장을 향해 명했다.
“그대는 앞으로 황도에 도는 소문을 모두 수집해. 황후나 황궁에 관련된 비방을 하는 자들을 잘 살피도록.”
친위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아르베우타는 곧장 황후궁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가볍게 이는 바람에 돌아다니던 시종조차 누가 지나쳤는지 모를 정도였다.
***
세실레는 몸을 늘어뜨린 채 쉬고 있었다. 가벼운 졸음이 밀려들었다.
시녀들은 방의 촛불을 끄곤 커튼을 쳤다. 조용한 침실에서 세실레는 허공을 응시했다.
‘힘이 날뛴다.’
어느 순간부터 낮에도 은빛의 힘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밤과는 달리, 낮에는 힘을 컨트롤하기 힘들었다.
세실레가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제야 멋대로 떠돌던 힘이 얌전히 세실레의 왼손등으로 흡수되었다.
‘도통 이상한 일 천지로군.’
나지막한 한숨이 흐를 무렵, 뒤에서 선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실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도르데아가 여상한 얼굴로 서 있었다.
“폐하? 죄송합니다. 놀라셨군요.”
“……어쩐 일이지?”
“피곤해 보이시기에 차를 가져왔습니다.”
노쇠한 얼굴이 온화하게 웃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같았다.
‘이능을 신경 쓰느라 듣지 못했나.’
세실레는 주의 깊게 도르데아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제야 세실레의 입에서 옅은 숨이 흘렀다.
‘너무 예민한 모양이야.’
근래 황제며 쟈르스, 그 외의 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적어도 황후궁의 시녀들이 세실레에게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다.
‘사서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세실레는 불안을 애써 털어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향긋한 캐모마일 티였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좋다며, 도르데아가 종종 가져다주고는 했던 것이다.
세실레는 무심코 차향을 음미했다. 향긋한 향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찻물을 들이켰다.
쨍그랑-!
그 순간, 그녀의 온몸이 은빛의 기운으로 뒤덮였다.
쏴아아.
폭포수 같은 힘이 그녀를 덮쳤다. 의아해하던 세실레는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에 독이 들었던 것이다.
세실레가 놀란 눈으로 도르데아를 응시했다. 그러자 도르데아가 가느다란 손을 뻗어 세실레의 뺨을 훑었다.
“이런, 벌써 이렇게 강해지셨을 줄이야.”
침착하던 목소리에 차차 웃음기가 배어들었다. 세실레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누구지?”
“아아,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폐하, 저는 타리베르 가의 테르델이라고 합니다.”
“……테르델 대공?”
세실레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조금 전 도르데아에게 물어본 이의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테르델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눈짓했다.
“절 기억해주시는군요.”
“아니, 처음 본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기억해주십시오.”
세실레는 침묵했다. 세실레가 매서운 눈으로 테르델을 훑었다. 그러자 테르델이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다.
“테르델입니다. 친애하는 황후 폐하 부디 델이라고 불러주세요.”
세실레는 침착하게 그를 바라봤다. 아직 낮이었지만, 이능을 부린다면 어찌어찌 처치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모습을 바꿨지.’
테르델에게도 무슨 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라면, 세실레는 그가 무슨 힘을 부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되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용건이 뭐지?”
“용건이라……. 글쎄요. 폐하의 존안을 뵐 겸,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말해도 좋다.”
테르델이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 황제를 믿지 마세요. 그는 신을 저주하며 당신을 나락으로 이끌 자입니다. 최근에도 이상한 경험을 하셨죠? 황제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거나, 괜히 마음이 가는 등의.”
세실레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남자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힘을 준비했다.
낮이라, 이능을 부리는 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러니 되도록 커다란 힘을 써 순식간에 제압할 생각이었다.
때마침 힘이 가득 모였다.
‘지금이다.’
순식간에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일었다. 하지만 테르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졌어?”
세실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테르델이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당황한 눈동자가 사위를 훑었다. 하지만 테르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주춤거리는 사이 복도에서 소란이 일더니 돌연 문이 벌컥 열렸다.
아르베우타였다. 그는 성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것과는 달리, 조심스레 침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괜찮은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금 가슴이 설렜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헤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저번보다도 강력한 감정의 파동이었다.
세실레는 지끈거리는 가슴을 움켜쥔 채 아르베우타를 노려보았다. 불현듯 테르델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현 황제를 믿지 마세요. 그는 신을 저주하며 당신을 나락으로 이끌 자입니다. 최근에도 이상한 경험을 하셨죠? 황제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거나, 괜히 마음이 가는 등의.’
그가 어떻게 세실레의 마음을 알아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러한 감정의 파동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세실레는 허락도 없이 침실에 들어선 아르베우타를 보며 말했다.
“무례하시군요.”
“침입자의 기척을 느껴서 와봤을 뿐이야.”
“침입자가 온 건 어떻게 아셨죠? 하필이면 테레사가 자리를 비웠을 때 찾아오다니, ……당신이 보낸 건 아닌가요?”
그럴듯하게 이어지는 생각에 세실레의 낯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흐린 웃음을 지었다. 흔들리는 붉은 색 눈동자가 유독 두드러졌다.
세실레는 어쩐지 미안해져 입을 다물었다.
미안한 정도가 아니었다. 가슴이 아렸다. 조금 전 한 말은 그저 실수였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손끝에 곱슬곱슬한 검갈색 머리칼이 얽히면 그도 마음을 풀고 다시금 웃어주겠지. 그때처럼.
‘그때?’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가 숨을 들이켰다. 테르델의 말대로였다.
무언가 이상한 기억이, 감정이 자꾸만 그녀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아르베우타와 절절한 연인 사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말도 안 돼.’
세실레는 맹세코 아르베우타와 그런 사이였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서,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도리어 그 또한 한 발 뒤로 물러서, 침실 밖으로 물러설 뿐이었다.
“경계하지 않아도 돼. 무사하다니 다행이야.”
“……그럼 이만 가세요.”
세실레가 입술을 짓씹었다. 별거 아닌 말을 하는 데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지 마. 날 붙잡아 줘.’
이성과는 달리 본능은 그에게 다가가 안기고 싶다고 호소했다. 저렇듯 물러서지 말고 자신을 품 안 가득 힘주어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대신 당부 하나만 하지. 앞으로 테레사를 곁에서 떼어놓지 마. 위험하니까.”
“…….”
“모든 알현 요청을 거절하고 밤 산책도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군. 답답하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세실레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테르델 대공 때문인가요?”
“……맞아. 테르델 대공 때문이지. 이유는 말해줄 수 없지만, 그는 위험한 자야. 경계하는 편이 좋아.”
세실레의 속눈썹이 힘없이 떨렸다. 도대체 무얼 어쩌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피로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솔직히 말해줘요.”
“무엇이든.”
“디젤라는 왜 가둬 놓은 거죠? 아니, 당신 꿍꿍이가 뭐예요?”
아르베우타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네가 달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 전 루베르가 한 말과 비슷했다. 세실레는 놀란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부연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러니 얼마든지 날 미워해도 좋아.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이 땅에 남기만 하면 그걸로 족해.”
이윽고 아르베우타가 몸을 돌렸다. 세실레는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을 난도질한 것처럼 아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격통에 혼란이 일었다.
세실레는 잘게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막 조사를 마치고 들어온 테레사가 목격했다. 그녀는 굳은 낯을 겨우 풀고는 안으로 들어와 세실레를 일으켜 세웠다.
테레사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