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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레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디젤라의 의지는 굳건해 보였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세실레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니?”
“응, 없어도 잘만 살았는데 뭐.”
디젤라의 답변에 아르베우타의 입매에 웃음이 맺혔다.
‘당분간 안심해도 되겠군.’
디젤라는 세실레에게 적대감이 없어 보였다. 만약 각성 직전이었으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못했으리라.
한결 마음을 놓은 그를 향해 매서운 물음이 날아왔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하실 말씀이 뭐였어요?”
“……?”
“할 말이 있다고 자리 만들어 달라고 한 거잖아요.”
디젤라가 팔짱을 끼곤 그를 바라봤다. 누구나 혹할 법한 재산 목록은 미련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뒤였다.
그것을 흘낏 보던 아르베우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작에 이런 시간을 가졌어야 했을 뿐이지.”
“거짓말. 말 돌리지 말고 말해요. 제가 일부러 자리 만들어준 거잖아요.”
거침없는 말투에 아르베우타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호탕한 성격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디젤라의 성격에 도움을 받았다. 아르베우타는 애써 얻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선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언니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해. 그래서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어.”
“왜요?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내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거든.”
“……도대체 무슨 실수를 저질렀길래. 설마.”
디젤라가 안색을 굳혔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선 상종하지 못할 무뢰배가 그려지는 중이었다.
부부간의 싸움이 일어날 이유야 빤했으니까.
디젤라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디젤라가 충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내가 죄인이라서, 그래.”
디젤라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건 분명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자기 입으로 저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 큰일인가 봐.’
디젤라가 흘끗 고개를 돌려 세실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피곤하다는 듯 내리감긴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를 바라보던 디젤라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뭔지 몰라도 잘못하셨으면 제대로 용서를 비세요.”
“됐어. 그만해.”
그 순간 세실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기 싫다는 듯 찌푸려진 눈동자가 사위를 훑었다.
그녀는 곧 저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서려 하는 동생을 보며 말했다.
“디젤라,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야.”
세실레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디젤라는 마지 못 해 아르베우타를 향해 물었다.
“괜찮아요?”
그러나 아르베우타의 시선은 여전히 세실레를 향해 있었다.
‘그런 소릴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황실에서 황후는 그리 힘이 없다고 들었다. 엄마가 내내 그런 말을 하며 언니를 걱정해서 잘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완전 반댄걸.’
디젤라가 고개를 갸웃할 무렵, 아르베우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만 가보지.”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냉랭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디젤라가 혀를 찼다.
‘문제가 많네, 많아.’
도통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부부였다.
***
아르베우타는 디젤라와 헤어지고 숲으로 들어섰다.
그는 사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품에서 펜듈럼을 꺼냈다.
펜듈럼은 마기에 물들기는커녕 전보다 하얬다. 게다가 흠집도 더욱 커졌다.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움직여도 되겠어.’
아르베우타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숲속을 거닐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다기보다는 무언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 웬 인영이 튀어나와 아르베우타의 멱살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예상했다는 듯,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그의 웃음에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베르가 쓰러져 있었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실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인 데다, 세실레가 그런 일을 할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아르베우타 뿐이었다. 매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그라면, 추잡한 수를 써서라도 루베르를 제압했을지 몰랐다.
테레사는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적갈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형형한 눈초리는 당장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 이글거렸다.
그러나 아르베우타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뱉어낸 뒤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빠르기도 하군. 벌써 보았나.”
“벌써 보았냐고? 무슨 생각이냐고 묻잖아.”
분노와 놀람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마주한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는 곧 제 멱살을 틀어쥔 손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언제까지고 너희들 손바닥에서 놀아날 줄 알았나.”
“……뭐?”
“언제고 자비만 구걸할 줄 알았느냐고.”
이 가는 소리와 함께 붉은색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그간 삭이고 삭여왔던 분노가 터질 듯 넘실거리며 정원을 가득 메웠다.
아르베우타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새하얀 펜듈럼이었다.
펜듈럼은 금이 가다 못해 깨지기 직전이었다.
겨우 형체를 유지하는 펜듈럼을 발견한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리는 차, 아르베우타가 미련 없이 펜듈럼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 순간 테레사의 눈동자에 황망한 빛이 어렸다.
“이건.”
“너는 상상도 못 하겠지.”
아르베우타가 구둣발로 서슴없이 펜듈럼을 짓밟으며 읊조렸다.
“네가 하는 짓이 주인을 괴롭히는 짓이라는 걸.”
“그게 무슨 소리야!”
“잘 생각해. 네 주인이 누구인지. 누구의 말에 따라야 하는지.”
아르베우타는 할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려 숲을 빠져나갔다. 볼 일은 그것뿐이었다는 듯이.
테레사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바닥에 내던져진 펜듈럼을 보았다. 펜듈럼은 깨지기 직전이었다.
“어째서?”
펜듈럼은 세렌디 신이 만든 성물이었다. 추악한 아르베우타로부터 세실레를 지키기 위해 만든 성물은 결코 깨지지 않았다.
그런데 펜듈럼에 금이 간 것도 모자라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테레사가 침음을 삼켰다.
아르베우타가 행동을 재개할 때부터, 아니 세실레의 영혼에 균열이 가 있을 때부터 테레사는 무언가 변동이 있었음을 눈치챘다.
그녀의 예측을 증명하듯 루베르가 나타났다.
세렌디 신이 직접 보낸 루베르의 등장. 신의 개입이 필요할 정도로 위급한 때라는 뜻이다.
‘설마 황제가 각성을 끝마친 건가.’
그래서 정말로 세실레를 빼앗아가려는 건가, 염치없게도.
테레사가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
“……컥!”
루베르는 제 숨통을 쥐며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를 대신관이 진정시켰다.
“괜찮으십니까.”
“이게 무슨 일…….”
말을 이어가던 루베르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기절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린 탓이었다.
루베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하하, 말도 안 돼. 이 내가, 인간에게 졌다고?”
루베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작고 가녀린 손이었다.
이제껏 이 어린 몸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어려진 모습 덕에 인간들은 쉬이 그를 받아들였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어리석은 인간다웠다. 그들과 어울렸더니 자신 또한 그리된 모양이었다.
루베르의 입에서 비소가 흘렀다.
‘너무 마음 놓고 있었나.’
그가 어린 모습인 이유는 힘을 봉인했기 때문이다.
지상에 내려오기 위해선 땅의 법칙을 따를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지상에서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새로운 신, 세실레가 아니고서야.
“……그런데 내가 졌단 말이지.”
그 사실이 상당히 충격이었던지 루베르는 한참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어 그가 한쪽 입꼬리를 크게 끌어당겨 웃었다.
“아하하하! 그놈, 드디어 미친 모양이로군.”
경쾌한 웃음 끝에 조소가 어렸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어 루베르의 눈동자에 잔혹한 빛이 머물렀다.
“차라리 잘 됐어.”
루베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르베우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아르베우타의 힘이 강해졌다는 건, 세렌디의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다.
즉, 세렌디와 세실레의 세대교체가 일어날 때가 왔다는 뜻이었다.
세실레의 권능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온전한 신으로서 눈을 뜨면, 루베르 또한 지금과 비견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될 테였다.
‘그때가 되면 네 녀석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지.’
신이 되고 나면 감정이 무뎌졌다. 신의 막대한 지식과 의식을 물려받으면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사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아르베우타는 잊힌다.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 세실레에겐 불필요하므로.
‘그땐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궁금하네.’
루베르의 입꼬리가 묘하게 휘었다.
과연 모든 걸 포기할 각오로 사랑했던 여자가 기억을 되찾고도 그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면, 자신을 개미보다도 못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걸 알면, 아루베우타는 어떻게 나올지.
‘넌 끝이야. 애송아.’
그러니 루베르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인간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사후세계조차 가지 못하는 인간. 마지막 발악 정도는 봐줄 용의가 있었다.
***
침실로 디젤라가 찾아왔다.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선 디젤라가 세실레를 보며 물었다.
“언니, 언니! 괜찮아?”
“응, 괜찮아.”
세실레는 태연하게 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평온한 모습에 디젤라는 그저 깊이 한숨을 내쉬고만 말았다.
“괜찮다니, 됐지만.”
디젤라는 흘깃 세실레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언니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전보다 표정이 딱딱해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잔을 드는 손길은 여전히 우아했고 생각에 젖은 눈동자는 청명한 호수 빛으로 반짝였다.
‘뭐, 내가 끼어들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디젤라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저가 끼어들어 어쩔 수 없다면 괜한 참견은 하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이만 쉬러 갈게.”
“그래. 푹 쉬어, 디젤라.”
곧 방문이 닫혔다. 세실레는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고서야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손끝이 떨렸다. 머릿속에선 아까 전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