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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0화 (40/110)

40

디젤라가 세실레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너 짜증 나.”

“…….”

“아.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 그러지 않으면 또 날 가둘 테니까 말이야.”

비꼬는 듯한 말투에 세실레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디젤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디젤라는 자신이 그녀를 가뒀다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해야 풀면 그만이었다. 세실레는 디젤라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누가 널 이리로 데리고 왔어?”

“……뭐?”

“혹시 협박이라도 받은 거니?”

덤덤한 목소리에 디젤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걱정하는 척이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디젤라의 말에 세실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디젤라는 세실레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니 순진한 표정을 짓는 것이 가증스럽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언니의 얕은수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디젤라는 세실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자신이 황궁에 온 이유를 입에 담았다.

“무슨 소리냐니? 나더러 만나자고 편지를 보내 놓고 황궁으로 부르지 않은 이유는 뭔데? 왜, 나 같은 건 황궁에 발도 들이기 싫어?”

디젤라의 외침에 세실레는 침묵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머리가 멍했다.

세실레가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디젤라가 조소했다.

“아, 이런 말 하면 나도 엄마처럼 황궁 밖으로 내쫓으려나?”

디젤라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서버렸다.

이 이상 언니와 얼굴을 마주했다간 주먹이라도 날려버릴 것 같았다.

‘할 말은 다 했어.’

디젤라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며 겨우 분을 삭였다. 엄마를 봐서 이 정도로 참는 거였다.

‘이만큼 참았으면 대단한 거지.’

디젤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충분히 어른스럽게 굴었다고.

그러니 엄마가 걱정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던 차 정체불명의 힘이 그녀의 발목을 감아쥐었다. 아무리 애써도 움직일 수 없었다.

꼼짝없이 굳어있자니 어느샌가 언니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왔는지 모를 정도로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언니를 발견한 디젤라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러나 세실레는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쥐며 물었다.

“그건 오해야.”

“뭐?”

“나는 그저, 그게, 그냥…….”

세실레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곤 눈만 두어 번 깜빡였다. 맑은 청색의 눈동자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수어 번 말을 골랐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상황이 대강 예측되긴 했다. 편지는 황제가 보냈을 것이다.

쟈르스가 나선 것을 보면 황제가 수를 쓴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당장은 디젤라를 다독일 때였다.

‘그렇지만 어떻게?’

분명 미운 동생이었는데, 저 때문에 고생한 모습을 보니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를 내쫓았단 말은,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침묵하는 세실레를 응시하던 디젤라가 겨우 여유를 되찾곤 물었다.

“뭐가 오해라는 건데? 언니가 날 가둔 게? 아니면 엄마를 내쫓은 게? 말해봐. 들어는 줄 테니까.”

그러나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디젤라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만 말았다.

“……미안해.”

“미안하다면 다야? 그 일로 엄마는 밤마다 울었어!”

“정말 미안해. 나는…….”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변명이 참으로 초라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상처가 될 줄 몰랐다거나 하는 말은 세실레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그런데 서슴지 않고 그런 말을 입에 담으려 하다니, 일전의 미워하던 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나도 똑같네.’

세실레는 변명 대신 사죄를 입에 담았다.

“……미안.”

고작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디젤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이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제법 당황스러웠다.

언니가 어디서 버릇없이 구느냐며 화를 낼 줄 알았다. 이대로 무사히 저택에 돌아가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언니는 놀라울 정도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꼭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미안해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까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화가 누그러졌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해졌다.

‘나도 너무 착하다니까.’

잠시 투덜거린 디젤라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언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과했으면 됐어.”

하지만 여전히 언니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네 언니가 원체 마음이 약하잖니.’ 따위의 말을 세뇌하듯 들어서 일지도 몰랐다.

기억도 안 나는 언니, 초상화로나 간간이 본 언니, 식 날 말도 제대로 못 나눠본 언니가 이제야 현실 속 사람처럼 다가왔다.

항상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기지 좀 말라며 콧방귀를 뀌고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네.’

하여간에 유약한 사람이다. 디젤라는 엄마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디젤라는 겨우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됐어. 이제 고개 좀 들어. 황후라면서 그러고 있어도 돼?”

“……응.”

디젤라는 겨우겨우 고개를 드는 언니를 쳐다보았다.

화가 가라앉으니 그제야 언니의 모습이 눈에 오롯이 들어왔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를 벌해야 할 정도였다. 그림보다 실물이 더 예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언니는 예외였다.

가까이서 조목조목 뜯어보니 더욱 그랬다.

몸에서 나는 향기도 어찌나 감미로운지 꽃밭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이건 반칙 아냐?’

보면 볼수록 다른 세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성녀니 뭐니 하는 호칭으로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걸친 액세서리도 모두 고급이었다.

뒤에 따라온 시녀들의 충성심은 어찌나 대단한지 모두 저를 불손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감히 네가 우리들의 주인을 괴롭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저 부러웠다. 언니는 부족한 거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런 주제에 뭐 이리 슬퍼 보이는지.’

디젤라가 투덜거릴 무렵, 발을 잡아채던 힘이 사라졌다.

그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된 디젤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어깨를 으쓱이고만 말았다.

‘뭐, 착각한 거겠지.’

***

아르베우타는 한발 늦게 디젤라의 소식을 접했다. 쟈르스의 구금 소식도 함께였다.

“……해서 황후궁에 두 분이 머물고 계십니다.”

“뭐?”

“쟈르스 님은 구금상태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지금에야 파악했습니다.”

시종의 보고에 아르베우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쟈르스가 보고를 하러 오지 않더라니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디젤라가 세실레를 만났다니.’

그렇다고 세실레에게서 디젤라를 빼 오기엔 늦었다.

세실레에게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말해주어도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초조해진 그가 시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황후궁에 사람 풀어서 정보 수집해. 지금 분위기 어떤지도.”

“아, 그렇지 않아도 파악했습니다만…… 별문제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다행히 아직 디젤라의 상태가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아르베우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전으로 향했다. 디젤라가 각성하기 전에, 방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

루베르는 높게 솟아오른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울창하게 솟은 나무 잎사귀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었다.

옅은 바람이 코끝이 스쳤다. 숲속에 울려 퍼지는 새소리는 자장가처럼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하암, 졸려.”

루베르가 크게 하품했다. 어찌나 크게 하품했던지 눈꼬리엔 찔끔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한가로운 상황과는 달리 나무 아래는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한동안은 신전에만 있으라는 황후의 명이 내려온 뒤, 대신관이 밀린 수업을 하겠답시고 수업 일정을 빽빽하게 잡은 것이다.

문제라면 성실한 선생의 욕심과는 달리 루베르는 수업만 시작하면 도망치기 바쁘다는 점이었다.

결국 수업이 시작하고 나서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그를 찾기 위해 대신관이 직접 나섰다.

“루베르 군! 도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슬슬 지쳤는지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어찌나 루베르에게 시달렸는지 대신관의 입술은 퉁퉁 부르터 있었다.

결국 대신관은 막힌 목을 부여잡곤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쩜 이리 기척을 잘 숨기는지.”

그가 한탄처럼 중얼거릴 즈음,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쳤다.

숨이 트이는 기분에 고개를 든 대신관의 눈에 찬란하게 빛나는 은백색 머리칼이 잡혔다.

“……어어? 거기!”

“쳇.”

대신관을 발견한 루베르가 잽싸게 몸을 피했지만 그를 가만두고 볼 대신관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루베르를 잡아채기 위해 용을 쓰며 나무를 탔다.

그 모습을 발견한 루베르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허억, 그러니까, 수업을, 들어야, 허억.”

“아니. 그런 거 안 들어도 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루베르의 목소리엔 짜증마저 묻어났다.

애당초 자신보다 모르는 사람이 나서서 가르치려 드니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내가 저것보다 몇백 년을 더 살았거늘, 쯧.’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다.

테레사야 세실레를 달로 데려가겠다는 목표가 같다지만 신관들은 아니었다.

막 자유의지를 갖게 된 신관은 평범한 인간과 비슷했다. 어디로 튀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한동안은 이 답답한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것이 못내 지겨워, 혀를 차는데. 멀리서 기분 나쁜 기척이 느껴졌다.

아르베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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