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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어째선지 아르베우타라는 존재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평소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두 손을 매만지던 세실레가 눈을 느른하게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내가 말이 너무 심했나.”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자꾸만 죄책감이 들었다. 그의 표정과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조금 더 상냥하게 말했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세실레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찻잔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에 도르데아가 서둘러 달려왔다.
“폐하!”
“……난 괜찮아.”
그녀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도리어 몽롱하던 정신을 다시금 일깨웠을 뿐이다.
‘정신 차리자.’
인제 와서 그에게 연민 따위를 느껴서 어쩌자는 건지. 세실레는 헛숨을 삼켰다.
도리어 아르베우타를 본심을 의심해야 했다.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야.’
루렝브렌 산맥에서 만났던 그 날, 그는 분명히 괴물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그땐 성녀가 황궁에 남지 않아 생긴 부작용 중 하나라 치부하고 넘겼지만,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든 알아본 데다, 이번에는 디젤라까지 불러냈다.
‘분명 숨기는 게 있는 거야.’
고민에 잠겨 있던 세실레는 멀리서 대기 중이던 도르데아를 불러들였다. 얼마 전 흘리듯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세실레는 도르데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녀의 가족 중에 친위대에 속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서?”
“네, 그렇습니다.”
“데리고 와. 물어볼 게 생겼으니.”
도르데아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명을 듣자마자 안절부절못하는 시녀 애를 앞에 데려다 놓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도르데아가 곧장 고개를 돌려 말했다.
“이델라. 가서 말씀드리렴.”
“네, 네?”
“너희 오빠가 친위대에서 근무한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자랑을 했잖니?”
도르데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엄했다.
도망칠 여지가 없는 상황에 이델라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저, 그게요…….”
이델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세실레는 명을 물리지도 독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찻잔을 기울이며 이델라라고 불린 시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고요하고도 정적인 시선이 싸늘했다. 그러자 겁먹은 이델라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끅, 저. 그게, 그러니까. 제가 히끅.”
“……,”
“잘, 잘못했어요, 흑.”
“……어?”
그제야 무섭게 가라앉았던 세실레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잠시 다른 생각이라도 했던 듯, 아까완 달리 온화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에 이델라의 떨림도 차차 가라앉았다.
두 사람을 마냥 지켜보던 도르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내내 침묵을 지키던 세실레가 입을 열었다.
“겁먹지 말고 천천히 말해도 돼.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만 해줘.”
그제야 이델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건 정말 극소수만 알고 있는 거랬어요. 극비에 부쳐야 한다고. 저…… 황후 폐하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세실레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델라가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세실레는 도리어 심란해졌다.
예상대로 아르베우타는 자신이 황궁을 떠난 후, 종종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종종 황후궁을 찾으셨대요. 비밀리에. 황후궁 시녀인 저희도 모를 정도로 말이에요.’
‘괴물의 형상을 했다고 들었어요.’
이델라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비주기적으로 발작했단다. 발작 후에는 어김없이 괴물의 형상을 띄었다고도.
처음엔 피부색만 변색 되더니 나중엔 신체에 변형이 생겼다.
그러다 알케덴에선 완전히 괴물의 모습이 되었단다.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고 했어요. 마굴에 있는 몬스터도 그렇게 거대하진 않을 거라고.’
이델라의 설명에 세실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물이라면 저도 한 번 본 적 있었다.
‘루렝브렌 산맥에서 나를 안고 있었지.’
그렇다면 괴물로 변한 진짜 이유가 뭘까. 게다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비밀리에 황후궁을 찾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악령과 관련된 거라면, 도리어 황후궁과 멀어지려고 할 텐데.’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세실레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실레가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던 차, 옆에서 타박이 들려왔다.
“아이참! 언니. 또! 인상 찌푸린다.”
디젤라가 찌푸린 미간을 꾹 눌렀다. 그제야 세실레가 심각한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러다 무심코 황제가 기거하는 궁을 바라봤다.
‘가서 물어볼까.’
충동적으로 든 생각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가 순순히 진실을 알려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
디젤라는 유례없이 풍족한 생활에 만족했다.
평생 먹어보지 못한 것을 먹었고 걸쳐보지 못한 것을 걸쳤다.
언니는 베푸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시녀들은 모두 친절했다.
문제라면 단 하나, 언니였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디젤라는 바삭하게 튀긴 코코넛 도넛을 입에 문 채로 세실레를 관찰했다.
언니는 꽤 많은 시간을 저렇게 보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죽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꼭 시간을 죽이는 것 같단 말이야.’
그저 멍하니, 죽은 듯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죽지 못해 산다는, 나이든 노인네처럼.
‘역시 황제 때문인 걸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그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걸 가진 언니가 고민할 거리라곤 그 외에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사과도 했는걸.’
물론, 언니는 황제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마 황제가 도저히 용서받기 힘든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순하디순하다는 언니가 그렇게까지 용서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디젤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바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디젤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천하의 난봉꾼 녀석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길래 착한 언니가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하기야 제국의 황제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하아, 이거 정말 문제네.’
디젤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엄마. 지금 황태후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디젤라는 입안 가득 코코넛 도넛을 우물거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 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러다 디젤라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언니, 일전에 방 앞에 있던 사람 말이야.”
“방 앞에 있던 사람? 아, 쟈르스 말이야?”
“응, 그 사람은 지금 어딨어?”
디젤라가 괜스레 볼을 긁적였다. 비록 자신을 방에 가뒀다지만, 감옥에 가두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신경 쓰였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상황이 어찌 되었든 쟈르스는 디젤라가 황궁에 들어오도록 도왔다. 쟈르스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바깥을 전전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생긴 것도 제법…….’
디젤라가 괜스레 손을 꼼지락거리던 사이, 잠시 침묵하던 세실레가 말을 이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
“뭐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디젤라는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다, 제 목소리에 도리어 놀라버렸다.
***
불을 밝힌 집무실 안, 내내 종이 뒤적이는 소리만 들리는 곳에 누군가가 조용히 인기척을 드러냈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시종은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제 앞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자취에 서류가 가려지고서야 아르베우타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시종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디젤라는?”
“황후궁에서 머무는 중이십니다.”
“별달리 이상해 보이는 점은 없던가?”
“네, 딱히……아,”
무언가 생각난 듯 보이는 시종의 표정에 아르베우타가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에 잠시 망설이던 시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디젤라 님께서 황후 폐하께 쟈르스 님의 거처를 묻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디젤라가?”
“네, 유독 관심을 보이셨답니다.”
아르베우타는 잠시 고민하다,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일단은 내버려 둬.”
“알겠습니다.”
시종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책상 앞, 한구석을 차지하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다시금 은은한 불빛이 집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바깥에선 비바람이 몰아치는지 나무 뒤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바닥에 내리꽂힌 번개가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고서야 그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쟈르스라. 어쩌면 그가 디젤라의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아르베우타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쟈르스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
차고 축축한 감옥. 쟈르스는 서늘한 한기가 올라오는 바닥에서 모포를 끌어안다, 참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몇 번을 눈 비비고 봐도 이곳은 여전히 삭막한 감옥이었다.
현실을 재차 확인한 쟈르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렀다.
“……내 꼴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게다가 원인 제공자인 황제는 코빼기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래서야 쓰고 버리는 패나 다름없었다.
“밖에 나가기만 해봐. 내가 다시는…….”
“다시는 뭐?”
“……다시는 이런 일에 동참하나 봐라.”
허공에서 아르베우타와 쟈르스의 시선이 얽혔다.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고생 많았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절 이용하실 생각 마십시오.”
날카로운 대꾸에 아르베우타가 너털웃음을 뱉었다. 그러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쟈르스를 보며 말했다.
“왜 일어나지?”
“네?”
“그대는 아직 구금상태인데.”
쟈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귀가 먹었나 싶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팠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짜증 어린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