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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9화 (4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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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모두 물리고 세실레와 쟈르스, 단둘이 앉아 있는 응접실엔 침묵만 맴돌았다.

막 감옥에서 빠져나온 터라 쟈르스는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 부르신 거지.’

저번 황제와의 만남으로 곧 무슨 일이 생기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황후의 여동생인 디젤라를 통해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봐왔건만,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쟈르스는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겨우 한숨을 삼켰다.

세실레 또한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쟈르스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쟈르스를 풀어준 이유는 순전히 디젤라 때문이었다.

‘디젤라는 무슨 생각인 거지.’

디젤라를 감싸고 있던 이상한 기운이 쟈르스와 가까워지는 순간 옅어졌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쟈르스가 디젤라의 기운을 일부 정화시킨 것이다.

세실레는 디젤라를 도울 생각이었다. 당연히 음습한 기운의 정체도 알아볼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쟈르스가 필요하겠지.’

생각을 마친 세실레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내내 좌불안석인 쟈르스를 보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왜 다시 불렀는지 아나?”

“디젤라 님 때문입니까.”

“그래 맞아. 내 여동생 때문이야.”

세실레는 꼿꼿하게 펴고 앉았던 허리를 등받이에 깊게 기댔다. 디젤라를 떠올리니 한숨이 흘렀다.

디젤라를 위해서라지만, 쟈르스는 한 번 배신한 전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황제 편이었다. 그를 자유롭게 두었다간, 또다시 황제와 손을 잡고 일을 낼 게 분명했다.

그녀는 쟈르스를 선연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 동생 덕에 넌 목숨을 얻은 거야. 그러니 최대한 그 애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 난 언제고 널 다시 감옥에 보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세실레는 묵묵히 수긍하는 쟈르스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이 년 동안 멀쩡했던 사람 중 하나라던가.’

이 년간 악령에 시달리지 않았던 사람도 많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욕심과 거리가 먼, 평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쟈르스가 제정신을 유지했단 소문은 많은 걸 의미했다.

‘돈을 밝힌다고 들었는데, 나쁜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지.’

적어도 디젤라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었다. 세실레는 쟈르스를 바라보며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해. 넌 누구 편이지?”

“……당연히 황후 폐하의 편입니다.”

“그럼, 황제가 꾸미고 있는 모든 걸 말해.”

내내 순종적인 태도로 대답하던 쟈르스가 입을 다물었다.

비밀을 숨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몹시 곤란해 보였다.

세실레가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여전히 쟈르스는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꾸미고 계신 것이라고 해봤자, 황후 폐하와 백년해로하실 생각밖에,”

“지금 내가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군.”

세실레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은빛의 실이 쟈르스를 묶었다. 포

박된 쟈르스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목에 날카로운 실이 들이 밀어졌다.

아주 얇지만, 충분히 목을 벨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실이었다.

칼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실을 응시한 쟈르스가 말을 더듬었다.

“진, 진짜입니다! 신께 맹세코! 설령 다른 계획이 있다 하셔도 저는 모릅니다.”

“……모른다? 그럼, 디젤라는 왜 가뒀지?”

“그, 것도 저는 모릅니다! 황제 폐하께서 따로 만나려고 하셨다는 것밖에……!”

“…….”

“진심입니다.”

세실레가 쟈르스의 눈을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세실레는 체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심문할 수도 있겠지만 디젤라가 우선이었다.

그녀는 문을 향해 걸었다. 쟈르스의 실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나직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한동안은 황후궁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한 없는 감금 명령에 쟈르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렀다.

***

디젤라는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불을 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로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디젤라는 꼭 악령에 홀린 사람처럼 무언가를 쉼 없이 중얼거렸다.

“언니가 미워.”

“아니야. 언니도 고생을 많이 했어.”

“그렇지만 언니는 다 가졌잖아.”

상반된 마음이 그녀를 괴롭혔다. 자신조차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이대로면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디젤라. 괜찮니?”

언니였다. 그토록 걱정했고 또 미워했던 언니가 저 밖에 있었다.

그 순간 어두운 기운이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디젤라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분기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혼자 있고 싶댔잖아!”

그러자마자 디젤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언니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이유도 모르면서 덜컥 겁이 났다.

언니에게 계속해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겨우 얻게 된 것들을 모조리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엄습했다.

디젤라는 몸을 말았다. 매트리스를 쥐어뜯듯 움켜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고 나서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언니를 보내야 해.’

디젤라는 겨우 목을 가다듬곤 입을 열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 나 쉬고 싶어.”

가느다란 목소리를 끝으로 디젤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지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

디젤라의 이상한 행동에 황후궁엔 비상이 걸렸다. 궁의 주인인 세실레 또한 여동생의 칩거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테레사만큼은 침착했다. 그녀는 단단히 닫혀있는 방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테레사는 그동안 아르베우타의 뒤를 은밀히 쫓았다.

그는 기척에 예민하고 철저해, 무언갈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테레사는 아르베우타의 목적을 알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행동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아르베우타의 행보는 영 이해하기 어려웠다.

루베르를 공격한 것도, 디젤라를 황궁에 가둬둔 것도 그랬다.

그녀는 루베르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녀석의 힘이 강해졌더군. 하지만 혼자 힘으로 우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겠지. 분명 조력자를 찾을 거야.’

테레사는 루베르가 말하는 조력자를 찾았다. 개 중에 디젤라도 용의 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디젤라는 여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과거 아르베우타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디젤라의 증상은 각성하기 직전의 인간이 겪는 성장통과 비슷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지난한 성장통.

‘그렇다면 열쇠는 쟈르스인가.’

세실레가 한 번 배신한 쟈르스를 곁에 두고자 하는 이유도 본능적으로 쟈르스가 디젤라에게 도움이 되리란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테다.

‘미리 처리해야 했는데.’

테레사는 이를 갈았다. 디젤라가 위해를 가할 리 없다고 믿었던 테레사의 오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불의의 사고라도 저질러, 문제를 미연에 방지했을 터였다.

인제와 조용히 처리하기엔 너무 복잡해져 버렸다. 그렇다면야.

‘차라리 지금 죽이는 게 나을지도.’

세실레의 미움을 받더라도, 그녀를 위해서 디젤라를 처치하는 편이 나았다.

테레사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검은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문 너머의 작은 생명을 앗아갈 터였다.

그녀는 침착하게 호흡하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테레사가 검을 뽑아 드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자그마한 손이 테레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신 차려.”

루베르였다. 그는 엄한 표정으로 꾸짖듯 말했다.

“네 쓰임은 따로 있다.”

***

디젤라는 숨을 헐떡였다. 어제부터 이상했다. 이제는 감정이 들끓더니 이제는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디젤라는 가슴께를 틀어쥔 채로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땀 범벅이 된 몸이 쉼 없이 떨렸다.

그러는 중에 머릿속에선 자꾸만 무언가가 떠들어댔다.

정체 모를 것은 디젤라를 쉼 없이 유혹했다.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짜증 나지? 다 죽여버리고 싶지? 왜 언니에게만 좋은 게 다 주어지고 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럽지 않아?

시끄러웠다. 듣기 싫은 저열한 말들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이 정체 모를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항할수록 오히려 더욱 크기를 키워 그녀를 괴롭힐 뿐이었다.

-내가 그 이유를 알아. 왜냐하면 네 언니는 —니까.

그것은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중요한 부분이 뭉개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갈 요구할 때만큼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바뀌었다.

-언니를 넘어서고 싶다고 말해. 그럼 내가 도와줄게.

“뭐라는 거야!”

디젤라는 허공에 베개를 던졌다. 그러나 그녀가 베개를 던진 방향엔 아무것도 없었다.

거세게 날아간 베개는 벽에 부딪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텅 빈 허공을 바라보던 디젤라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이유 모를 한기가 들어 몸이 떨렸다.

이대로라면 곧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디젤라는 변해가는 자신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꽁꽁 여민 커튼 매듭을 풀어헤쳤다. 그리곤 스며드는 햇빛 앞에 가서 섰다.

“정신 차려. 디젤라. 너 그렇게 나약한 애 아니잖아?”

기세 좋게 말하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친 입술이 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혈색 없이 창백한 얼굴을 쓸어보던 디젤라가 이를 꽉 악물었다. 죽을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방 밖으로 나가면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면 증세가 더욱 심해질 게 분명했다.

‘어차피 이 상태로 살아야 한다면.’

죽더라도 밖에 나가는 게 나았다. 디젤라는 이를 악물고 문고리를 잡았다.

문 틈새로 개운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어둑하던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생각과는 달리, 무섭지도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도리어 방 안에 있는 게 더 힘들었다.

디젤라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앞에는 쟈르스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디젤라를 괴롭히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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