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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8화 (5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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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라는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단지, 너무 가슴이 뛰어서 문제였다.

하지만 쟈르스는 더욱 디젤라의 곁으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아침에 황제 폐하를 뵙고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으응, 그냥……도와준다고.”

“도와줘요?”

“응.”

쟈르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황제는 선뜻 누군갈 도와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무런 득도 되지 않을 디젤라를.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황제가 움직이는 데에는 대부분 황후 폐하가 연관되어 있었다. 쟈르스가 고민에 잠긴 사이, 디젤라가 말을 이었다.

“아마, 내가 아팠던 일 때문인 것 같아.”

“아팠던 일? 얼마 전 방에만 계시던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본인도 겪었던 일이라고 했으니까…….”

디젤라는 말꼬리를 늘였다. 황제와 독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털어놔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쟈르스의 옆에 있으면 어떤 말이건 하게 되었다. 오히려 비밀을 만드는 게 죄처럼 느껴졌다.

‘이제 어쩐담.’

디젤라가 불안한 표정으로 쟈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쟈르스가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황제의 사람이니까요.”

“……언니 편인 거 아니었어?”

“황제 폐하의 편이 황후 폐하의 편이지요.”

그럴듯한 말에 디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쟈르스는 고개를 주억이는 디젤라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 말은 전하셨나요.”

“아……, 전하긴 했는데 바로 나와버려서.”

“상관없습니다.”

쟈르스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디젤라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쟈르스는 디젤라의 달아오른 뺨을 가볍게 훑으며 속삭였다.

“다시 황제 폐하를 알현할 일이 생기면 물어봐 주십시오. 그녀도 당신과 같은 부류냐고.”

그녀, 란 단어에 디젤라가 눈을 치켜떴다. 뾰족하게 올라간 눈매를 눈으로 훑던 쟈르스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공적인 질문이에요.”

그제야 디젤라가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알겠어.”

대답하면서도 디젤라는 뾰로통하게 생각했다.

‘언니가 쟈르스를 의심하는 이유를 알겠어.’

그는 모든 게 물 흐르듯 유려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모든 게 그가 바라는 대로 되어있었다.

마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디젤라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제 머리는 괜찮습니까?”

……그가 이마에 손을 얹기 전까지는.

디젤라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세실레는 알현을 청하는 이들의 목록을 훑었다. 모든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지만, 확인은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요청한 이의 숫자가 늘었군.’

대다수는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이었다. 지방에 거하는 귀족이 수도까지 올라오는 일은 드물었다.

건국제 정도 되는 큰 행사를 앞두었을 때나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목록을 훑던 세실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 중 대다수가 황태후 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왜?’

고민하던 세실레가 테레사를 불렀다.

“테레사. 황태후는 여전히 유폐 중인가?”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테레사의 보고를 듣고 나니 더욱 의아해졌다.

‘어쩌면 이들을 모을 구심점이 나타났는지도 몰라.’

세실레는 가능성 있는 인물을 추려봤다. 하지만 제각각인 귀족들을 모을 정도의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간 황태후가 권력을 독식해온 탓이었다.

‘타리베르 대공이라면 몰라도.’

대공은 황태후의 아버지로 권력을 등에 업은 이였다. 어찌나 오래 살았는지 아들을 먼저 무덤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대공마저도 이 년간의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손자가 대공 위를 물려받았다고.

세실레는 이번엔 도르데아를 불러 물었다.

“현 타리베르 대공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테르델 대공 말입니까. 막 성인식을 치렀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래? 그자는 어때 보였어?”

도르데아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데뷔조차 하지 않아서요. 저도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군.”

세실레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테르델 대공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뇌리에 남았다.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테르델 대공.’

어쩌면 그가 흩어진 황태후 파를 응집할 구심점이 되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실레는 테레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테레사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세실레는 테레사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시녀들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내가 표시한 이들의 뒤를 쫓아. 혹시 그들 중 스무 살 안팎의 남자가 있는지도 살펴보고.”

테레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그녀도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것 같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저도 그렇습니다.”

“너만 믿을게.”

세실레는 조심스레 테레사의 어깨를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적한 거리에 허름한 마차 하나가 멈춰 섰다.

마차는 아무런 문양이 없어 허전했다. 군데군데 흠집이 있어 낡아 보이기까지 했다.

평범한 마차였다. 마부도 없이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도착했군.”

테르델은 마차에서 내려섰다. 오랜만에 수도에 발을 디뎠다.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지만, 황궁만큼은 여전했다.

세실레의 등장과 동시에 지상에 세워진 성이었다.

증축해서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중앙에 우뚝 선 황성을 바라보던 테르델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성 위로 은빛의 기운과 검붉은 색 기운이 한 데 엉켜 팽팽하게 맞붙고 있었다. 게다가 구석엔 막 각성하려는 붉은 기운이 하나 더 있었다.

“조력자를 찾은 모양이군, 아르베우타.”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테르델은 뒷말을 마저 삼키며 웃었다. 그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을 맴돌던 매 한 마리가 그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테르델은 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지금부터 작전에 돌입한다.”

매가 눈동자를 빛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매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테르델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때마침 지척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테르델은 조심스레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곁눈으로 맞은편 골목을 지나치는 테레사를 훑었다. 그녀는 테르델을 발견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성공적이군.’

테르델이 손을 쥐었다 폈다. 힘이 성공적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으슥한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엔 미리 마중을 나온 이가 숨어 있었다.

“북부의 왕을 뵙습니다.”

정중한 인사말에 테르델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새까만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기괴한 광경에 마중 나온 귀족이 겁에 질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테르델은 개의치 않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겁먹지 말아라. 나는 너희들을 배불리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

“사냥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래. 너희를 위한 약을 만들어야지.”

한낱 인간에 불과한 경비들로는 테르델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수도는 피로 물들 테고 모든 비난은 황후를 향할 터였다.

“달은 먹구름으로 가리면 그만이지.”

“따르겠습니다.”

“그래. 너희는 계획대로만 해.”

테르델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금 황궁을 바라보았다.

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저곳에 그토록 갈망하던 세실레가 있었다.

‘당신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군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아득바득,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이기면서.

‘살려두면 큰일을 저지르겠어요. 그러니 날 원망하지 말고 평온히 잠들기를.’

테르델이 주먹을 쥐었다. 도드라진 손뼈가 희게 질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선명한 목소리였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그 순간 테르델의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였다.

테르델은 충동적으로 걸음을 뗐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높게 머리를 올려 묶고 깐깐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여인으로 바뀌었다.

도르데아의 모습이었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머물렀다.

“도착했으니, 인사를 하러 가야지.”

***

아르베우타는 막 수도를 훑고 돌아왔다.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하지만 수도는 여전히 깨끗하고 안전했다. 전보다 치안이 좋아졌다며 칭송하는 목소리로 가득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뭐지?’

무언가 수상했다. 고민하는 그에게로 시종이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훑은 아르베우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후에게 알현을 요청한 이들의 목록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보다시피 황태후 파가,”

“그건 나도 알아.”

비서관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갑자기 황태후 파가 수도에 몰려들더니 황후에게 알현을 청한다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징조였다. 그는 손을 휘저어 비서관과 시종을 모두 내보냈다.

그런 다음 은밀하게 자리해 있던 친위대장을 향해 말했다.

“저번에 조사하라던 건은 어떻게 됐지?”

“타리베르 가문은 잠잠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타리베르 가를 오고 간 귀족들이 제법 되는 모양입니다.”

“그들과 알현 명단이 얼마나 일치하지?”

“거의 일치합니다.”

“역시 그렇군.”

아르베우타가 침음을 삼켰다. 영아 납치가 만연하기에 경비의 수를 늘려 보안을 철저히 했다.

그렇다고 해서 후유증에 시달리는 귀족들이 순순히 물러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물도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발악하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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