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엄마. 이거 머거요.”
“그래.”
세실레는 순순히 고기를 받아먹었다. 우물거리는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던 루베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곧 알려 주께요.”
“응?”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비밀과 관련된 말인 듯했다. 세실레는 무어라 말을 보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루베르와 식사를 마친 이후, 세실레는 외출을 준비했다. 그러자 뒤에서 지키고 있던 테레사가 다가왔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나 혼자 가도 돼.”
“하지만 위험합니다. 저번 일도 그렇고…….”
“괜찮아.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을 테니까.”
테레사가 느리게 숨을 뱉었다. 세실레의 의지가 확고함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일찍 돌아오셔야 합니다.”
“걱정도.”
세실레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웃고는 주저 없이 걸음을 뗐다.
순식간에 은빛이 화하더니, 세실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는 어느새 거리의 인파에 섞여들었다.
단서를 찾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움직일 참이었다.
***
투박한 돌을 겹겹이 쌓아 만든 돌벽에서 한기가 흘렀다.
삭막하기만 한 홀 위로 얼음처럼 날카로운 크리스털이 달린 샹들리에가 불을 밝혔다.
한여름에도 스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성은 어둡고 침침했다.
게다가 창문 하나 없이 돌벽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홀은 꼭 성이 아니라, 돌무덤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곳은 북부의 널따란 대공령에 위치한 타리베르 성이었다. 또한 현 황태후를 배출한 명망 높은 가문이기도 했다.
타리베르 가문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명망가면서, 지난 이 년간 막대한 피해를 입은 가문이기도 했다.
노쇠한 대공이 지난한 이 년의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고 가문의 권력 줄을 잡고 있던 황태후 또한 사실상 유폐되어 기능이 마비된 탓이었다.
나머지 친척들도 사정은 별다를 것이 없어, 결국 대공 위는 겨우 성인식을 마친 테르델에게로 돌아왔다.
테르델은 세간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혹자는 그가 불구가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였다.
데뷔는커녕 어느 연회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곳에 초청받은 귀족들은 테르델을 마주하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투박한 대공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자주색 머리카락이 등을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왔다.
굵직한 손가락 하나하나에 끼고 있는 반지들은 여느 영애의 결혼반지라 봐도 좋을 정도로 화려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레이스가 달린 옷도, 제국의 남성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귀걸이도, 테르델 앞에선 빛을 잃었다.
그가 그 모든 장신구를 소화할 정도로 화려했기 때문이다.
남자답게 다부진 턱선은 매끄러웠고 우뚝 선 콧대는 새초롬히 올라간 눈과 잘 어울렸다.
기다란 속눈썹도 우아한 미성도 하나같이 테르델을 위한 것처럼 어울렸다.
대단한 미남자였다. 여태껏 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만큼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평생을 보낸 귀족들조차 입을 벌리고 감탄할 정도였다.
넋을 놓고 저를 응시하는 이들을 보며 테르델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모두 먼 길을 와주어 고맙군.”
막 어린 티가 가신 목소리에 좌중을 휘어잡을 정도의 위압감이 실렸다.
새로이 대공 위에 즉위한 테르델이 처음으로 여는 비공식 연회였다. 더불어 살아남은 친 황태후 파들의 앞길을 도모하는 자리기도 했다.
그제야 테르델의 외양에 사로잡혔던 이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곤 답했다.
“북부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북부의 왕, 의미심장한 호칭에 테르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테르델은 마치 황좌처럼 꾸며놓은 화려한 의자의 손잡이를 쥐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긴말하지 않지. 나는 수도로 갈 생각이다.”
뜬금없는 발표에 홀에 모인 귀족들이 안색을 굳혔다. 그들은 이번 비테르 후작과 관련하여 앞길을 도모할 겸, 새로운 대공을 맞이할 겸 모였다.
기실 앞날을 도모한다고는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친 황태후 파의 대부분이 현상 유지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후유증 때문이었다. 좀처럼 정신을 잡지 못하고들 있으니, 제대로 가문을 이끌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겨우겨우 약을 입에 밀어 넣으며 연명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테르델의 안색은 밝았다. 그는 화려한 장신구를 낀 손을 마주 잡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곤 어영부영하는 이들을 향해 속삭였다.
“어차피 너희는 아무 생각도 없잖아.”
“……그, 그게 무슨!”
불쾌한 언사에 한 귀족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는 테르델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감정 한 점 없는 차가운 눈에 몸이 얼어붙었다.
막 성인식을 치른 어린애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진중한 시선이었다. 덩달아 항의하려던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의.
순식간에 고요해진 홀을 훑던 테르델이 짓궂은 눈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약 수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이미 황도 근처는 황제의 친위대가 샅샅이 감시 중이지. 비테르 후작의 타살 건도 유야무야 처리됐다. 이게 무얼 뜻하는지 모를 머저리는 여기 없겠지.”
사방에서 침음이 흘렀다.
테르델의 말대로 갈수록 약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마저도 곧 걸릴 게 분명했다. 황제가 여기저기 들쑤시며 수사를 멈추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 듯한 고통에 시달린다. 살기 위해서라면 갓난애로 만든 약이 필요했다.
그들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는 테르델의 눈에 즐거운 기색이 어렸다.
그는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
꿈결 같은 목소리에 모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눈동자엔 생기라곤 전혀 없었다.
마치 영혼을 빼앗긴 인형 같았다. 테르델은 좌중을 둘러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버러지 같은 것들.”
이미 사람이 아닌 주제에 살기 위해 발악하는 것들이었다.
죽어도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악령이 되어 살아생전 겪은 고통을 되풀이하기 위해 혈안이 될 터였다.
어디에서도 반기지 않는 쓰레기였다. 그런 주제에 목숨을 연명해보겠다고 바르작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테르델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저 사악한 집념이 모여, 모두 그의 힘이 되어줄 예정이었다.
마지막 사람까지 눈에 담은 테르델이 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모두 채비를 마치고 수도로 오도록 해라.”
“네, 대공님.”
“나와 아름다운 황후 폐하를 맞이하러 가야지.”
드디어 때가 왔다. 고귀한 그녀를 맞이할 때가.
둥근 보름달이 뜨는 밤, 그와 함께 타락할 세실레를 떠올리던 테르델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나는 너를 미워할 수가 없어. 세실레.”
몇백 년을 미워하려고 해봤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녀를 원망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세실레도 함께 수렁에 발 담그게 할 생각이었다.
“날 지옥으로 밀어 넣을 땐, 같이 떨어질 각오를 했어야지.”
그날이 오면, 과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테르델은 스산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실레를 손에 넣는 날이 오면, 그땐 지상의 달이 지하로 고꾸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이 올라, 테르델은 몸을 떨었다.
***
아르베우타는 아침 일찍 들어온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최근 수도로 올라온 귀족 명단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부 친 황태후 파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쟈르스였다면, 이미 이들의 목적과 향방을 파악해 보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비서관은 뻔한 사실만 읊고 있었다.
‘쟈르스의 공백이 이렇게 클 줄이야.’
덕분에 일이 한참 밀렸다. 아르베우타는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들이 모였지? 황태후 파에게는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게다가 현재 황태후는 유폐 중이었다. 그곳에서 시들시들 말라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매일 근황도 보고 받고 있었다.
황태후는 지금 뒤에서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들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있던가.’
있었다. 단 한 명, 타리베르 전 대공이자 현 황태후의 아비.
하지만 그 또한 죽었다. 이 년간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손자가 뒤를 이었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테르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사교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무언가 하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있었다.
실제로 그 후에 타리베르 가문은 아무런 활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을 껐었는데.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
아르베우타는 비서관을 향해 말했다.
“타리베르 가문에 대해 조사해. 근처를 오고 간 귀족들 또한.”
“알겠습니다.”
“그리고 테르델 대공의 수도 출입을 한시적으로 불허한다.”
논란이 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비서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북부의 대공령에서 두문불출하던 테르델이 수도로 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
디젤라는 세렌디테에서 보낸 편지를 건네받았다. 편지 안에는 평이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구나. 말썽은 부리지 않고 있겠지. 어서 집으로 돌아오렴.
짤막한 편지를 읽은 디젤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왜 자꾸 집으로 돌아오라는 거야? 갇혀 있는 게 그렇게 좋나?”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쟈르스가 디젤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편지를 읽었다. 스스럼없는 행동에 디젤라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쟈르스는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이제 저택 출입이 자유롭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이렇게 잘 해줘도 되나? 황태후란 여자가 심상치 않다던데.”
“지금은 황태후 폐하께서 아프시니까요.”
“……정말 그걸로 끝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죠.”
디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유건 간에 더는 감금당하지 않아도 된다니 좋았다.
그보다 지금은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디젤라는 들고 있던 편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가깝게…….”
“내가 가까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부담스럽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