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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6화 (4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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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레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루베르랑 디젤라인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둘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러나 별 내용 없는 대화였다. 그조차 얼마 이어지지 않고 끊어졌다.

‘곧 루베르가 오겠네.’

안일한 생각을 하기도 잠시, 바깥에서 루베르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점에서 똑 닮았어.”

이게 무슨 말이지?

세실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다음엔 미간을 찌푸렸다.

어리기 때문이라며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루베르가 진짜 어린아이가 아니라 달에서 온 존재란 건,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으니까.

‘지닌 기운도 상당하고.’

그는 분명 다른 신관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누군지 정체를 밝히지 않기에 세실레 또한 기다려 주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나 버릇없이 굴다니.’

신관들의 정신연령은 신체 나이와 똑같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더는 봐줄 수 없었다.

세실레는 루베르가 오기만 기다렸다. 얼마 가지 않아, 루베르가 문을 열며 안으로 달려들었다.

어린아이가 한 손으로 가볍게 열기에는 터무니없이 무거운 문이었다.

“엄마!”

“그래, 루베르.”

세실레는 활짝 웃으며 루베르를 안아 들었다. 그러곤 제 목에 손을 감아오며 매달리는 루베르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못된 짓을 한 아이는 혼이 나야겠지?”

그 순간 루베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

세실레는 루베르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으려 장장 삼십 분에 달하는 훈계를 했다.

훈계가 견디기 힘들었던지 루베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세실레는 엄한 목소리로 다그칠 뿐이었다.

“울지 마. 운다고 안 봐줘.”

“흐웅, 하지만.”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고 했지?”

“……네.”

루베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내 울어버린 탓에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팔짱 낀 채로 루베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못된 말을 해써요.”

“못된 말 뭐?”

“주제 파악하라고…….”

킁, 루베르가 콧물을 들이켰다. 말하면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지 주먹에 힘이 실렸다.

‘그게 뭐가 문제라고.’

그리 생각하기도 잠시, 다시금 날카로운 눈초리가 내려꽂혔다.

“또 반성하지 않는구나.”

“히익.”

루베르가 몸을 떨었다. 세실레가 꼭 제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갈피를 잡지 못한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말없이 손만 꼼지락대는 아이를 보는 세실레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렀다.

“루베르. 내가 널 아낀다는 건 알고 있지.”

“네에.”

“그런 만큼 네 행실에도 각별하게 신경 써야지.”

세실레는 루베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버릇없어진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게다가 신관의 겉모습은 정신 연령과 비례한다고 했다.

그러니 루베르가 실제로 몇 살이든 지금 지능은 고작해야 예닐곱 살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몇 번은 보아 넘겼다. 아직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모두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정말로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이번엔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아야지.’

그리 마음을 다잡고 있던 차, 루베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어 루베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

“흐아아앙!”

루베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세실레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달래주어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버릇이 나빠질지도 모르는데. 세실레가 고민하는 중에 루베르가 훌쩍이며 소매를 걷었다.

헐렁한 소매가 걷히며 가느다란 흰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팔꿈치에 맺힌 푸르딩딩한 멍이 눈에 띄었다.

그를 발견한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리며 루베르의 팔꿈치를 살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넘어진 거니?”

“내가 넘어졌겠어요?”

당돌한 대답에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루베르가 그렇게 맹한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설령 정말로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간 루베르의 성격으로 유추해 볼 때 이렇게 직접 상처를 내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혹시 누군가 아이를 때렸나 싶어서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베르를 바라보고 있으니, 루베르가 고개를 팩 돌렸다.

“몰라. 엄마는 바보야.”

“루베르. 누가 이랬어, 응?”

“말 안 할 거예요.”

단단히 토라진 듯 보이는 모습에 세실레는 깊게 한숨 쉬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였다.

결국 세실레는 아까의 기세를 꺾고 루베르를 달래기 시작했다.

“루베르. 누가 이랬는지 말해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할게.”

“괜차나요. 나는.”

“괜찮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니.”

하지만 루베르는 말만 빙빙 돌렸다. 애당초 상처를 보여줄 생각도 없었는지 제 손으로 소맷자락을 내리기까지 했다.

얼굴에 서린 낭패감을 보니, 예상에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를 눈치챈 세실레가 곧장 말을 이었다.

“왜 그러니? 비밀이었던 거야?”

“…….”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루베르를 보며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반응을 보니 확실해졌다.

‘원래 말할 계획이 없던 거야.’

세실레는 상처가 가려진 새하얀 소맷자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게 숨기려는 이유가 뭘까.’

세실레는 루베르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을 추려 보았다.

황궁엔 황후가 루베르를 아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신으로 받들어지는 황후를 적으로 돌리는 멍청이는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루베르가 그 이유를 숨길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세실레는 생각을 마치곤 루베르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푸르른 청안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실레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아르베우타가 그랬어?”

“아, 아니요.”

그 순간 세실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루베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졌다.

“아니면 됐어. 이만 가서 쉬렴. 디젤라에게 사과하는 건 잊지 말고.”

“……네.”

루베르는 주저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도 영 내키지 않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다른 길로 빠지지 말고 어서 신전으로 돌아가라는 듯한 세실레의 냉엄한 눈빛에 루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신전으로 돌아갔다.

루베르가 떠나자마자 세실레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눈빛을 보면 거짓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정황을 보아하니 루베르의 상처는 아르베우타가 낸 것 같았다.

기실 황궁에서 루베르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도 그뿐이긴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만두진 않을 거야.’

세실레가 입술을 물었다.

모든 사건의 뒤에 아르베우타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몰라도 이번엔 도를 넘었다.

시퍼렇게 든 멍. 잔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시녀들이 다가올 새도 없이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어느새 하늘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

황제의 집무실은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간 미뤄둔 일이 많았기에 야근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집무실에선 열띤 논의가 한창이었다.

“남부 지방은 얼추 정리되는 모양입니다.”

“그럼 이제 중앙 귀족들만 남은 건가.”

조용한 말소리 사이로 옅은 잉크 내가 흩어졌다.

한창 보고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비서가 내민 서류를 확인하던 아르베우타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서관이 의아하단 낯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이만 됐어. 넌 나가봐.”

“네? 아직 보고할 것들이 산더미입니다만.”

비서관은 옆에 놓인 서류를 흘낏 쳐다봤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최근 황제가 일을 벌여놓은 탓에 처리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오늘도 퇴근하지 못할 걸 각오했다. 그런데 벌써 나가라니.

당황한 비서관이 머뭇거리자, 아르베우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만 나가래도.”

“알겠습니다.”

사나운 음성에 비서관은 망설임 없이 집무실을 벗어났다.

하지만 아직 오늘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일정을 떠올리던 비서관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그 순간 눈앞에서 은색 빛무리가 흘렀다. 새하얀 빛이 섬광처럼 터지는 것과 동시에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둑한 복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얼결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어버릴 정도로.

“헉.”

비서관은 숨이 멎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실레는 비서관을 지나쳐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 했다.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대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리지만 않았다면.

그곳에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르베우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이야?”

“…….”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의 헛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주제에 이리 태연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세실레는 한소리 해줄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말이 없는 걸 보니.”

“…….”

“진짜 날 보고 싶어서 온 건가.”

어이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 뒤 단단히 독설을 해주어야 하는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얼 말하려 했던지는 까먹었고 대신 이상한 감정이 휘몰아 닥쳤다.

저를 응시하는 눈빛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래. 아르베우타가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에 세실레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세실레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자신이 지금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밧줄에 얽매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저 뻔뻔한 얼굴에 욕을 퍼부어주고 싶은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세실레가 불안한 표정으로 아르베우타를 올려다봤다. 원망과 좌절로 얼룩진 눈동자에 그의 얼굴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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