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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6화 (5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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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갑자기 네가 쟈르스를 그렇게 옹호한다니, 더 수상한걸. 이번 식사를 마치고 따로 면담 시간을 갖지, 쟈르스.”

“언니, 진짜 이럴 거야!”

“응, 이럴 거야.”

세실레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명령을 거둘 생각이 없다는 투였다.

단호한 모습에 디젤라가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언니가 언제부터 나를 신경 썼다고!”

세실레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이윽고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디젤라는 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쟈르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결에 일어선 쟈르스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디젤라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웃겨, 정말. 내 사생활이야. 간섭하지 마.”

디젤라는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 손에는 쟈르스의 팔을 꼭 쥔 채였다.

쟈르스가 상황을 수습할 여지조차 없었다. 끌려가던 쟈르스의 입가에 얼핏 웃음이 맺혔다.

‘제법 색다른데.’

항상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삶을 살다가, 이렇듯 자리를 피하니 희열이 느껴졌다.

게다가 쟈르스 또한 디젤라가 나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렇듯 괄괄한 여성을 이상형이라고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므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호감이 생겼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대단한 감정에 빠져든 건 아니었다.

그저 보고 있으면 재밌고, 자꾸 보고 싶은 느낌일 뿐.

‘원하는 대로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위해 준 적이 없었다.

가족은 항상 기대만 했고, 상관에게선 무리한 요구를, 후배들에게선 동정을 받았다.

그러던 중에 디젤라는 메말랐던 삶에 스며든 한줄기 흥밋거리였다.

쟈르스의 시선이 디젤라를 향했다. 그녀는 황후가 제 욕을 한 게 상당히 분했던지, 여전히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여자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쟈르스의 입가에 나른한 웃음이 맺혔다.

‘도움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겠지.’

쟈르스는 상체를 숙여 디젤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디젤라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쟈르스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쟈르스가 손을 뻗어 디젤라의 눈 밑을 가볍게 훑었다. 그러곤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디젤라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나, 난 그냥.”

“알아요. 큰 도움이 됐어요.”

쟈르스의 느른한 웃음에 디젤라의 눈망울이 크게 일렁였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운명의 사람을 만난 듯한 충만감에 디젤라는 덥석, 쟈르스에게 안겼다.

“나……당신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그건 좀 곤란…….”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요. 도망치면 쫓아가서 잡아 올 거니까.”

쟈르스가 몸을 굳혔다. 그럴수록 디젤라는 쟈르스의 몸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디젤라는 왠지 운명의 상대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 걸로 만들 거야.”

당돌한 대꾸에 쟈르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이런 식의 집착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디젤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해봐요, 어디 한 번.”

***

세실레는 멍하니 정원에 서 있었다. 얼어붙은 듯 있는 그녀를 향해 도르데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좀, 심했나?”

“그럴 리가요. 그저 연애를 시작하는 이들의 치기일 뿐이지요.”

“그런가.”

연애 따위, 해본 적 없어서 몰랐다. 게다가 쟈르스는 황명을 받고 디젤라를 가둔 전적도 있었다.

그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걱정해서 의심한 건데.’

세실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고뇌하는 그녀를 보며 도르데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부터 신경을 쓰실 것이지.’

도르데아가 심란해하는 사이, 루베르가 황후궁에 들어섰다.

그는 정원에 서 있는 세실레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엄마아!”

“아, 루베르.”

세실레가 무릎을 굽혀 루베르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루베르가 세실레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따스한 광경이었다. 그 둘이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만 제한다면.

하지만 세실레와 루베르는 개의치 않고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루베르. 그간 잘 지냈니.”

“응, 나 공부도 많이 해써요.”

“공부도 많이 했어? 대단하네.”

“응, 엄마한테 보여주려구 그림책도 만들었어요.”

루베르가 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여러 장을 꺼냈다. 종이엔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종이를 받아든 세실레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이거 다 우리 루베르가 그린 거야?”

“응, 열심히 했죠?”

“그래. 정말 열심히 했네.”

세실레는 루베르가 내민 종이를 펼쳐보았다. 대신관의 수업 중에 그렸는지, 종이엔 달과 신전 따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하나하나 훑던 세실레가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누구야?”

“이건 엄마!”

“그렇구나.”

“응, 봐바여.”

루베르가 순서대로 종이를 나열했다. 그러곤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달에서 내려온 엄마. 이건 황궁에서 우는 엄마. 이건 달로 돌아가는 엄마.”

“…….”

“엄마, 우리 가치 달로 가요.”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세실레를 응시했다. 하지만 세실레는 무어라 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어떻게 달로 가.”

“갠차나. 곧 문이 열릴 거야.”

“문?”

“응, 엄마를 달로 데려가려구.”

대신관이 한 말인가? 어쩌면 신화 속 내용일지도 몰랐다.

세실레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루베르의 눈동자는 반짝 빛났다. 그는 세실레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꼭 달로 가요.”

루베르가 조르듯 세실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무어라 대꾸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루베르가 정말 누구이든, 아직 정신 연령은 아이라고 했다.

게다가 루베르는 신관이니까, 이런 식의 상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별달리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세실레는 루베르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곤했는지 루베르가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시간이 생기자 머릿속이 다시금 아르베우타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지난번 아르베우타를 봤을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자꾸만 가슴이 설렜다.

세실레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가슴께에 무언가 얹힌 듯 답답했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중에 도르데아가 다가와 말했다.

“폐하, 세렌디테 가문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

“네. 디젤라 양이 보낸 편지의 답신 같습니다.”

세실레는 손을 내저었다. 디젤라의 편지에 대한 답이라니 읽을 순 없었다.

“디젤라에게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디젤라 양을 아침에 목격한 사람을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그래?”

“네, 어찌할까요.”

“어쩔 수 없지. 그만 찾아봐도 좋아.”

“알겠습니다.”

세실레는 고민에 잠겼다. 디젤라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 자취를 감췄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디젤라를 보지 못했다는 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거나 비밀 통로를 이용했다는 뜻이었다.

현재 황궁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아르베우타.’

그렇다면 디젤라랑 아르베우타랑 만났다는 뜻인가. 그 사실을 디젤라가 숨겼다는 것이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의아했지만 물어본다고 알려줄 리 없었다. 고민하던 세실레가 고개를 내려 루베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내 잠들어 있었던 루베르가 느리게 눈을 떴다.

“엄마……?”

“응, 왜?”

“엄마. 나 배고파여.”

“그래? 그럼 같이 식사할까?”

“네.”

루베르가 세실레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세실레도 제대로 식사하지 못한 터라 조금 출출했다.

세실레가 시녀들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들이 먹을 것을 준비했다.

세실레는 가만히 앉아 루베르가 종알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 있자나여. 루베르는 당큰 조아요.”

“당근? 아이들은 안 좋아하는데.”

“웅, 왜냐면 루베르는 편식 안 하니까.”

세실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루베르의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칭찬을 바라는 태도에, 세실레는 루베르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어주었다.

“루베르 편식 안 해서 착하다.”

“착해여?”

“응. 그리고 디젤라에게 사과도 했지? 그것도 잘했어, 착하다.”

“웅, 루베르 차캐.”

루베르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입꼬리가 실쭉 올라갔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세실레가 상냥하게 루베르를 다독이며 물었다.

“루베르는 착하니까, 거짓말도 안 하지.”

“웅! 물론이에요.”

“그럼 우리 루베르, 엄마한테 솔직히 말해줄 수 있어?”

“움……하지만 비밀은 못 말해요.”

루베르가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어린 단호한 빛에 세실레가 엷게 웃었다.

한 번도 루베르의 정체에 대해 캐물은 적이 없었다. 질문하려 하면 먼저 말을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아이였다. 정체도, 신분도 불분명한 아이.

‘도대체 정체가 뭘까.’

세실레는 심란한 표정으로 루베르를 보았다. 그러자 루베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도 당큰 좋아해요?”

또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는구나. 세실레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래.”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는 사이, 시녀들이 음식을 준비해 내왔다.

상 가득 차려지는 음식을 바라보던 세실레가 식기를 들었다.

그러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루베르가 포크에 고기를 찍어 세실레의 앞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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