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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2화 (4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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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오른 정원엔 차양이 드리웠다. 원목 테이블 위로 티팟과 찻잔 세 개가 놓였다.

각각 황제와 황후, 그리고 디젤라의 것이었다. 전부 디젤라의 부탁으로 일궈진 자리였다.

테레사는 이 자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무슨 억지를 부리려고.’

테레사만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황후궁 정원에 자욱하게 낀 안개마저 아르베우타와 디젤라를 피해 바닥을 드러냈다.

기이한 광경에 사위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세실레조차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발밑을 응시했다.

세실레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세실레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테레사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다 더는 보지 못하겠다는 양, 몸을 돌려 버렸다.

빈자리를 디저트를 가져온 시녀들이 채웠다. 그녀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머.”

얼결에 감탄사를 내지른 시녀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무례를 범했단 생각에 뒤늦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실레는 고개를 숙이는 시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침착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세실레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아르베우타를 향해 속삭였다.

“안개조차 당신이 싫은가 봐요.”

“……그런 것 같군.”

아르베우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투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디젤라는 당황했다.

안개도 그렇지만, 둘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 싸웠나 봐, 어떡해.’

디젤라는 한참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쓰는 입꼬리가 어색하게 꿈틀거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나도 잘 모르겠어.”

세실레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후로 정적이 이어졌다.

‘분위기가 좋아지긴커녕 더 어색해졌잖아!’

이대로는 안 됐다. 디젤라는 애써 말을 이으려 노력하며 횡설수설했다.

“그럼 뭐지? 이건 언니 힘은 아닌가 봐.”

“응, 내가 그런 건 아냐.”

“그렇구나! 되게 신기하다. 자연 현상인 건가?”

“자연 현상일 리가…….”

무어라 더 말하던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황후궁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제국민들에겐 상식이었다.

정원을 둘러싼 안개가 신이 흘린 눈물이라는 신화는 거리의 아이들도 알았다.

하지만 디젤라 그러한 기본 상식조차 몰랐다.

‘평생 고립되어 살았으니까.’

세렌디테 가문은 모든 것을 통제당했다. 그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교육을 받은 세실레와는 달리, 디젤라는 완전히 무지했다.

겨우 글이나 읽고 쓸 줄 아는 정도였다.

‘전부 나 때문이지.’

디젤라는 언니가 성녀라는 이유로 세상과 고립되어 살았다. 그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미워할 만도 했네.’

세실레는 씁쓸한 사실에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디젤라. 어떻게 가문 밖을 나온 거야?”

세실레가 편지를 확인했을 땐, 저택으로 마차를 보낼 테니 은밀한 장소에서 만나자고 적혀있었다.

디젤라는 그 사실에 화가 나서 황궁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저택은 온통 경비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실레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디젤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디젤라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야…… 편지를 받고 화가 나서 몰래 나왔지.”

“몰래?”

“응, 경비가 허술해졌길래.”

디젤라가 슬쩍 눈치를 봤다. 이후로 경비를 강화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디젤라의 말을 듣고 있던 세실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손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이런. 미안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네.”

“……뭘?”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디젤라 앞에서 가족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게다가 디젤라가 했던 말도 내내 마음에 밟혔다.

‘어머니가 내내 울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테다.

‘어머니가 여린 편이긴 하지.’

그런 사람을 두고 험한 말을 했다며 멋대로 몰아세웠다. 화를 낼만 한 이유야 있었지만, 미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나란 사람은…….’

어머니가 당시 화를 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를 걱정했기 때문이지.’

그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밉고 원망스러웠으니까.

이제야 미뤄놓았던 죄책감이 설핏 고개를 들었다. 세실레가 낯을 굳혔다.

그녀를 지켜보던 디젤라가 세실레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언니?”

“……응?”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애매한 대답에 디젤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디젤라 또한 언니에게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의외였지.’

황족이라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사람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게다가 디젤라는 황태후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들어 알고 있었다.

어린 세실레를 데려가겠다며 매일 같이 가문에 압박을 넣었다고 했다.

‘악독한 사람 밑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겠지.’

가문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을 게 분명하다.

보지 않아도 빤했다. 그래서 디젤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언니 탓만은 아니잖아.”

“아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가 아니면 뭔데? 언니는 너무 생각이 많아. 그러니까 맨날 얼굴을 찌푸리고 있지.”

직설적인 말에 세실레가 고개를 들었다. 크게 떠진 눈을 마주한 디젤라가 호통쳤다.

“뭐해. 정신 차려. 왜 그렇게 넋 놓고 있어?”

“으응.”

“지난 일이야 아무려면 어때? 언니도 바빴으니까 잊고 산 거잖아.”

세실레는 침묵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바쁘기는커녕 홀로 유유자적했다.

‘그걸 모르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만약 세실레가 이 년 동안 가족들을 잊고 혼자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알면, 디젤라도 태연하게 반응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세실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르베우타가 입을 열었다.

“멋진 동생이로군.”

“갑자기 뭐예요? 그보다 언니가 옆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동안 당신은 뭐 한 거죠?”

“……나는,”

“아, 시끄러워요. 들을 가치도 없는 변명이겠지, 뭐.”

디젤라가 손을 휘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디젤라를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내내 손 한번 대지 않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 디젤라는 다시 고개를 틀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언니를 눈에 담았다.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말을 심하게 한 탓도 있었다.

‘흥, 내가 뭐 거짓말했나.’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에게 막말한 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인데, 내가 심했나?’

결국 내내 고민하던 디젤라는 참지 못하고 와락 소리쳤다.

“아, 몰라. 하여튼 여기 분위기 왜 이렇게 침침해?”

거친 손길에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갑작스레 찾아든 정적에 디젤라가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황제도 언니도, 별다른 동요 없이 차만 마셨다.

참다못한 디젤라가 입술만 달싹일 무렵, 내내 침묵하던 세실레가 입을 열었다.

“분위기 전환할 겸, 아까 못한 얘기부터 할까?”

“아까 못한 얘기?”

“응. 도르데아. 가서 재산 목록 좀 가져와 줘.”

“네.”

그녀의 명에 멀찍이서 대기 중이던 도르데아가 자리를 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디젤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만 지키고 앉았다.

시녀가 서류를 가져오는 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다. 묘한 정적이 영 적응되지 않는지 디젤라는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들썩이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도르데아가 돌아왔다.

도르데아에게서 서류를 전달받은 세실레가 디젤라에게 목록을 내밀며 물었다.

“앞으로 가문에 적용되던 규제들은 모두 사라질 거야. 그리고 여기서 가지고 싶은 거 골라서 가져가.”

“이게 뭔데?”

서류를 바라보던 디젤라가 입을 벌렸다. 그곳엔 그녀가 평생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것들로 가득했다.

듣도 보도 못한 희귀종으로 가득한 동물원부터 책에서만 보았던 유명 휴양지.

다이아몬드가 나온다던 광산에 집채만 한 유람선,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국보까지.

“이, 이게 뭐야.”

평생을 갇혀서 살아온 디젤라는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세실레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네가 갖고 싶은 거 다 가져.”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초연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디젤라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하지만 세실레는 디젤라의 충격을 눈치채고도 웃을 수 없었다. 이건, 하나의 시험이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갖고 싶은 걸 가지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르베우타가 어떻게 반응할지 재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동요나 불쾌함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세실레가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눈을 맞춰올 뿐이었다.

빤한 시선에 어째선지 몸이 움찔 떨렸다. 그래서 세실레는 화급히 몸을 돌려 버렸다.

그러는 중에도 디젤라는 목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한참이고 서류를 훑다, 더듬더듬 말했다.

“이게…… 다 언니 거야?”

“응.”

“와…….”

벌벌 떨리는 손끝을 보니 놀라긴 놀란 모양이었다. 크게 벌린 입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황후궁에 배치된 예산이 적지 않았다.

지난 이 년간 도르데아가 착실히 챙겨준 데다, 황태후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세실레의 몫으로 분배한 덕이었다.

그건 모두 세실레의 소유였고 언제든 디젤라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젤라는 힘없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거 다…….”

“다 가져도 돼.”

“다 필요 없어.”

뜻밖의 발언에 세실레가 침묵했다. 그러나 디젤라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 이런 거 받으려고 찾아온 거 아니야. 돈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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