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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0화 (50/110)

50

예상치 못한 인물에 디젤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당신이 여긴 왜.”

“할 일을 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 침실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을 텐데요?”

디젤라는 조금 전 일도 잊고 화를 냈다. 이성을 잃은 사이, 언니에게 쟈르스를 꺼내 달라고 조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방에 찾아오라는 말은 아니었다.

디젤라는 당혹스러워하며 자신의 옷차림을 훑었다. 엉망이었다.

지난 이틀간 방에 박혀 있던 탓에 잠옷은 엉망으로 구겨졌고 눈엔 눈곱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무리 저택에 갇혀서 살았다지만,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차림이란 것쯤은 알았다.

볼에 열이 오르는 것과 동시에 허락도 없이 침실까지 찾아온 쟈르스에게 화가 났다.

먼저 방문을 연 건 자신이란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디젤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누, 누가 멋대로……,”

“노크를 다섯 번쯤 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요?”

“그러시겠죠. 그러니 황후 폐하께서 어젯밤 내내 이곳에 서 계셨던 것도 모르겠죠.”

쟈르스는 안경을 끌어 올리며 디젤라의 차림을 훑었다. 확실히 디젤라는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흐트러진 차림인 데다 고작 이틀 새에 부쩍 수척해졌다.

황후가 몇 시간이고 밖에서 대기했다는 데 그걸 모두 처음 듣는 소리 취급하는 것도 그랬다.

‘내가 어쩌다 이런 여자를.’

쟈르스는 한숨이 흐르려는 걸 겨우 참고, 최대한 정중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일단. 민망해하는 것 같으니 배려를 해야겠지.’

여태껏 연애 한 번 안 해본 그였지만, 이론만큼은 철저했다.

그간의 지식을 조합해 보자면, 지금은 디젤라의 헐벗은 어깨부터 가려줄 때였다.

쟈르스는 그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디젤라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추워 보이는 데 일단 덮으시지요.”

“이게 무슨…….”

디젤라는 어깨를 덮은 자켓에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온기가 유달리 따스했다.

예상치 못한 온화함 덕인지 시끄럽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녀는 맑아진 정신으로 제 앞에 선 남자를 눈에 담았다.

지금 보니 마른 몸을 늘씬하게 휘감은 정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게다가 저 안경만 벗으면 얼굴도 꽤…….’

거기까지 생각하던 디젤라는 깜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평생을 갇혀서 살았다지만 저런 샌님처럼 생긴 남자에게 넘어갈 뻔했다니!

‘말도 안 돼. 내 이상형은 근육 빵빵한 남자라고!’

저택에 갇혀 있으면 할 일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디젤라는 미래의 남자친구를 상상하곤 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미래의 남자친구는 단단한 근육을 가진 남성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구해주는 용사였다.

물론, 이루어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비리비리한 남자는 사양이었다.

디젤라는 몸을 돌려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누, 누가 이러면 반할 줄 알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만.”

쟈르스는 눈앞에서 닫힌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디젤라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사라진 뒤였다.

덕분에 할 일이 없어졌다. 이 자리에서 또다시 노크 따위를 했다간 성질만 낼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화가 난 레이디를 달래는 법 따윈 몰랐다.

“가야겠군.”

쟈르스가 자리를 뜨기 직전, 다시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불로 온몸을 가린 디젤라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왜, 왜 가요? 날 만나러 왔다면서?”

디젤라는 초조한 눈동자로 쟈르스를 불러세웠다. 열띤 뺨과는 달리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방에 혼자 있으니까 또 목소리가 들렸어.’

혼자가 되자마자 목소리가 속삭였다.

순식간에 정신을 잠식하려 드는 목소리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은 방을 나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방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소리가 좀 잦아들었을 뿐, 스산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죽이자. 죽여.

그러나 놀랍게도 쟈르스를 보자 불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저 남자에게 뭔가 있는 모양이지?’

이유는 모르지만,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필요한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할 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그 할 일이란 거, 날 보러 온 거잖아.’

아마도 언니가 자신을 위해 보낸 모양이었다.

디젤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 일은 해야죠? 여기서 기다려요. 옷 좀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디젤라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득달같이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가서 언니한테 복수하자. 널 외롭게 했던 그 세월을 모두 보상하라고 하는 거야.

“시끄러워. 시끄러워. 아, 정말 시끄럽다.”

-언니가 가진 모든 걸 네게 줄게.

“어디서 개가 짖나. 왕왕.”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만한 광경이었다.

‘그래. 미쳤지. 그것도 단단히.’

디젤라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

이대로 언니가 저를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언니를 칼로 찔러버릴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너도 그 애를 죽여버리고 싶잖아.

무심코 중얼거리던 디젤라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한계였다.

그녀는 대강 옷을 걸치자마자 문을 열었다. 그 앞엔 쟈르스가 멀뚱히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엔 지루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디젤라는 절박한 표정으로 쟈르스를 재촉했다.

“빠, 빨리 가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디젤라는 무어라 설명도 하지 않고 쟈르스를 잡아끌었다. 졸지에 팔이 잡힌 쟈르스는 말없이 그녀를 따랐다.

어차피 쟈르스가 할 일은 디젤라를 돌보는 일이었다.

은퇴 후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은 우습지도 않았다.

쟈르스는 진지한 마음으로 보모 역할에 임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겸사겸사 황후 폐하의 신뢰도 얻을 수 있으면 좋고.’

쟈르스는 노심초사하던 황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일전의 위엄 넘치는 모습을 집어던지고 밤새 방 앞을 서성였다.

절박한 목소리가 내내 복도를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디젤라를 불러내지 못했다. 그걸 쟈르스가 해낸 것이다.

‘이 정도면 쓸모는 있다고 여기시겠지.’

그걸로 됐다. 쟈르스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리며 성큼성큼 걷는 디젤라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겉보기에도 만만찮아 보였던 아가씨는 보폭도 어지간한 성인 남자보다 커, 따라가기 조금 벅찰 정도였다.

***

잠시 침실에서 쉬고 있던 세실레는 시녀의 보고를 받곤 눈살을 찌푸렸다.

“디젤라가 쟈르스랑 같이 있다고?”

“네. 정원에 계십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세실레는 어젯밤 내내 디젤라를 불렀다.

하지만 디젤라가 나오기는커녕 문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어두운 기운만 몸집을 키워갔다.

강제로 열어보려고도 했지만 선뜻 그럴 수 없었다. 디젤라가 문이 열리는 것에 몹시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열지 마! 제발, 열지 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괴로웠다.

나오지 않는 디젤라도, 방 안에 울려 퍼지는 흐느낌도.

‘……언니가 미워.’

디젤라가 거친 호흡 끝에 토해낸 말이 세실레의 가슴을 후벼팠다.

‘너는 왜…….’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견디기 힘들었다.

괴로워하는 디젤라에게 미안해서, 또 자신을 미워하는 디젤라가 미워서.

결국, 세실레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버렸다.

대신 쟈르스를 보냈다. 그마저 실패하면 강제로 문을 열 계획이었다.

‘그런데 성공하다니.’

쟈르스를 보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얻은 성과였다.

곁을 지키던 시녀의 말에 의하면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디젤라가 방에서 나왔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쓰임새는 확실하군.’

세실레는 지친 기색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드리운 수풀 너머, 작은 정원에 두 사람이 함께 있댔다.

신경이 쓰였다. 세실레는 무심코 테레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테레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서 살펴볼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디젤라가 알면 싫어할 게 분명했다.

대신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젤라를 둘러싼 검은 기운에 관해 연구가 필요했다.

‘쟈르스랑 있으면 기운이 옅어지는 건 확실해.’

그렇다면 검은 기운을 없애는 방법도 분명 있을 터였다.

세실레는 걸음을 뗐다. 그러자 테레사가 곧장 따라붙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도서관.”

제국의 도서관은 오키드리아 대륙에 세렌디 신이 축복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세워졌다. 고대의 기억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는 그곳이라면 어두운 기운에 대한 답도 있을지 몰랐다.

***

디젤라와 쟈르스가 앉은 정원엔 정적만 가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오랜만의 휴식이로군.’

쟈르스는 내리쬐는 햇빛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더니 햇빛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디젤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오니 햇볕을 쬐는 게 기분 좋았다.

바로 잠들 것 같을 정도로 몸이 노곤했다.

‘졸리다.’

디젤라는 물씬 피어오르는 꽃향기를 느끼며 몸을 늘어뜨렸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흠뻑 밀려들었다.

‘자고 싶어.’

며칠째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니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디젤라는 흐릿한 시야로 쟈르스를 쳐다봤다.

쟈르스는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디젤라는 몽롱한 시선으로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가만 지켜보고만 있었다.

빤한 시선을 느낀 쟈르스가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곤 입을 열었다.

“졸리십니까.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니, 안 졸려요. 안 잘 거예요.”

“눈이 반쯤 잠기셨는데요.”

“아니, 안 잘 거라니까. 왜 자꾸 재우려고…….”

쟈르스는 눈앞에서 웅얼대는 여자를 가만 바라봤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에도 꿋꿋이 대답하고 있었다. 곧 잠들 게 분명했다.

잠들면 두고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디젤라의 뒤엔 황후가 있었고 황후의 뒤엔 황제가 있었다. 첩첩산중이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목이 날아가겠군.’

쟈르스는 휴식을 포기하고 하염없이 자리를 지켰다.

2부

그의 곁엔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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