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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5화 (4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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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하셨죠? ……여기 오래 있었더니 귀가 먹었나.”

“감옥에 계속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쟈르스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지금 그게 자신 앞에서 할 말이냐는 듯, 책망하는 시선이었다.

원망 어린 눈빛을 마주한 아르베우타의 낯이 씁쓸했다.

그 또한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세실레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다른 수를 써서라도 쟈르스를 꺼내주려 했다.

하지만 아직 그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내 열쇠가 세실레였듯, 디젤라의 열쇠가 쟈르스라면.’

그렇다면 디젤라는 어떤 식으로든 쟈르스를 구하러 올 터였다. 그리고 곁에 두려고 하겠지.

게다가 디젤라는 세실레를 격의 없이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세실레가 웃었어.’

오랜만에 본 미소였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실레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쟈르스의 협조가 필요하겠지.’

아르베우타가 쟈르스를 가만 내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쟈르스는 아르베우타가 자신에게 무언갈 시키려 한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저를 끼워 넣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도와줘.”

“아, 싫습니다.”

완고한 대답과는 달리 쟈르스는 아르베우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여지를 두는 모습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도 웃음이 어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는 아르베우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못 이긴 척하며 돕고는 했다.

그게 쟈르스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리고 아르베우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이야. 이번만 도와주면 내가,”

“……됐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그만하시고 용건부터 말씀하십시오.”

쟈르스가 혀를 내둘렀다.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 쟈르스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흔쾌히 입을 열었다.

“디젤라의 비위 좀 맞춰줘.”

“……네?”

“부탁하지.”

아르베우타는 부연 설명 없이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쟈르스는 아르베우타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다가 뒤늦게야 철창을 잡고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세실레는 공문을 곱게 접어 창밖으로 던졌다.

예쁘게 접힌 종이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다 힘을 잃곤 뜰에 툭, 떨어져 버렸다.

초록빛 잔디 위로 내려앉은 하얀 종이가 이질적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디젤라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언니, 뭐 해?”

“음, 일?”

“일?”

태연한 대꾸에 디젤라가 입을 떡 벌렸다. 시녀가 전달해준 공문으로 종이접기하는 언니를 봤기 때문이다.

‘황제가 보낸 공문이랬는데.’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것일 게 분명했다. 언니는 그걸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고는 창밖에 던진 것이다.

‘정말 어지간히도 싫은가 봐.’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중요한 걸 막 다뤄도 되는 건지.

디젤라는 한참을 고민하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비록 친하지 않은 언니라지만 막상 눈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바람이라니.’

심각한 사안이었다. 디젤라가 혼자 끙끙 앓고 있는데, 세실레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렀다.

“……종이접기, 루베르가 보고 싶어.”

“오시라 할까요?”

“그래.”

세실레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 하나가 방을 나섰다.

그제야 궁금증을 꾹꾹 눌러 참던 디젤라가 입을 열었다.

“루베르가 누군데?”

“내 아들.”

“무, 뭐어?”

디젤라는 질겁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고도 모자라 험악하게 귀를 후벼팠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봐도 언니가 한 말은 바뀌지 않았다.

아들이란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던 디젤라가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

“그럼 그 새끼가 애까지 낳고 바람을 피웠단 말이야?”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디젤라를 보며, 세실레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에 디젤라가 다시금 소리쳤다.

“황제! 황제가 바람피우는 거 아냐?”

“……그래?”

“바람피워서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세실레가 눈만 깜빡였다. 디젤라는 침묵하는 언니가 답답해서 죽기 직전이었다.

도르데아가 난리 치는 디젤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디젤라에게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디젤라가 민망한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그러니까 그냥 신관이라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근데 왜 엄마라고 해요?”

“……전해 듣기론 폐하께서 신관에게 의식을 주셔서 그렇다는데, 저도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잘…….”

도르데아가 말끝을 흐렸다. 대신관이 무어라 설명해주긴 했지만 상식 선에선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쨌거나 황후께서 그리 불러도 괜찮다 하셨으니 따를 뿐이었다.

도르데아의 깊게 팬 미간을 바라보던 디젤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귀할멈같이 생겨선, 모르는 것 하나 없는 줄 알았더니.’

주워듣기로 도르데아를 황후궁의 살림꾼으로도 부른다고 했다. 도르데아는 이 황후궁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그런 그녀도 잘 모를 정도면 분명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꼭 알아내고 말겠어.’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밖에서 낳은 아이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언니 아이일지도.

‘그러니까 순순히 아들이라고 하지.’

그것도 아니라면, 저렇게 넋을 놓고 사는 이유가 남의 자식을 키워야 해서인 건가?

‘그래서 신관으로 속여 키우는 걸지도?’

디젤라가 그럴듯하게 생각을 덧붙여가는 사이, 무언가가 떠오른 도르데아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세렌디 신을 어머니로 모시는 분들이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디젤라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세상에 신을 믿는다고?’

당장 자신조차 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듣기로 제국민들의 신앙심도 바닥에 가깝다고 했다.

‘저건 또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람.’

디젤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이유 따위, 고민 선상에 넣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민에 잠긴 채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언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못 믿겠어.’

어찌나 생각에 빠져들었던지 웬 꼬마가 달려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루베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랜만에 세실레의 부름을 받고 서두르는 중이었다. 당연히 눈앞의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보기 좋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야!”

“……어? 죄송합니다.”

디젤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제 치맛자락을 붙잡는 손길에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곤 언니와 꼭 닮은 인형 같은 어린아이를 발견하곤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웬 꼬맹이지?”

“……꼬맹이 아니거든!”

“뭘 꼬맹이구먼. 이렇게나 작은데.”

디젤라가 반쯤 장난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덕분에 새하얀 볼이 비죽비죽 움직였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워서 절로 헤픈 웃음이 흘렀다.

디젤라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

“근데 너 우리 언니랑 엄청 닮았다.”

그 말에 기분 좋아진 루베르가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웅? 나? 닮아쪄요?”

“응, 엄청 닮았어.”

“정말?”

“응.”

꼭 직접 낳은 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세실레와 아이는 판박이였다. 그 순간 디젤라의 머릿속에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들이 있다고 했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친 디젤라가 아이를 보며 물었다.

“너, 네가 설마 루베르야?”

디젤라의 물음에 루베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저를 아세요?”

“응, 어쩌다 보니 들었어.”

“그렇구나.”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언뜻 보기엔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지만 디젤라는 루베르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길 아느냐고 물어봤을 때랑 발음이 달라진 것 같은데.’

처음의 어눌했던 발음이 또박또박하게 바뀌었다. 게다가 어찌나 눈빛이 날카로워졌는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을 정도였다.

‘뭐야?’

디젤라는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문지르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루베르를 향해 소리쳤다.

“너 누구야?”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뻔뻔한 대꾸에 디젤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언니더러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기분 나쁜데 외모까지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곱지 않은 시선이 루베르를 향했다. 루베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디젤라를 빤히 응시하다,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누나.”

“왜.”

“누나도 닮았어요.”

디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랑 닮았다는 건가? 이건 좀 기분 좋네.’

언니는 누가 봐도 예뻤다. 아니, 예쁘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예뻤다. 그런 언니와 닮았단 말을 들으니 괜스레 어깨가 으쓱였다.

기분이 좋아진 디젤라가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뭐, 너도 좀 귀여워.”

“으웅? 나 귀여워요?”

“응. 귀여워.”

“흐음, 뭐, 고마워요.”

루베르는 그 말을 끝으로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세실레가 있는 곳이었다.

그를 흘끔 바라보던 디젤라가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담?”

애 같지 않은 애였다. 게다가 저 정도 나이대면 정말 언니의 아이일 리도 없었다.

“이상한 애네.”

어쩐지 좀 섬뜩해서 디젤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

루베르는 디젤라가 모퉁이를 돈 것을 확인하곤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디젤라의 외양을 떠올렸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곱슬곱슬한 붉은색 머리카락. 같은 배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인간의 얼굴.

그것이 혈육이라며 세실레에게 붙어있는 것의 정체였다.

‘우습기도 하지.’

루베르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닮았다고 하자 기뻐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더욱 폭소가 터졌다.

“주제를 알아야지.”

그녀는 세실레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닮았을 리가 없었다.

고귀한 존재와 한낱 인간 사이에 유사점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대신 그녀는 아르베우타와 닮았다.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점에서 똑 닮았어.”

하여간 우스운 인간들.

루베르는 조소를 금치 못하곤 문을 열었다.

그 앞엔 세실레가 엄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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