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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 요새 힘든 일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 디젤라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겁먹은 듯 보이는 디젤라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옅게 웃었다.
“귓가에서 누군가가 소곤대겠지. 이상하게도 쟈르스와 함께하면 들리지 않을 테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곧 전신에 마비가 올 테니까.”
줄줄이 이어지는 말에 디젤라가 입을 벌렸다. 당황한 그녀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희게 웃었다.
“도움이 필요한가?”
디젤라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람 피우는 사람을 어떻게 믿죠?”
“……바람?”
“그렇잖아요. 언니가 그래서…….”
디젤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무서운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언니한테 먼저 사과해요. 그 전엔, 절대로 당신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당돌한 목소리에 아르베우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이라니,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한참 틀렸다.
그는 절대로 세실레를 두고 다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설령 세실레가 그를 버린다고 해도. 그는 절대로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과하란 디젤라의 말이 영 틀리지는 않았다.
아르베우타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어쩐지 침울한 표정에 디젤라가 놀란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디젤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도 있을 때 잘해. 언제 떠나버릴지 모르니까.”
“무슨……. 아니, 그보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그래. 너라면 그럴 것 같군. 쟈르스와 보낸 시간은 좋았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디젤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르베우타는 개의치 않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기록을 디젤라에게로 내밀었다.
서류엔 아르베우타가 각성을 겪는 중에 일어난 일들이 적혀 있었다.
어디에도 공유한 적 없는 중요한 자료였다. 얼결에 기록을 전달받은 디젤라가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죠?”
“읽어보면 알 거야.”
의미심장한 말에 디젤라가 기록을 읽어내렸다. 거기엔 디젤라와 유사한 증상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 후의 일도.
‘정말 전신 마비가 온다고?’
다행히 그는 세실레의 도움으로 금방 벗어났다고 했다.
‘세실레? 언니 이름 아닌가?’
디젤라가 당황한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순순히 답했다.
“내가 세실레를 절대 배신할 수 없는 이유지.”
“…….”
“네게 쟈르스가 그렇듯이 말이야.”
디젤라는 무심결에 수긍했다. 디젤라는 결코 쟈르스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가 없을 때마다 느껴지는 서늘한 목소리가 무서워서라도.
‘그 이유뿐만은 아니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 언니가 황제를 멀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무어라 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힘을 피워 올렸다.
그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타올랐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이었다. 디젤라가 멍하니 구경하고 있으니 아르베우타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다. 저주는 끝났으니 각성만 하면 돼.”
매력적인 말이었다. 누군들 신비한 힘을 쓸 수 있다는 데 거절할까.
하지만 디젤라는 무려 황제씩이나 되는 인물이,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안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디젤라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네가 날 도와야 하니까.”
“도와요?”
“그래. 곧 세실레를 달로 데려가는 이들이 움직일 거야. 우리는 그 전에 세실레가 기억을 되찾게끔 해야 해.”
이해하기 힘든 말에 디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을 되찾아요? 언니 기억은 멀쩡해요. 게다가 달로 돌아간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기록을 잘 봐. 그건 삼백 년 전의 기록이다. 세실레는 신화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지. 나도 마찬가지고, 너도 마찬가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디젤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각성하고 나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거야. 중요한 건 세실레가 달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단 점이다.”
“……왜죠?”
“세실레가 그걸 원하니까.”
단호한 말에 디젤라가 눈썹을 치켜떴다. 언니가 원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도리어 언니는 힘들어 보였다.
‘다 황제 때문이지.’
그러니 그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언니를 보호하지 못한 게 누군데.’
디젤라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원망 가득한 눈초리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맺혔다.
그는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뗐다.
“강요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누구보다 확실한 조력자가 되어주지.”
“……싫다고 하면 쟈르스를 데려갈 생각은 아니죠?”
“인도적인 차원에서 쟈르스의 의사에 맡기겠다.”
“좋아요.”
디젤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록도 얻었겠다, 황제의 도움 없이도 각성할 수 있었다.
‘쟈르스만 사로잡으면 된단 말이지.’
디젤라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아르베우타를 향해 말했다.
“아, 맞다. 쟈르스가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말해도 좋다.”
“이 은혜는 제대로 갚아야 하실 거래요. 아시겠죠? 쟈르스 눈에 눈물 나면 당신 눈에도 눈물 날 줄 알아요.”
디젤라가 거칠게 문을 닫곤 방을 나섰다.
쾅!
요란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맺혔다.
***
세실레는 디젤라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다시 디젤라의 침실을 찾았다.
하지만 디젤라는 침실에 없었다. 황후궁의 시녀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들 또한 디젤라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능을 펼치기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세실레가 고민하는 무렵, 정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쟈르스가 보였다.
그녀는 곧장 정원으로 내려가 쟈르스에게 다가갔다.
뒤늦게 그녀를 발견한 쟈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어. 디젤라는?”
“디젤라 님은…….”
쟈르스는 말을 아꼈다. 황제가 디젤라를 데려간 건 비밀이었다.
그러나 쟈르스가 시간을 끌수록 세실레의 의심도 커져만 갔다. 그녀는 쟈르스를 응시하며 다시금 물었다.
“또다시 감옥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잠시 자리를 비운 걸 황후궁의 시녀들이 모를 리 없었다.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릴 무렵,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언니, 여긴 어쩐 일이야?”
세실레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디젤라가 서 있었다.
그것도 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얼굴에, 침의를 차려입은 채로.
그녀는 스스럼없이 쟈르스가 앉아 있는 원형 탁자에 가서 앉은 다음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식사 좀 준비해 줘. 오늘은 밖에서 아침을 먹고 싶네.”
세실레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디젤라를 봤다. 하지만 디젤라는 개의치 않고 세실레를 향해 물었다.
“언니도 같이 먹을래?”
“……그래.”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세실레는 곧장 자리에 앉았다.
자매 사이에 끼게 된 쟈르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이 흘러나왔다.
***
세실레는 차분히 디젤라와 쟈르스의 관계를 살폈다. 하지만 둘은 어젯밤 붙어서 자던 건 없던 일이라는 듯 식사에 집중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세실레가 먼저 입을 뗐다.
“디젤라, 이제 몸은 좀 괜찮아?”
“응,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네.”
세실레는 디젤라의 뒤에 서린 어두운 기운을 살폈다. 기운은 디젤라의 등 뒤를 느리게 맴돌고 있었지만 달라붙지는 않았다.
디젤라의 눈동자도 맑았고, 말하는 목소리도 명료했다. 그제야 세실레는 나지막이 한숨을 뱉었다.
‘쟈르스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사람으로 치료가 된다는 게 의아했지만, 효과를 보았으니 되었다. 세실레는 쟈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내 동생을 잘 보필하였고?”
“물론입니다, 폐하.”
“그래, 그런 것 같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군.”
쟈르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그저 곁을 지켜드렸을 뿐입니다.”
“……둘이 함께 침실에서 나왔다는 걸 보니, 충실히 명을 따른 듯하더군.”
쟈르스가 숨을 들이켰다. 달걀을 포크로 쪼개던 디젤라도 손에서 포크를 놓쳤다.
당황한 듯 보이는 둘을 보며 세실레가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의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어. 그저 내 동생이 사기꾼에게 놀아나진 않을까 해서…….”
“언니!”
그 순간 디젤라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언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는 네가 걱정되었을 뿐이야.”
“아니, 나는 쟈르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런데 언니가 날 도와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난 뭐가 돼?”
세실레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디젤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격양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언니가 쟈르스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느냔 말이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제야 디젤라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흥분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디젤라 또한 쟈르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언니가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화가 났다.
‘왜지.’
하지만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번 일로 언니가 쟈르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디젤라가 일부러 불퉁한 시선으로 세실레를 쳐다봤다.
그제야 내내 침묵하던 세실레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빛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났다.
“아니, 디젤라. 난 걱정을 해야겠어. 네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를 너무 믿는 것부터가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