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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1화 (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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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정보 길드에게 전달받은 자료를 읽고 나서 세실레는 도서관에 가기로 결심했다.

고서에 언급된 ‘각성자’란 존재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황실 도서관은 관리가 잘 되어있어 방문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고서가 있는 곳은 한적했다.

‘어릴 땐 종종 왔었는데.’

세실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어렸을 때 세실레는 숨을 곳이 없었다. 어딜 가도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 때면 종종 도서관에 숨었다. 널따란 도서관은 자그마한 세실레의 몸을 잘 숨겨 주었다.

그럴 때면 세실레는 그녀를 찾는 이들의 외침을 피해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곤 했다. 그런 다음 몸을 옹송그리곤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였지, 아마.’

세실레는 안식처처럼 찾았던 베이지색 커튼을 만지작거렸다.

세월이 흘러 커튼을 새로이 커튼을 단 듯했지만, 추억은 여전했다.

세실레는 두툼한 커튼을 만지작대다, 벽에 몸을 기댔다.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오랜만이네.’

황태후가 세실레에게 도서관 출입금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대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목록을 작성해서 제출하게끔 했다.

그나마도 부탁하면 대부분은 거절당했다. 사실상 책을 읽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린아이도 읽을 법한 교양서적의 대출마저 금지당하고 나서야, 세실레는 목록 작성을 그만두었다.

‘책 읽을 시간에 예법 공부를 하거라! 자세가 형편없구나.’

호통치던 황태후를 떠올리던 세실레의 입가에 헛웃음이 흘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신기한 힘도, 힘과 함께 찾아온 인연들도.

하지만 그런다고 사람이 바뀌지는 않았다. 세실레는 이전의 유약하던 때와 지금이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저 힘이 생겼을 뿐.’

이마저도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 디젤라가 어젯밤 떠들던 말대로였다.

‘왜 언니만 다 가져? 언니가 뭘 했다고!’

세실레는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난 뭘 했지?’

세실레는 눈을 감은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디젤라의 증세를 완화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정신 차리자.’

세실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여러 종류의 책이 꽂혀 있었지만 대부분 역사나 신학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세실레는 닥치는 대로 책을 펴들었다. 정치, 경제라면 몰라도 이런 쪽으로는 지식이 제법 있었다.

덕분에 막힘 없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세실레는 한참이나 책에 몰입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다시 떠올랐다는 것도 모를 만큼.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땐,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

따스한 햇볕이 삭막한 집무실을 파고들었다. 아늑한 기운에 몸을 묻고 있던 아르베우타는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며 물었다.

“디젤라는 여전한가?”

“네, 쟈르스 님과 계시면서 안정을 찾고 계신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아르베우타는 고개를 돌려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황후궁에서 피어오르던 어두운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첫 고비는 넘겼군.’

디젤라가 온전히 각성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쟈르스라는 열쇠를 찾았으니 가능성은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활발한 성격은 세실레에게도 도움이 됐다.

‘표정이 밝았지.’

세실레를 떠올리던 그는 옅게 힘을 피워 올렸다.

봉인되었던 자신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펜듈럼도 완전히 깨졌다.

사실상 세렌디가 무력해졌다는 뜻이었다.

‘곧 세렌디가 움직일 것 같은데.’

그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아르베우타는 우선 세실레의 기억을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슬슬 세실레의 봉인도 풀려가고 있었다.

저번에 아르베우타를 보고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과거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단 뜻이지.’

아직 완전히 기억을 되살려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었다. 천천히 되찾게 될 테니까.

그는 천천히 기운을 풀어, 세실레의 기척을 좇았다. 그녀는 도서관에 있었다.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같은 위치에 앉아 있었다.

‘무슨 책을 찾는 건지 알 것 같지만.’

디젤라가 보이는 이상 증세와 관련된 기록을 찾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관련된 기록이 도서관에 있을 리 없었다.

황궁의 도서관은 세렌디 신이 내린 성물 중 하나였고, 그곳에 각성자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으니.

헛수고였다. 그것도 모르고 세실레는 열심히 찾고 있겠지만.

‘그러니 찾아가야지.’

아르베우타는 몸을 일으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의 연인을 보러 갈 시간이었다.

***

세실레는 뻐근한 목을 들어 올렸다. 한참 동안 책을 읽었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헛수고였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신전을 먼저 찾을 것을.

세실레는 힘없이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종일 굶었으나 배고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졸렸다.

한낮이었다. 하루를 고스란히 도서관에서 보낸 세실레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두툼한 커튼이 그녀의 몸을 가렸다.

순식간에 포근한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어릴 적 이곳에 숨었다가, 무심결에 잠들었을 때처럼.

창가로부터 쏟아지듯 들어오는 햇빛이 세실레를 고스란히 비췄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

햇살에 비친 머리칼이 반짝였다.

길게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고 가느다란 얼굴을 햇빛에 노랗게 물든 은발이 가렸다.

피곤했는지 잠든 세실레는 미동조차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을 깨우는 기척에 세실레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으음…….”

발걸음이 멎었다. 세실레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빛을 가린 그림자에 반짝이던 머리칼이 빛을 잃었다.

잠시 그녀 앞에 서 있던 아르베우타는 조심스레 세실레의 곁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갈 곳 없이 벽에 기대었던 세실레의 고개가 자연스레 옆으로 기울어졌다.

“좋은 꿈 꿔.”

다감한 목소리에 세실레는 잠결에도 고개를 주억였다.

수상한 기척을 느끼긴커녕 곁에서 나는 체취가 몹시도 익숙했다. 좀처럼 불편하던 자세가 순식간에 안정감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안심하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르베우타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 시간 동안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그저 이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

시간이 흘러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었다. 정오의 찬란한 햇빛을 머금었던 머리칼은 석양의 붉은 빛으로 차차 물들어갔다.

아르베우타는 한참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다리다 지친 테레사가 이곳을 찾을 때까지.

그는 아르베우타를 발견하곤 화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테레사 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뻔뻔한 작태에 테레사가 몸을 떨었다.

테레사는 내내 도서관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어떻게 왔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동안 더 강해진 건가.’

하지만 힘을 얻는 것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기척을 숨길 정도로 힘을 다루는 건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는 건 아르베우타가 그간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주, 계획적으로.

테레사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렀다.

“신경 쓰지 말고 가.”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셨을 때 분노를 감당할 자신은 있습니까?”

아르베우타는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그를 보며 테레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든 주인을 깨울 수는 없으니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최대한 소란 없이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쉬이 떠날 기세가 아니었다.

테레사의 짜증을 느꼈는지 아르베우타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듯하군.”

자그마한 목소리와는 달리 붉은 눈동자가 오만하게 일렁였다. 싫으면 네가 어쩔 거냐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그가 자신하는 것처럼, 테레사는 여기서 조용히 아르베우타를 떼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랬다간 세실레가 잠에서 깨버릴 테니까.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를 덜 마주할수록 좋았다.

테레사는 겨우 화를 억누르곤 읊조렸다.

“당신 정말 이기적이군.”

“그걸 이제야 알았나.”

“새삼스레 깨달은 겁니다.”

경멸하듯 노려보는 눈초리에 아르베우타의 입매가 비틀렸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테레사 또한 그를 마주 보며 속삭였다.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합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아르베우타는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은 이후의 삶 따위,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죽으면 끝이었다. 그러니, 죽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살아있고 싶어지는데.”

실없이 중얼대는 목소리에 테레사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저런 파렴치한과 말을 섞는 것조차 시간 낭비였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당신은 후회하게 될 테니까.”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널따란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채 분노를 가다듬지 못한 소리에 내내 잠들어 있던 세실레가 눈을 떴다.

은백색의 속눈썹 아래에 숨어 있던 청안이 고요하게 주변을 훑었다.

막 잠들었다 깬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명료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테레사를 천천히 훑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네.”

막 잠에서 깬 사람치곤 너무나도 멀쩡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르베우타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심상찮은 반응에 테레사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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