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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4화 (5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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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십니까.”

“그래.”

세실레는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꾹꾹 눌러 말렸다. 언뜻 보기엔 정말로 물놀이를 나온 황후가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테레사는 세실레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뭔가 수상한데.’

세실레는 꼭 무언갈 숨기는 것처럼 보였다. 선연한 시선을 눈치챈 세실레가 고개를 돌려 테레사를 응시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디젤라는 언제부터 쟈르스와 저런 사이가 된 거야?”

“네? 아, 쟈르스 님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냐.”

세실레가 다시 고개를 돌려 호수를 응시했다. 젖은 속눈썹 아래로 상념에 잠긴 청안이 일렁였다.

‘테레사는 모르는 모양이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세실레는 고개를 주억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일어나면 물어보자.’

세실레는 다시금 침실로 돌아갔다. 그러자 서둘러 달려온 시녀들이 세실레를 침의로 갈아입혔다.

마침내 침대에 누운 세실레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

하늘 높이 태양이 떠올랐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 아르베우타는 집무실에 앉아 시종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시종은 어제 황후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달하다, 막 떠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새벽에 황후께서…….”

“야유를 나갔다던가?”

“나가시기도 하셨고 또…….”

묘하게 말꼬리를 빼는 모습이 의아했다.

인내심이 바닥 난 아르베우타가 짜증스레 눈썹을 치켜뜨고서야 시종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호수에서 수영하셨다고 합니다.”

“수영?”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게, 저……침실에서 몸을 던지셨다고.”

황당한 이야기에 아르베우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실레가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디젤라의 일이 충격이었거나 아니면,’

이윽고 떠오른 생각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도서관에서의 일을 잊을 수 없었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추세가 확실히 빨랐다. 아르베우타는 시종을 보며 다시금 물었다.

“낮에도 이능을 사용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석양이 지기 전에도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 돌아가 봐.”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물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희열이 어렸다.

“정말 금방이군.”

균열이 생기기까지 수백 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균열이 생기고 나니,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하는 행동을 보아선 테레사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그들이 어영부영할 때에 먼저 우위를 점해야 했다.

‘그러려면 우선, 디젤라를 섭외해야겠지.’

디젤라는 자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디젤라가 가진 고민을 유일하게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각성자, 다른 말로는 꿈에서 깬 자.

그는 디젤라가 겪는 일을 미리 겪어본,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너도 날 도와야겠어.’

디젤라는 아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가 쥐고 있었으니까.

아르베우타는 손을 들어 자리를 지키던 시종에게 말을 전했다.

“가서 디젤라를 데려와.”

“알겠습니다.”

아르베우타가 눈을 빛냈다.

‘이번엔 절대 놓칠 수 없지.’

***

디젤라는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푹 잔 덕에 정신이 맑았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몸이 무거웠다.

‘뭐지.’

잘 살펴보니, 누군가가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디젤라는 손을 올려 제 몸 위에 얹힌 팔을 더듬었다.

쟈르스였다. 얇은 팔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운동 좀 했나 본데.’

디젤라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아침부터 주책이지.’

디젤라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허리를 잡아끄는 힘에 매트리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어?”

풀썩, 디젤라의 머리가 다시금 베개에 닿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디젤라의 시야에 미간을 찌푸린 채 잠든 쟈르스가 보였다.

매번 안경에 가려졌던 눈매가 날카로웠다.

오뚝 선 콧대도 얇은 입술선도 꺼칠한 피부도. 디젤라는 무심코 쟈르스를 훑어보다 꿀꺽 침을 삼켰다.

‘잘생겼네.’

디젤라는 무심코 손을 들어, 쟈르스의 미간을 꾹 눌렀다. 그러자 쟈르스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으…….”

흐릿한 회색 눈동자에 졸음이 덕지덕지 묻었다. 짜증스레 다물린 입술은 조금 더 건드리면 온갖 욕설을 뱉어낼 기세였다.

하지만 디젤라는 쟈르스의 미간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정확히는 손을 대고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너무 잘생겨서.

‘말도 안 돼.’

쟈르스는 절대 디젤라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잠에서 막 깬 쟈르스는 몹시 남성적이고 매력적이었다.

디젤라는 멍한 눈으로 쟈르스를 응시했다. 그러자 쟈르스가 거칠게 디젤라의 손목을 잡아채며 중얼거렸다.

“손 떼.”

“응…….”

디젤라는 얌전히 쟈르스의 미간을 찌르던 손을 뗐다. 대신 그의 가슴에 가만 머리를 기댔다.

콩닥콩닥, 기분 좋은 떨림이 이어졌다. 디젤라는 이 시간을 영영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

처음으로 맛본 따스함에 디젤라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그렇게나 잤는데 또 졸음이 몰려왔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똑똑.

똑똑-.

똑-.

노크는 정중했지만, 쉼 없이 울렸다. 이어지는 소음에 결국 쟈르스가 몸을 비틀며 일어났다.

“……누구야.”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그는 짜증스레 침대를 벗어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다 눈앞에 있는 시녀를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나지막한 물음이 흘렀다.

“……황궁?”

“…….”

“……어째서?”

쟈르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침대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쟈르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캐노피가 드리운 침대 위론 이불 더미 하나가 불쑥 솟았다. 게다가 아래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이곳은 디젤라의 침실이었다. 더불어 그는 디젤라와 함께 잤다.

말 그대로 담백하게 밤을 보낸 것뿐이지만, 여러 의미로 지난밤 두 사람은 제법 뜨거웠다.

‘……그랬었지.’

생각을 마친 쟈르스가 고개를 돌려 시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죠?”

“황제 폐하께서 디젤라 양을 찾으십니다.”

시녀는 황후궁 소속이 아니라 황제궁 소속이었다.

‘황제가 디젤라에게 볼 일이 있다고 했지.’

이른 아침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은 시간대였다.

쟈르스는 걸음을 돌려 침대 가로 걸어갔다. 그러곤 이불 속에 꼭꼭 숨어 있는 디젤라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숨으십니까?”

“……그게.”

“제가 부끄러우신 건 아니겠죠.”

“아, 아니야!”

디젤라가 이불을 걷어 젖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더웠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쟈르스는 손을 뻗어 디젤라의 이마를 훑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나가며 땀방울을 닦았다. 덩달아 디젤라의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어쩜 좋아.’

쟈르스와 함께 있으면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이 떠올라 더욱 부끄러웠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어젯밤의 부작용인지 지금은 쟈르스의 손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떨렸다.

움찔거리는 디젤라를 쟈르스가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는 엉망이 된 디젤라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귀엽기는.”

디젤라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쟈르스는 공사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입혀주며 말했다.

“지금 황제 폐하를 뵈러 가야 한답니다.”

“……왜?”

“그야 저도 모르죠. 대신, 황제 폐하를 뵈면, 제 말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으, 응.”

“이 은혜는 제대로 갚아야 하실 거라고.”

디젤라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있다간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디젤라가 성급히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쟈르스가 한숨을 내쉬며 디젤라의 머리 위로 커다란 모포를 덮어주었다.

***

디젤라는 설레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복도를 걸었다.

시녀는 그녀를 비밀 통로로 이끌었다.

그러나 디젤라는 화려한 황후궁의 복도를 지나, 은밀하게 자리한 통로를 지나면서도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그런 남자에게.’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가슴이 설렜다.

어째서 황제가 자신을 불렀는지, 왜 이렇듯 은밀한 통로로 이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들지 않았다.

그저 쟈르스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문 앞이었다.

디젤라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디젤라 양께서 오셨습니다.”

“들라고 해.”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간 디젤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또 만나서 반갑군.”

황제와의 독대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디젤라가 침을 삼켰다.

언니를 옆에 두고 만나는 것과 독대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괜히 황제란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는 듯이,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듯한 위압감을 풍겼다.

디젤라가 입을 다물었다. 불안한 눈동자가 황제를 훑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저, 저를 왜…….”

디젤라의 긴장을 눈치챈 아르베우타가 사뭇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와서 앉지. 긴장할 것 없네.”

디젤라는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미리 준비해 놓은 찻잔을 디젤라 쪽으로 내밀었다.

친절한 태도에 공포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그제야 디젤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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