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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1화 (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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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우타를 발견한 루베르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네가 루베르로군.”

둘은 동시에 서로를 알아봤다.

아르베우타는 루베르가 처음이었지만, 은백색 머리칼과 청안은 유독 눈에 띄었다.

게다가 루베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언뜻 보기엔 성별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아르베우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닮았군.’

루베르는 세실레의 어릴 적과 닮아있었다.

일곱 살, 세실레가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선 나이와 비슷해서 더더욱.

제게 시선을 빼앗긴 아르베우타를 보며 루베르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너는 도둑놈이로군.”

아르베우타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에 대신관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그러나 그의 말은 이어진 논쟁에 금방 묻혀버렸다.

“당장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야?”

“여긴 제국령이고 나는 황제다.”

“지금 내 앞에서 인간 나부랭이의 규율을 읊는 거야?”

허허, 대신관은 머리를 긁적이고만 말았다.

그러곤 여전히 까칠한 모습을 보이는 루베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인간의 규율에 매일 필요가 없는 신관의 신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지상이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인간들의 법을 존중해줘야 했다.

그에 대신관이 다시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직 어리고 배움이 짧아…….”

“뭐라는 거야.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

“예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대신관을 보며 루베르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하늘에 닿아보지도 못한 신관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지.’

그렇게 치면 아르베우타는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자신이 만만찮은 상대란 걸 눈치채고 섣불리 대하지 않는 걸 보니.

‘하기야 저건 인간이 아니지.’

루베르는 혀를 찼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제 앞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건만.’

아르베우타는 루베르가 흘리는 살기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루베르와 소모적인 감정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설전을 벌이는 대신, 곧장 원하는 바를 말했다.

“부탁할 게 있다.”

“네가? 나에게? 드디어 미쳤군.”

“디젤라가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봐 줘.”

“내가 왜?”

“세실레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너희들은 세실레를 위하니, 당연히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식의 물음에 루베르가 조소했다.

‘이래서 저 잘난 줄 아는 인간들이란.’

루베르는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아르베우타의 앞에 가서 섰다. 그러곤 불쑥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의 멱살을 잡아챘다.

루베르의 입에서 지독히도 낮은 음성이 흘렀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조잘대는 입부터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러나 험악한 말투에도 아르베우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눈썹을 치켜뜬 채 날카롭게 읊조렸다.

“……너는 세실레를 지키러 온 게 아닌가?”

“아니? 나는 엄마를 데려가려고 왔을 뿐이야.”

“그래?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했군.”

아르베우타의 눈동자에 잔악한 빛이 맴돌았다.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은밀하게 피어올랐다.

힘은 루베르의 팔을 강하게 움켜 챘다.

“너…….”

루베르가 당혹을 금치 못한 채 긴 속눈썹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이윽고 청명한 푸른빛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더니, 루베르가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대신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를 가만 응시하던 아르베우타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비밀로 하지.”

아르베우타는 곧장 걸음을 뗐다. 루베르에게 볼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사용가치가 없어졌다.

아르베우타에게 있어, 세실레를 데려가려는 존재는 모두 적이었다.

그는 말을 잃은 대신관을 내버려 두곤 숲길을 걸었다. 발아래로 버석하게 밟히는 나뭇가지의 소리가 들렸다.

숲을 빠져나오면 새하얗게 우뚝 선 황후궁이 보였다.

아르베우타는 제자리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웅장한 성이 위용을 드러냈다.

손 닿을만한 거리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르베우타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워 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한참이고 성을 응시하는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디젤라가 아르베우타의 앞에 섰다.

“너 누구야. 설마…… 황제?”

깜빡깜빡, 순진한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세실레는 갑자기 사라진 디젤라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해라도 졌으면 찾기 쉬울 텐데.’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대낮이었다. 결국 길을 헤매던 그녀는 물어물어 디젤라가 황후궁의 정원으로 향하더란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황후궁의 정원은 굉장히 넓었다. 게다가 신전과 이어지는 길은 숲이었다.

이 숲은 황궁을 둘러싼 산맥과도 이어져 있어, 자칫 잘못했다간 길을 잃기 딱 좋았다.

더욱 초조해진 세실레는 기사들까지 동원해 디젤라를 찾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람.”

슬슬 불안감이 올라오던 차, 다행히도 저 멀리서 붉은색 머리칼이 보였다.

옷차림을 보니 디젤라가 분명했다. 세실레는 반색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도대체 어디 있었냐며, 길을 잃으면 어쩔 뻔했냐고 꾸중하려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디젤라! 찾았잖아.”

오래간만에 뛰었기 때문인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겨우 호흡을 고른 세실레가 고개를 드니, 앞에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뭘 이런 걸 다 줘?”

입가에 웃음이 머물기도 잠시, 세실레는 제 눈앞에 선 사람을 보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찌나 놀랐던지 손에 쥔 손수건도 그대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를 바라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있어요?”

날카로운 물음에 아르베우타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멋대로 궁을 침입한 것은 그였으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그를 보던 세실레가 곧장 외궁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나가세요.”

칼 같은 요구에 디젤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언니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언니. 이래도 돼? 이 사람 황제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으음, 그렇지만 둘이 부부잖아.”

어리둥절한 디젤라를 보고 있으니 세실레 또한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부부라니.’

헛웃음이 흘렀다. 아무래도 디젤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사이가 좋지 않은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두 사람 간의 싸움은 둘의 일이니까.

‘적당히 돌려보내자.’

세실레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르베우타는 눈치 좋게 상황을 파악하곤 웃음을 삼켰다.

‘운이 좋군.’

디젤라의 덕을 보게 되었다. 아르베우타가 디젤라를 향해 그린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말인데, 부탁 좀 하나 해도 될까?”

그의 제안에 디젤라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요?”

“그래. 모처럼 처제를 만났으니 함께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허락 좀 받아주면 고맙겠어.”

디젤라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의문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되물었다.

“허락을요? 누구에게요?”

“그대의 언니에게.”

“네? 우리 언니요?”

디젤라가 고개를 돌려 세실레를 보며 물었다.

“언니, 그렇다는데?”

“허튼 생각 말고 가시라고 전해줘.”

“저……, 그렇다는데요?”

중간에 낀 디젤라의 표정이 묘했다. 갑자기 어린애 싸움에 끼어버린 기분이었다.

‘뭐야, 둘이 싸운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게다가 황제는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데 언니가 거절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나보고 도우라는 건가 보다.’

생각을 마친 디젤라가 눈을 빛냈다. 이런 일이라면 충분히 도울 의사가 있었다.

디젤라는 한 손으론 세실레의 손을 다른 손으론 아르베우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가 좋대요, 그렇지?”

디젤라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자 세실레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주춤하는 그녀를 디젤라가 다시금 잡아끌었다.

황제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야 나라가 바로 설 리 없었다.

지금은 제국의 대의를 우선시하자며, 디젤라는 희생정신을 불태웠다.

“그렇지, 언니?”

세실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얼굴엔 체념한 기색이 역력했다.

***

황후궁의 시녀들은 뜬금없는 상황에 모두 당황했다.

“황제 폐하랑 황후 폐하께서 같이 계신다고?”

소식을 전해 들은 도르데아조차 놀라서 입을 벌렸다.

차를 내오라니, 준비하긴 했지만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드디어 두 분 사이에 변화가 생기는 건가.’

황제 부부의 사이가 좋아지는 건 도르데아 또한 바라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갑자기 자리를 만드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사이가 좋지 않으셨는데.’

도리어 싸움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도르데아는 애써 불안을 삼켰다.

그들 중 놀라지 않은 사람은 테레사뿐이었다. 그녀는 멀찍이서 동태를 살피기만 했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테레사는 세실레의 가족들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득에 눈먼 인간들.’

그저 육신을 준 혈육에 불과하면서 그들은 언제나 과한 것을 요구해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험한 짓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디젤라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세실레의 명을 거부하고 둘 사이를 떼어놓을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유의 깊게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가뜩이나 황후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으신데.’

테레사는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켜보는 수밖에는.

테레사는 체념한 채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곤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원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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