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침실로 돌아온 세실레는 카우치에 몸을 기댔다. 사위를 물린 탓에 침실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직도 어깨에 닿았던 온기가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평온함이었다.
고른 숨소리도, 단단한 몸도, 하나같이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듯 익숙했다.
잠결에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눈을 뜨기 싫을 정도로.
‘뭐지.’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왼손등에 떠오른 달 문양이 새하얗게 빛났다.
문양을 가만 내려다보던 세실레가 작게 읊조렸다.
“저번에도 그랬지.”
아르베우타에게 항의하려 그의 집무실을 찾았을 때도, 세실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묘한 감각이 그녀를 둘러싸,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의지와는 배반하는 몸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듯이.
“……그럴 리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에 세실레가 헛숨을 뱉었다. 그녀는 주먹을 힘주어 말아 쥐다가, 새까맣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 위로 새하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백색 달의 광채를 응시하던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달의 힘이 이전보다 강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빛을 노려보고 있으니,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회귀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무언가 잊고 있던 기억이.
“……헉!”
무심코 떠오른 잔상에 세실레는 숨을 들이켰다. 잠시간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었다.
대지를 뒤덮은 것은 사람의 피였다.
“피?”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몰랐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세실레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갑작스레 비테르 후작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세실레는 비테르 후작의 일이 있고 난 후, 잠시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아기를 빼앗겼던 남자의 말에 의하면 그런 짓을 하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남아있을 거야.’
그래서 갑자기 눈에 피가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결심을 내린 세실레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 채.
***
밖으로 나온 세실레는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거리는 사람으로 북적였고 곳곳에 근위병들이 배치됐다. 막 황궁에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정돈된 느낌이었다.
세실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영지로 돌아간 건가.’
세실레는 고민에 잠겼다.
후유증은 쉽게 낫지 않는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시달렸다. 게다가 고통도 상당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
그들은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도로 올라온 귀족 대부분은 그녀에게 알현 요청을 넣었다.
세실레는 쟈르스 이후로 알현을 거절 중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수단일 테니까.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쉬이 포기할 리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수도의 보안이 강화된 것으로 보아 황제가 조치한 걸 수도 있었다.
‘알아봐야겠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황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자꾸 그만 보면, 마음이 설렜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그에게 무어라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기 힘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증상이었다.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효용성은 검증되지 않았다지만, 연금술사들이 파는 사랑의 묘약을 먹였거나 저주를 걸었을지도 몰랐다.
‘이능으로도 감지되지 않는 교묘한 무언가를 했을지도.’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그만큼 아르베우타를 마주했을 때의 반응이 이상했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결국, 거리를 벗어나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디젤라와 관련해 물어볼 게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상태에 관해서도 상담이 필요했다.
대신관이라면 무언가 알지도 몰랐다.
***
달이 높게 떠오른 밤, 신전은 식을 올리느라 한창 분주했다.
신관들은 예배당에 모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입에선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기도문이 흘렀다.
예배당의 중심에 자리한 새하얀 석상이 달빛을 받아 고고하게 빛났다.
그들의 기도를 구경하고 있던 세실레는 벽에 몸을 기댔다.
신관들이 예배를 올리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비록 세실레가 성녀라지만, 허울뿐이었던 지라 이런 식의 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굉장하네.’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었지만, 기도문을 읊을 때마다 몸이 진동했다.
강하고 정순한 힘이었다. 세실레가 지닌 이능에서 느껴지는 힘과 비슷했다.
세실레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인데도 절로 신앙심이 솟았다.
조심스레 가슴 위로 손을 모은 세실레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어머니께 인사드립니다.]
무심코 흘러나온 목소리에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기도문을 읊던 신관들 또한 말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세실레의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나의 딸아.]
자애로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서 지독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그리운 누군가를 마주한 기분에 세실레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 순간, 몸을 감싸던 진동도, 고요도 모두 흐트러졌다.
그제야 세실레는 느릿하게 눈을 떠 허공을 훑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생생한 경험이었다.
더불어 지독한 갈증이 가슴 깊이 뿌리내렸다.
‘돌아가고 싶어.’
멍하니 생각하는 중에 루베르가 세실레에게 다가왔다.
“엄마.”
루베르는 세실레의 품에 폭 안겨선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울지 마라여.”
“……응, 울지 않아.”
“울지 않아도 대. 곧 돌아갈 수 있을 거여요.”
똘망똘망한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세실레는 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게 될까?”
“응, 그곳엔 아픔도 슬픔도 업서. 엄마랑 나랑, 좋은 사람들만 가득할 거예요.”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세실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곳에선 좋은 일만 가득하겠지.’
저 또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
세실레는 예배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루베르를 앉힌 채 대신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디젤라의 증상에 대해선 전해 들으셨지요?”
“네, 그렇습니다만……저희도 잘.”
“모르시는군요.”
“네, 기록에 없는 일입니다.”
대신관의 낯이 어두웠다. 기껏 성녀님이 찾아주셨는데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별달리 개의치 않았다.
“그렇군요.”
고서를 읽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견했다. 황궁의 도서관은 세렌디의 축복과 동시에 세워졌으니까.
‘그렇다는 건, 축복을 받기 전의 기록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
북부 어딘가에 그런 기록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정확히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실레는 잠시 침묵하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루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실레를 보았다.
“엄마, 어디 가세여?”
“디젤라가 괜찮은지 보러 가야겠어.”
“히잉, 그럼 나는?”
루베르가 세실레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자그마한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실렸다.
그를 잠시 응시하던 세실레가 무릎을 굽혀 루베르의 부드러운 은발을 조심스레 쓸어넘겨 주었다.
“내일, 황궁으로 놀러 와도 돼.”
“으웅.”
“이제 푹 자야지?”
“네에.”
루베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못마땅한 듯 퉁퉁한 볼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영 시무룩해 보이는 루베르를 몇 번이고 토닥인 세실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이면 깨었겠지.’
디젤라는 낮 내내 잠들어 있었다. 지난 이틀간 기력 소진이 심했을 테니, 당연했다.
그러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플 터였다.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어떻게 해도 정보를 찾을 수 없으니 디젤라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새까맣던 기운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다시 살필 겸.
세실레는 차분히 숲으로 발을 들였다.
***
디젤라는 막 잠에서 깨,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이틀 만에 겨우 취한 숙면이었다.
오랜만에 취한 휴식에 몸이 한결 가벼웠다.
“으……얼마나 잔 거지?”
온몸이 찌뿌둥했지만, 정신만은 개운했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도 잠잠했다.
‘이제 괜찮아진 건가?’
끔찍한 나날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안도감이 들고 나니, 배가 고팠다.
하지만 창밖이 어둑했다. 그새 밤이 된 모양이었다.
‘밤에 뭘 먹을 수도 없고.’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밖에서 잠든 것 같은데 누군가 그녀를 침실로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그냥 다시 잘까.’
푹신한 이불에 묻혀 있으니 다시금 하품이 흘렀다.
하암, 크게 하품한 디젤라가 졸린 눈을 비빌 무렵, 어둠 속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렀다.
“이제 저는 가보겠습니다.”
“뭐, 뭐야! 너 누구야!”
“……쟈르스입니다.”
어둠 속에서 쟈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몹시 피곤한지 안경알 아래로 드러난 눈 밑이 거뭇했다. 목소리도 푹 잠겨 낮았다.
쟈르스를 잠시 응시하던 디젤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