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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7화 (4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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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적이기는.’

세실레는 입술을 짓씹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제야 몸이 자유로워졌다.

세실레는 곧장 팔을 들어, 그의 뺨을 내리쳤다.

짝-!

뺨을 치는 타격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덩달아 주변을 지키던 기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당황하기는 세실레도 마찬가지였다. 멋모르고 나간 손을 힘주어 쥔 세실레가 숨을 삼켰다.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해야 했다. 여기서 사과했다간 모습이 우스워질 테니까.

세실레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이 루베르를 때렸다면서요?”

“…….”

“당한 걸 갚아준 것뿐이니 억울하진 않죠?”

그제야 아르베우타가 틀어진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붉게 부은 뺨이 더욱 눈에 띄었다.

세실레는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도리어 그의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

“억울할 리가.”

“…….”

“드디어 네가 날 봐주는데.”

세실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에선 헛숨이 흘렀다.

“……대화하러 온 내 잘못이지.”

세실레는 황후궁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걸어가다, 자리에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요.”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답이 없었다. 도리어 세실레의 손이 맥없이 떨렸다.

‘대체 왜 이러지?’

생각이,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고개를 돌려 아르베우타를 보고 싶었다.

다가가서 많이 아팠냐고, 다치지는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정신 차리자.’

세실레는 잇새를 악물곤 걸음을 뗐다. 차라리 잘 되었다.

‘꼭 한번 때려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숙원을 이룬 셈이었다. 그런데 영 가슴이 시원하지 않았다.

도리어 지나치게 답답했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바깥을 보았다. 그새 밤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바깥에 볼일이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확실히 알아야겠어.’

지난번 의뢰한 정보 길드에 들릴 생각이었다.

세실레는 걸음을 서둘렀다.

***

아르베우타는 점점 멀어지는 세실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굴엔 씁쓸한 기색이 가득했다.

심상찮은 상황에 시종들이 황제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들은 의미심장한 황제의 표정에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드디어.”

상심했던 얼굴이 희열로 얼룩져 있었다.

***

디젤라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천천히 펜을 가져갔다. 잉크를 머금고 부드럽게 써지는 감각이 일전에 쓰던 종이와는 확실히 질이 달랐다.

clas="box2"-엄마에게.

엄마, 저 디젤라예요.

연락이 늦어 죄송해요.

이곳 생활은 정말이지 평화로워요.

엄마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언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그거 아세요?

엄마가 걱정했던 황태후라는 분은 지금 많이 아프대요.

다행인 거겠죠?

그럼 저도 곧 돌아갈게요. 그때 뵈어요.

엄마를 정말 사랑하는 디젤레가.-

디젤라는 들고 있던 펜을 놓았다. 그러곤 몇 번 편지지를 들여다보다, 깊이 숨을 내쉬었다.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안부 인사 겸해서 보내는 편지이니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이를테면 언니의 부부 관계가 별로인 것 같다는 거나 이상한 꼬맹이가 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것 따위의.

‘어차피 엄마가 밖에 나올 일도 없을 텐데.’

오랜 시간을 갇혀 산 엄마는 밖에 나오는 일에 두려움이 많았다. 부모님은 저택을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바깥으로 나올 생각 따윈 하지 않고 얌전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겠지.’

그렇다면 천천히 알려주어도 됐다. 편지로 소식을 전하면 오히려 불안할 테니까.

디젤라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들고 있던 편지를 곱게 접은 다음 시녀에게 전달했다.

“이거. 세렌디테 공작 가에 전달해 줘.”

“네.”

누군갈 부리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황궁에 오니 금세 적응했다.

번거로운 일을 남이 해준다는 건 편하고 좋았다.

‘평생 여기서 살고 싶다!’

시녀에게 편지를 넘기고 나자마자 디젤라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게다가 벌써 해가 졌다.

디젤라는 까만 하늘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운동이나 할까.’

언니가 뭐 하는지 보고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주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였으니까.

디젤라는 서슴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작은 화단이 있는 구역으로까지 빠져나왔다.

때마침 가까이서 시녀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그래. 황후께서 황제 폐하의 뺨을 때리셨대.”

“그런데 맞고만 계셨다고?”

“그렇다던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따귀를 때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이가 소원한 황제 부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디젤라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놀란 마음에 몸을 움츠리곤 조심스레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말 대단하다. 때린 쪽도 맞은 쪽도.”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황후께서 손찌검할 일이라니. 도대체 뭘까?”

“그러게. 그분이 이유 없이 그럴 분은 아닌데.”

그 순간, 디젤라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언니. 제법 하는걸?’

마냥 순진해서 당하고만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황제의 뺨을 때리다니, 생각지도 못한 대범함에 놀랐다.

게다가 황궁의 사람들도 언니를 탓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간의 정황으로 유추해볼 때 엄마의 말과는 달리, 언니는 제법 힘이 있어 보였다.

‘이 정도면 마냥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하지만 조금 의아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대로 성녀 출신의 황후가 박대받아 왔다는 건, 디젤라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왜 예외일까. 분명 식을 올리던 날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단 말이지.”

언니한테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디젤라가 속 편한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려던 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루베르?”

“응.”

갑자기 나타난 존재에 디젤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댔다.

그러는 동안에도 루베르는 빤한 시선으로 디젤라를 보기만 했다.

순진무구한 루베르의 얼굴을 바라보던 디젤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야.”

“왜? 엄마 있는 덴데 나는 오면 안 돼?”

“그놈의 엄마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거야?”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루베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루베르는 곧 고개를 저었다.

디젤라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 그녀와 말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치,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해?’

루베르가 투덜대는 사이, 디젤라가 몸을 돌렸다. 더는 루베르와 얼굴을 마주하기 싫었다.

떠나려는 디젤라를 발견한 루베르가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러곤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 누나!”

“……내가 왜 네 누나야.”

“그럼 이모?”

“뭐어, 이모?”

“이모 맞잖아.”

“아니야! 그럼 내가 너무 늙어 보이잖……아니, 이게 아니라. 하여튼 우리 언니가 왜 네 엄마냐니까?”

“그야. 우리 엄마니까.”

디젤라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루베르는 신관이랬다. 그래서 성녀인 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게 말이 돼?’

의문투성이지만, 언니가 괜찮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더는 이야기를 잇고 싶지 않은 디젤라가 고개를 저었다.

“에휴. 그래. 뭐, 그렇다 치자.”

디젤라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러자 루베르가 냉큼 디젤라의 소매를 잡아채며 매달렸다.

그 순간 디젤라가 낯을 굳혔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

고작해야 예닐곱 살의 어린애. 떼어내고 가면 그만이라고 여겼는데, 그럴 수 없었다.

도리어 팔이 돌처럼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굳어 있는 디젤라를 바라보는 루베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렸다.

루베르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누나.”

“……왜?”

“저번엔 미안했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디젤라가 의심스럽단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루베르는 어느새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게 내리깐 속눈썹 아래에 자리한 푸른 눈동자가 침울하게 일렁였다. 살짝 깨문 입술이 한참을 머뭇대더니 겨우 열렸다.

“루베르가 누나 가고 나쁜 말 해서 엄마한테 혼났어요. 엄마가 누나한테 사과하고 돌아오랬어요. 정말 미안해요.”

“응? 무슨 말을 했는데?”

“……그건 비밀이에요.”

루베르가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디젤라가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한테 사과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어.”

“으움, 하지만.”

“사과할 거면 제대로 해. 안 그러면 언니한테 가서 사과 못 받았다고 말할 거야.”

“그건 안 돼요!”

뻔뻔한 대꾸에 디젤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무어라 꾸짖으려던 디젤라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루베르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기 때문이다.

디젤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울어?”

“안, 안 우는, 안 우는 데에. 흑.”

“우는 거 같은데?”

“아, 아닝데에…….”

감정이 북받쳤던지 푸른 눈동자에 고였던 눈물이 기어코 떨어졌다.

툭, 소맷자락을 적시는 눈물방울을 시작으로 얼굴이 흠뻑 젖어 들었다.

그걸 숨기겠답시고 고개를 숙이는 루베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루베르를 지켜보던 디젤라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하아. 갑자기 왜 우는 거야.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다.”

“흐윽, 그치만, 안 울려고 했는데…….”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난데없이 보모 역할을 맡게 된 디젤라의 미간이 깊게 팼다. 이 상황은 그녀로서도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언니가 얼마나 혼냈길래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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