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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3화 (5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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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 있어요?”

“그야……디젤라 님께서 곁을 지키라 명하셨으니까요. 그보다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좋습니다.”

황후의 여동생이었다. 쟈르스는 괜한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았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디젤라가 냉큼 말을 놓았다.

“……내가?”

“네. 설마 기억 못 하시는 겁니까?”

“으응……기억 안 나는데, 거짓말이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대꾸하는 디젤라를 보며 쟈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푹 잠든 덕에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내내 곁을 지키느라 녹초가 된 쟈르스와는 딴판이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거면, 내가 왜 이 고생을.’

그간 하릴없이 보낸 시간이 아쉬웠지만, 쟈르스는 더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슬슬 쉬어야 했다.

그가 피곤이 누적되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쟈르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디젤라는 잘 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쟈르스가 멀어질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서늘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디젤라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쟈르스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쟈르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디젤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갑작스레 밀려든 공포에 몸을 떨면서 쟈르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냐. 가지 마. 계속 여기 있어.”

“……여기에요?”

“그래. 나랑 있어.”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매달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디젤라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윤기가 흐르던 피부가 차게 식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는 공황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또 문제가 생긴 건가.’

쟈르스가 심각한 낯으로 상체를 굽혀 디젤라의 턱을 잡아 올렸다.

“진정하시고 저를 좀 보십시오.”

“으, 응.”

디젤라는 더듬더듬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쟈르스를 바라봤다.

그와 맞닿고 나서야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공포에 질린 손은 동아줄 잡듯 쟈르스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디젤라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심상찮은 기색에 쟈르스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가서 의원을…….”

“안돼! 가지 마!”

“하지만,”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말라고!”

찢어질 듯한 음색에 쟈르스가 몸을 돌려 디젤라를 보았다. 그녀는 한겨울 강풍에 사시나무 흔들리듯 몸을 떨고 있었다.

당돌하던 첫인상과는 달리, 유독 마른 어깨가 가냘팠다.

잘 먹지 못했는지 아담한 체구와 유독 작은 손발도 눈에 띄었다.

‘하긴, 세렌디테에 조달되는 물품이 형편없긴 했지.’

쟈르스가 혀를 찼다.

그저 버릇없이 날뛰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체격에 비해 큰 목소리가 대단하다고도.

하지만 어릴 적, 잘 먹고 자라지 못해 이리 말랐을 거란 생각이 들자 동정심이 들었다.

쟈르스는 무심코 디젤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겁에 질렸던 숨소리가 한결 안정감을 되찾았다.

디젤라가 겁먹은 눈동자로 쟈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어미를 찾는 아기 새처럼 갈급하게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디젤라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흘렀다.

“이대로 있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쟈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두 팔을 뻗어 떨리는 디젤라의 등을 가만가만 다독였다.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조용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차분한 다독임에 다급하던 숨소리가 차차 잦아들었다. 디젤라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피로한 몸과는 달리 정신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찼다. 쟈르스를 향한 기이한 열망이었다.

어느새 디젤라의 눈에는 쟈르스가 상상 속 근육질 왕자님보다 잘생기게 보였다.

‘얼굴도 이만하면 됐고, 머리도 좋고. 그렇다면 한 번 사귀어볼까.’

디젤라는 한참이고 쟈르스를 응시하다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속해. 어디로도 가면 안 돼. 알지?”

“알겠습니다.”

순순한 약속의 말에 디젤라는 쟈르스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

“너 마음에 들어.”

당돌한 말에 쟈르스가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제 의사는 묻지 않습니까?”

“내가 널 구해줬잖아.”

“아아, 그랬죠. 하지만 당신, 제 취향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러나 디젤라는 화도 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쟈르스의 저러한 면모가 좋았다.

‘남자가 너무 쉬워도 재미없지.’

게다가 그는 언니의 명으로 제 옆에서 떨어지지도 못했다. 이때가 기회였다.

‘정복해주겠어.’

당찬 결심을 세운 디젤라가 침실의 중앙에 놓인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취향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래?”

당돌한 물음에 쟈르스가 뒤로 물러섰다. 감히 황후의 여동생을 건드리고도 멀쩡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디젤라는 주저하지 않고 쟈르스를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그러곤 침을 삼키느라 일렁이는 쟈르스의 목울대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삼 초 센다.”

“……네?”

“도망칠 시간, 딱 삼 초. 삼, 이, 일.”

디젤라는 들썩이는 쟈르스의 어깨를 침대 위로 눌렀다. 그러곤 말캉한 쟈르스의 귀를 가볍게 문 채로 속삭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한 디젤라의 눈동자는 쟈르스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녀를 가만 보고 있던 쟈르스가 눈을 감았다.

‘황후 폐하가 아시면 난 끝이다.’

그러나 도저히 이 유혹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 순간 본능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

세실레는 황후궁으로 들어섰다. 새벽인지라 궁을 지키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

드문드문 선 기사들이 작게 묵례했다. 그들을 지나친 세실레는 이능을 이용해 디젤라의 기척을 살폈다.

디젤라는 침실에 있었다. 쟈르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자는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둘이 붙어 있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야밤에 둘이 있다니.’

세실레는 디젤라의 침실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안쪽의 분위기가 묘했다. 세실레는 서둘러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나 수상쩍게 일렁이던 기운과는 달리, 침실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둡고 고요했다.

세실레는 천천히 캐노피가 처진 침대로 다가갔다.

반투명한 캐노피 아래로 두 남녀가 얽혀 있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편안하고 스스럼없는 자세였다.

‘이게 무슨.’

세실레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둘을 훑는 눈동자가 요란하게 떨렸다.

하지만 몇 번을 보아도 침대 위의 남녀는 쟈르스와 디젤라였다.

심지어 디젤라는 쟈르스의 등허리에 깍지를 낀 채, 쟈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다 큰 동생의 사생활을 목격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볼을 감싼 세실레는 도망치듯 침실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서둘러 제 침실로 돌아가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요란하게 뛰는 심장은 쉬이 진정하지 않았다. 온몸이 울리듯 쿵쿵 진동했다.

비단 디젤라와 쟈르스의 관계를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뜨거운 감각이 그녀의 내밀한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아르베우타를 덧그렸기 때문이다.

그가 강인한 팔로 저를 힘주어 안아 준 다음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

“그, 그만.”

세실레는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흘러내린 이불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우습게도 그것만으로도 묘한 상상이 떠올랐다.

마치 몇 번이고 경험이 있는 것처럼.

“미쳤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아르베우타와 제대로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

어째서 자꾸만 아르베우타 생각이 나는지, 또 그의 곁에 있으면 왜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전에도 그랬지.’

도서관에서 잠든 날, 세실레는 잠결에 아르베우타가 제 옆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서 그를 밀어내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져 묻고 싶건만,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머릿속은 아무려면 어떻냐며, 편안함에 기대어 안식을 취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아르베우타의 곁에서 편안함을 느낀 것이다. 떨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테레사가 저를 찾아온 것이 미워질 정도로.

‘아니야. 나는 그런 적 없어.’

세실레는 빠른 걸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테라스 문을 젖혔다.

미풍이 밀어닥치며 얇은 드레스가 하늘하늘 휘날렸다. 그러나 낮의 열기를 머금은 바람은 여전히 뜨거웠다.

더웠다. 온몸이 화끈거리고 간질거렸다. 기묘한 감각에 세실레는 오소소 몸을 떨었다.

그녀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실레의 푸른 눈동자 가득 깊은 호숫물이 들어왔다.

청아한 호수 표면이 잘게 일렁였다. 이 더위를 식혀줄 유일한 수단이었다.

잔물결을 응시하던 세실레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래로 몸을 던졌다.

풍덩-!

찬물이 온몸을 흠뻑 적셨다. 새까만 심연을 훑던 세실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그녀를 괴롭히던 감각이 잦아들었다.

***

새벽이라지만 몇몇 호위와 시녀는 잠들지 않았다. 따라서 세실레가 밤중에 입수했단 사실은 금세 여럿에게 퍼졌다.

“폐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테레사였다.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을 받아든 세실레는 물가에 걸터앉아 나직이 읊조렸다.

“너무 더워서…….”

“더우셨다니……그럼 이능을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테레사의 말대로였다. 덥다고 이 층 침실에서 뛰어내려 호숫가로 빠지는 황후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호숫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훨씬 정신이 맑아졌다.

세실레는 발끝으로 호숫물을 찰랑거리며 뻔뻔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물놀이를 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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