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세실레는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늦은 시간이 되어 달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제야 내내 기다리던 도르데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
“폐하.”
“……어?”
세실레는 한참 뒤에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동자가 멍했다.
도르데아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세실레를 향해 따뜻하게 적신 물수건을 내밀었다.
은은한 캐모마일 향이 퍼지는 것으로 보아 향료를 뿌린 모양이었다.
세실레는 물수건을 조심스레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인 것을요.”
원래라면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라며 웃어넘기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르데아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지.’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기론 꽤 놀랐던 것 같았다.
‘그런데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차분해졌기 때문인지 한결 여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의심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야.’
그제야 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떠올랐다.
후작의 일이 있던 후, 시녀들은 하나같이 숨소리를 죽이며 그녀 곁을 지켰다.
그간의 일을 떠올리던 세실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과찬이십니다.”
세실레의 시선이 도르데아를 향했다. 조금 전의 흐릿한 눈빛과는 달리 선명한 시선이었다.
그를 눈치챈 도르데아의 입가에도 가느다란 웃음이 맺혔다.
도르데아는 괜한 말을 얹지 않았다.
게다가 비테르 후작은 평판이 몹시 나빴다. 도르데아와 같은 황태후 파였음에도 서로 말 한 번 섞지 않을 정도였다.
그 모든 이유를 떠나서라도 황후는 제국에 있어야만 했다. 지난 이년 간 황후의 공백으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유가 있으셨겠지.’
그러니 도르데아는 다른 이들의 입도 단단히 틀어막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시녀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들은 도르데아의 뜻을 알아차리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데아는 안심하곤 다시금 세실레를 살폈다.
세실레의 시선은 외궁에 향해 있었다.
한참이나 밖을 응시하던 세실레의 입에서 의문이 흘렀다.
“……디젤라가 왜 저기 있지?”
세실레는 다시 한번 외궁을 살폈다. 디젤라가 분명했다.
오래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디젤라는 혈연이었다. 다른 사람하고 헷갈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하는 양을 보아하니 디젤라는 방에 갇힌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동생이 감금당한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저런 짓을 벌인 거지?’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누가 물을 새도 없이 곧장 방을 나섰다.
***
“야! 씨, 문 안 열어?”
쾅!
디젤라는 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단단한 문은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타격음은 밖에 선 기사들에게 들릴 정도로 컸다.
안쪽에서 일어나는 소동에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안색이 점점 희게 질려갔다.
이제껏 기사의 본분을 지키며 묵묵히 맡은 일을 해온 그들이었다.
이번에도 안쪽에서 무슨 일을 벌어지든 무시하라는 명령에 따라 오직 침묵으로만 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지 슬슬 의문이었다. 그들은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지?”
“아무래도 보고해야 할 것 같은데.”
개중 한 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당초 그들은 방 안의 여자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방문 앞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안쪽엔 식사와 생필품이 가득하니 무슨 말로 애원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데 뒤에선 애원이 아니라 협박이 들려왔다.
“야! 앞에 사람 있는 거 다 알아. 이 나쁜 놈들. 사람을 굶겨 죽이려고 해!”
내지르는 목소리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갇힌 내내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댔으니까.
앞을 지키던 기사 둘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한 명은 가서 보고하고 오자는 뜻이었다.
마침내 기사 하나가 발을 떼려던 차, 갑자기 그들 앞에 쟈르스가 와 섰다.
그는 안경을 끌어 올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근무지 이탈?”
“아, 아닙니다!”
“그럼 뭐지? 교대시간은 아직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쟈르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사를 훑었다.
선연한 눈초리에 기사가 몸을 움츠리자 쟈르스가 혀를 찼다.
“됐어. 비켜봐.”
그는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정중한 손놀림으로 노크했다.
디젤라는 바깥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입을 다문 지 오래였다.
쟈르스는 잠시간의 시간을 두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디젤라 양. 일전에 뵈었던 쟈르스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들어오세요.”
대답과 동시에 무슨 짓을 해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열렸다.
디젤라는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며 조용히 팔짱을 꼈다.
애당초 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 황궁에 감금시켜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감히 날 물 먹여?’
디젤라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젠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속지 않겠다는 결연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 결심은 곧바로 풀려버리고 말았다.
쟈르스가 갑자기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며 사죄해온 탓이었다.
“이런 식으로 멋대로 일을 진행해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정말 면목 없습니다.”
“……네? 아, 아녜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어디서 거짓말을 하냐며, 멱살을 잡으려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리어 평생 마주한 적 없는 정중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디젤라는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바깥의 대화로 유추해 볼 때 황궁에서도 어지간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공손한 사과를 받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디젤라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곤 입을 뗐다.
“……그래서 우리 언니는요? 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잖아요.”
디젤라의 당돌한 요구에 쟈르스가 곧장 답했다.
“물론입니다. 대신 그전에 만나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
“만나야 하는 사람?”
“네.”
도대체 그게 누구냐고 묻는 듯 디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쟈르스가 대답하려는 찰나,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누군지 나도 궁금한데.”
귀에 익은 목소리에 쟈르스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세실레는 당황한 쟈르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녀는 쟈르스에게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확고히 하라고 경고했고 그는 세실레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배신하다니.’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애당초 그를 믿지 않았으니까.
쟈르스가 배신한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 기회를 차버린 것은 그였다.
이 이상의 자애는 필요 없을 터였다.
세실레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쟈르스를 감옥에 가둬.”
“네, 알겠습니다.”
상황이 정리되고서야 세실레는 디젤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이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도리어 의아하기만 했다.
‘갑자기 왜 온 걸까?’
세실레가 말없이 디젤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디젤라가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바락 화를 냈다.
“뭐, 뭘 봐? 지금 내 차림이 이렇다고 무시하는 거야?”
“……그럴 리가.”
정확히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세실레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디젤라.”
무심한 인사에 디젤라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
세실레는 디젤라를 황후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 다음 그녀가 입을 옷과 머물 침실을 내주었다.
디젤라가 준비를 하는 동안 세실레는 응접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도르데아. 가서 다과 좀 준비해 줘.”
“네, 폐하.”
도르데아가 방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안내하던 시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으로 보아 디젤라가 멋대로 군 모양이었다.
곤란해하는 시녀를 물린 세실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구나.’
옛 기억을 떠올리는 행동에 얼핏 웃음이 흘렀다.
어떤 일이 있었건 어릴 적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께가 따스해졌다.
세실레가 무어라 인사말을 전하려던 차, 갑자기 디젤라가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언니!”
“그래.”
세실레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태연자약하다고 여긴 디젤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날 가두고 저렇게 태연한 모습이라니.’
엄마 일로도 실망했었지만, 직접 겪으니 분함이 더했다.
이런 모욕을 겪고도 언니를 그리워했던 엄마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저택이 아니라 황궁이었다. 엄마의 당부가 있어서라도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디젤라가 겨우 분을 삭이며 씨근대자 세실레가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와서 앉으렴.”
차분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왜 황궁에 왔는지, 어쩌다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따위는 조금도 궁금해 보이지 않았다.
친동생이 아니라 남을 대하는 것 같은 모습에 남아있던 정마저 뚝 떨어졌다.
‘저건 언니도 아니야.’
디젤라는 어릴 적에 세실레와 헤어졌다.
그때 디젤라는 겨우 다섯 살이었던 탓에 어릴 때의 세실레가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엄마에게 전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엄마의 기억 속 언니는 꼭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착하고 여리고 아름답다고 했다. 조용했고 똑똑했으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고도 했다.
온갖 칭찬으로 가득한 평을 반은 거짓이라 여기면서도 반절은 믿었다.
황궁에서 가끔 만날 때도 잘 꾸며진 그녀는 정말로 엄마 말처럼 완벽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직접 보니 전혀 아니었다. 언니란 존재는 얼굴은 예쁠지 몰라도 참으로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가족을 이리 홀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디젤라는 자리에 우뚝 서선 세실레를 가만 노려보았다.
독기 어린 시선에 세실레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