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디젤라는 저번 만남을 곰곰이 떠올렸다. 하지만 루베르가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칭찬했는데.’
자기더러 언니랑 닮았다고 했다. 설마 그게 언니가 듣기엔 기분 나빴던 걸까.
디젤라는 언니의 평소 모습을 가만 떠올렸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그런 거로 어린애를 꾸짖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면 루베르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차라리 그편이 일리가 있었다. 하기야 디젤라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언니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다는 것 정도는.
‘그걸 이렇게 확인시켜 주다니.’
디젤라가 혀를 찼다. 그러는 중에도 서럽게도 울어대는 루베르를 다독이는 손길은 멎지 않았다.
어설픈 다독임에도 루베르의 훌쩍임은 잦아들어 갔다. 차차 진정되어가는 아이를 보며 디젤라가 안도하는데, 루베르가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어 물었다.
“그럼 나 용서해 주꺼에요?”
“으응? 그래. 용서해줄게.”
“와아! 누나 착해!”
언제 울었냐는 양 루베르가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젤라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황궁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야.’
이래서 엄마가 조심하라고 한 걸지도 모르겠다. 저 나이대 어린 애부터 이상한 걸 보아하니.
‘그나저나 언니도 은근히 엄하다니까.’
디젤라가 고개를 저을 무렵, 품에 꼭 안겨 있던 루베르가 어딘가로 뛰쳐나갔다.
바로 앞에 언니가 나타난 것이다.
“엄마!”
“루베르?”
루베르는 언제 울었냐는 양 세실레에게 살갑게 안겼다. 세실레는 루베르를 스스럼없이 안아주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디젤라는 둘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언니는 언제 나타난 거고 쟤는 언니가 어디서 나타날지 어떻게 안 거야?’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그랬다. 경황이 없어 착각이라 생각하고 넘겼지만, 발이 바닥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곰곰이 떠올리던 디젤라가 둘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세실레가 디젤라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니?”
“언니, 조금 전에 여기 없었지?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세실레가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게 말을 해주질 않았네.”
동시에 세실레의 왼손등이 환하게 빛나며 은백색의 빛무리를 흘렸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디젤라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는 디젤라에 세실레가 부끄러운 듯 힘을 거두었다.
“별 건 아니야.”
“……멋지다.”
“고마워.”
생긋, 짓는 미소마저 예뻤다. 그를 홀린 듯 바라보던 디젤라는 얼마 가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곧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디젤라는 언니의 힘을 보고 나니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이해가 됐다.
전대 성녀들과는 달리 충분한 권력을 누리는 것도, 그리고 사람들이 언니를 따르는 것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세상이 참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 가졌는데, 또 가졌네.’
이 마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부러운 것도 같았고 질투가 이는 것도 같았다.
흔히들 말하는 열등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디젤라는 애써 감정을 떨쳐내려 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디젤라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곁을 지키던 시녀들이 환성을 내질렀다.
“황후 폐하의 능력은 언제 봐도 대단해요.”
“저희를 항상 악령에게서 지켜주시잖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악령? 처음 듣는 소리에 디젤라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녀들이 들으란 듯 언니 자랑을 해준 덕이었다.
“지난 이 년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어요.”
“맞아요. 전 항상 밤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한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세실레가 얼굴을 붉혔다.
사실 황후궁의 시녀들끼리는 이미 황후 폐하의 기분을 좋게 해드리자며 미리 입을 맞춘 뒤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더욱 힘내서 칭찬을 쏟아냈다.
“전 폐하를 모실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가문의 영광이랍니다!”
이어지는 대화에 디젤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감정이 드는지 잘 모르겠지만, 막상 마주한 열등감은 무서우리만치 강력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지.’
엄마가 언니를 칭찬할 때부터 뿌리내린 열등감은 황궁에 온 이후로 뼛속까지 각인되었다.
디젤라는 죽어라 노력해도 언니처럼 될 수 없었다, 절대로.
‘……왜 난 안 돼?’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으면서 외모도 목소리도 피부도. 아니, 그냥 모든 게 이렇게까지 다를 수가 있나?
평생을 언니의 들러리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조금 서러웠다.
디젤라는 조용히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모여든 시녀들이 언니를 둘러싼 덕에 아무도 디젤라의 이탈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정처 없이 황후궁을 맴돌던 디젤라는 낡은 계단 앞에 섰다.
다 낡아, 녹이 슨 철문이 보였다. 그대로 문을 향해 손을 뻗던 찰나, 앞을 지키던 기사 둘이 가로막고 섰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들어가 보려고요.”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디젤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또 언니야?”
“……네?”
“그놈의 언니, 언니. 그까짓 성녀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디젤라를 보며 경비병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을 가만 바라보던 디젤라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내가 못 들어갈 것 같아?”
“디젤라 님께서 보실만할 건 없습니다. 이곳은 감옥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아래는 더럽고 위험한 지하 감옥이었다. 저런 곳에 굳이 발을 디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디젤라는 감옥에 가보고 싶었다. 괜한 심술일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가고 싶었으니까.
디젤라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와락 소리 질렀다.
“비켜! 난 들어가고 싶으니까.”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단호한 음성에 속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참을 수 없는 화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그대로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 뒤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여보내 줘.”
“……네.”
세실레였다. 황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세실레는 얼음처럼 굳어 있는 디젤라를 바라보며 선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같이 가려고 했는데, 잘 됐다.”
세실레의 상냥한 웃음에, 디젤라는 더 화가 났다.
***
세실레는 디젤라를 가만 쳐다보았다. 그녀의 주위로 어렴풋하지만 시꺼먼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악령?’
악령은 아니었다. 애당초 세실레를 눈앞에 두고도 악령이 버젓이 붙어있을 만큼 디젤라가 험한 짓을 했을 리 없었다.
‘그럼 저건 뭐지.’
어두운 기운이었다. 그것은 세실레를 앞에 두고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세실레의 기운은 정화와 맞닿아 있었다. 사악한 기운이나 부정한 기운은 세실레를 앞에 두곤 몸을 사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건 아니었다. 저 어두운 힘은 세실레를 앞에 두니 더욱 격하게 요동쳤다.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
세실레가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 디젤라가 말없이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디젤라를 지켜보던 세실레 또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결한 황후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지하 감옥은 음침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공간은 습했고 찬 바람이 스며들어 추웠다.
군데군데 낀 이끼는 미끄러웠고 쿰쿰한 곰팡내도 올라왔다.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불쾌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디젤라는 인상 한 번 구기지 않은 채로 복도를 걸어, 감옥 안에 갇힌 유일한 죄수의 앞에 가서 섰다.
“……오랜만이네요.”
디젤라의 인사에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쟈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새 살이 빠져 수척하게 말랐다.
세실레는 멍하니 철창 앞에 선 디젤라의 옆에 섰다.
마침 잘 됐다. 디젤라가 있을 때 쟈르스를 심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서류엔 이상한 점이 없었지.’
길드에서 받은 서류에 특이점은 없었다.
쟈르스가 황제에게서 특별 보너스를 받은 사실을 확인했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가 황제의 수석 비서관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쟈르스에게 묻는 것뿐이었다.
그는 황제의 최측근인 데다, 디젤라를 가둬놓기까지 했으니까.
생각을 마친 세실레가 디젤라를 향해 물었다.
“디젤라. 널 가둔 사람이 이 사람이지?”
그러나 디젤라는 답이 없었다.
내내 침묵하는 그녀를 보며 세실레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이 사람이 맞을 거야. 최근까지 황제의 수하였고, 그때도 방 앞에 있었으니까.”
“……그래?”
“응, 그러니까 당장…….”
“그런데 어떡하지, 언니?”
디젤라는 고개를 틀어 세실레와 시선을 마주했다. 세실레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디젤라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디젤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 사람 아니야. 내가 착각한 것 같네.”
“뭐?”
“저 사람은 날 도와줬어. 황궁에 못 들어오고 있는데 내 신분을 밝혀줘서 들어올 수 있었어. 그렇죠?”
디젤라의 물음에 쟈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거절하진 않겠다는 투였다.
쟈르스를 응시하던 디젤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곧 천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세실레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 풀어주면 안 돼? 내 은인이란 말이야.”
세실레는 말없이 디젤라를 가만 쳐다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일렁이는 새카만 그림자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