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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38화 (3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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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테 가문에서 기댈 혈연은 세실레 하나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쟈르스는 조소가 흐르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황태후의 힘이 약해졌단 소식이라도 들은 모양이로군.’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대로 혈연 운운하며 황궁에서 이것저것 뜯어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황후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일로 황후의 심기가 더욱 어지럽혀진다면, 황제가 그에게 책임을 물을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이번 일을 마친 뒤 받아낼 은광과 휴양지가 여전히 눈에 아른거리므로.

쟈르스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떡하지요? 지금은 황후 폐하께서 업무가 많으셔서 만나 뵙기 힘들 겁니다.”

“업무? 그런 건 모르겠고 난 언니를 만나야겠어요.”

참으로 당돌한 여자였다. 곤란하게 되었다며 속으로 욕설을 삼키던 차, 쟈르스의 눈앞에 익숙한 편지가 들이 밀어졌다.

거기엔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때마침 디젤라가 쟈르스의 앞에 편지를 들이밀었다.

“이걸 봐요. 내가 왜 언니를 만나고 싶은지 이해하죠?”

쟈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쟈르스는 디젤라를 외궁의 호화로운 방에 데리고 온 다음, 문을 잠그고 감시를 붙였다.

실상은 디젤라를 감금한 셈이었다.

그러곤 곧장 황제에게 디젤라의 방문 소식을 전했다.

아르베우타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황궁 밖에서 만나자고 보냈건만.”

심란해 보이는 황제를 보며 쟈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어쩌기는.”

아르베우타는 잠시 말을 멎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제를 확실히 알려주어야지.”

아르베우타는 고개를 돌려 쟈르스를 응시했다.

“네가 날 좀 도와야겠다.”

쟈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곤란한 일이 분명했다. 이 이상 업무를 떠맡는 건 사양이었다.

그새 황제의 뜻을 파악한 쟈르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안 해요. 저는 안 할 겁니다.”

“아니. 이미 늦었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게 편지를 가져와 보고한 시점부터 날 도울 수밖에 없게 되었단 뜻이네.”

쟈르스의 입에서 욕설이 흘렀다.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 탓이었다.

쟈르스는 황후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그런데 황후의 여동생을 외궁에 가둔 데다, 디젤라의 방문 사실을 황제에게 먼저 알렸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황후가 자신을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아르베우타는 쟈르스의 욕설을 관대하게 넘겼다. 대신 지체하지 않고 바로 명령을 내렸다.

“디젤라는 이대로 외궁에 둬. 아직 두 사람이 만나서는 안 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르베우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이전보다 더욱 하얗고, 크게 금이 가 있는 펜듈럼이 들려있었다.

‘점점 힘을 잃는 것 같은데.’

저번 세실레를 안았을 때도 펜듈럼은 잠잠했다.

정말로 저주가 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도할 수는 없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는 허리를 굽히는 시종을 보며 말했다.

“황후궁으로 갈 거다.”

***

조용하던 황후궁에 소란이 일었다. 황제가 막무가내로 황후궁을 방문한 것이다.

당황하여 물러선 시녀들과는 달리, 테레사가 그를 막아섰다.

순식간에 기 싸움이 벌어졌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분위기는 전쟁터 한복판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베우타가 사나운 표정으로 테레사를 노려봤다.

“비켜.”

“못 비킵니다.”

“비키라고 했어.”

둘 사이에 끼어들 만큼의 담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탓에,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만 갔다.

아르베우타는 제 앞을 막아서는 테레사를 보며 비꼬듯 중얼거렸다.

“주인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고집만 세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르베우타가 무어라 말하든 테레사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런데 유달리 반응하는 것을 보니, 테레사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약점을 잡아낸 아르베우타가 적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오늘 황후가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지. 거기에 네 책임이 조금도 없을까?”

“…….”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게 네 임무 아닌가? 그런데 왜 자리를 비웠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는 듯, 명료한 비난에 테레사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테레사는 세실레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비단 안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 심지어는 영혼까지. 그녀가 온전히 달로 돌아올 수 있도록 곁에서 돌보는 것이 테레사의 의무였다.

그런데 실패했다. 심지어 세실레가 갑자기 기력을 잃은 이유조차 정확히 몰랐다.

완벽한 실책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침묵하는 테레사를 밀치고 침실로 이어지는 통로에 들어섰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배어났다.

“그동안 네가 지킨 게 뭐가 있는지 잘 생각해봐.”

테레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세실레는 침실에 가만 앉아있었다.

사위를 모두 물린 탓에 곁을 지키는 사람은 도르데아뿐이었다.

숨소리 하나 흐르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정적인 분위기에 침실은 숨이 막힐 만큼 고요했다.

그러는 중에 세실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입에서 한숨과도 같은 말이 흘렀다.

“……시끄러워.”

“시끄러우십니까?”

도르데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침실은 시끄럽긴커녕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런데 시끄럽다니?’

도르데아가 의아해하는 차, 세실레가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부산스러운 소음이 나더니,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쾅-.

머리를 뒤흔들 만큼의 큰 소음의 뒤를 묵직한 발소리가 따랐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걸음도 조급해졌다. 종래엔 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걸음의 주인이 낚아채듯 세실레를 잡아챘다. 어디론가 가버릴까 두렵다는 듯 다급한 몸짓이었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고개를 돌렸을 무렵엔 세실레는 이미 아르베우타에게 사로잡힌 뒤였다.

단단한 손이 허리께를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불쾌한 듯 세실레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날카로운 물음이 이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놓아줄 생각도, 이 상황에 대해 변명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

기가 찬 세실레가 그를 밀어내려는 차, 아르베우타가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괜찮아.”

“…….”

“다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

짜증스레 대꾸하던 세실레가 입을 다물었다.

‘설마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건가?’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날카로운 말을 뱉어내려던 목구멍은 이유 없이 먹먹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알고 왔든, 그녀의 동요를 바랐다면 성공이었다.

지금 세실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까.

그러는 중에도 이유 모를 다독임은 계속되었다.

아르베우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후작의 일을 약점 삼아, 다시금 자신을 멋대로 휘두를 생각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경계하고 의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수록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졌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치 숨통이 트이는 듯한 감각에 세실레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보았다.

아르베우타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어째선지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꼭 그가 더 괴롭다는 듯이.

‘이상도 하지.’

세실레는 아르베우타를 훑던 시선을 거두곤, 깊이 심호흡했다. 들끓던 불안이 가라앉자 다시금 이성이 머리를 잠식했다.

‘정신 차려. 그가 날 걱정할 리가 없잖아.’

지금 와서 걱정하는 척 해봤자 속지 않았다.

그는 지금 연기를 하는 게 분명했다.

예전처럼 권력으로 누르는 것이 힘들어 보이니, 비겁한 술수를 쓰려는 모양이다.

세실레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연기 잘하네요.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그 순간, 그녀를 얽매던 단단한 팔에 힘이 빠졌다.

그러자마자 세실레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리 센 힘은 아니었지만 아르베우타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아르베우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씁쓸해 보이기도 했고 단념한 듯 보이기도 했다.

머쓱한 웃음을 짓는 입매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어떠한 것도 그녀의 관심사는 될 수 없었다.

세실레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 들켜버렸네.”

“…….”

“맞아요.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은백색의 속눈썹이 팔랑였다. 붉은 입술이 가느다랗게 올라가며 웃음을 머금었다.

“잘됐네요. 당신이 좀 수습해줘요. 말 안 해도 그렇게 했겠지만, 그렇죠?”

“……물론이야. 나는 그저.”

네가 걱정돼서. 그 한마디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아, 아르베우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해봤자, 세실레는 비웃고 말 것이다.

아르베우타는 그 모습을 그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그러쥐며 뒤로 물러섰다.

그를 잠시 위아래로 훑던 세실레가 도르데아를 보며 차게 명령했다.

“폐하께서 충격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구나. 도르데아. 네가 좀 모셔다드리렴.”

하지만 도르데아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후가 사람을 죽였다니. 믿기 힘든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다행이라면 아르베우타가 먼저 분위기를 파악하고 뒤로 물러섰다는 것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그냥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어. 후작의 일이 모두 해결됐다는 소식도 전할 겸.”

“……이 일로 기회를 잡았다고 좋다며 달려온 건 아니고요?”

차가운 대꾸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맺혔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어 답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아르베우타는 방을 나섰다. 굳게 닫힌 문을 잠시 응시하던 세실레가 머리를 짚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알케덴에서도 그랬고 변신을 하고 황도에 나갔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럴 때마다 자신이 안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세실레는 미간을 찌푸리고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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