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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니까요?”
“이거 봐. 조금만 뭐라 하면 또.”
“정숙하고 기품있게 굴게요, 어머니. 됐죠?”
태연한 대답에 공작부인의 입가에도 웃음이 맺혔다. 세실레와는 달리 디젤라는 타고나길 씩씩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세실레가 바닥에 넘어지고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는 아이였다면, 디젤라는 넘어지고 나서 바로 뛰어다녀 다친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
뒤늦게 흠뻑 피에 물든 드레스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를 생각하니 가슴께가 뻐근했다. 공작부인의 머릿속엔 여전히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언제 이렇게 다 커서는.’
또다시 눈물이 글썽이는 그녀를 보며, 디젤라가 다시금 와락 소리쳤다.
“아! 엄마. 또 울어요?”
“우, 울긴.”
“어휴, 됐어요. 준비하게 나가세요.”
디젤라는 겨우 어머니를 내보내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어머니의 끈질긴 요구에도 끝끝내 보여주지 않았던 편지를 펴들었다.
거기엔 마차를 보낼 테니, 비밀 장소로 와 달라는 말이 간곡하게 적혀 있었다.
정말이지, 뻔뻔하게도 말이다.
“비밀 장소로 오라고? 어이없어.”
편지를 쥔 손에 힘이 실렸다. 디젤라가 이를 아득 갈며 중얼거렸다.
“자기들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디젤라는 씩씩대다, 정문을 가만 노려보았다.
세렌디테 공작 가는 항상 경비가 삼엄했다. 말이 좋아 경비지 실상은 그들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바깥과 철저히 분리해 허튼 생각 따윈 품지 못하도록. 아예 자유를 앗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아니란 말이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다. 대강 가늠하기로는 이 년 전부터 그랬다.
그때부터 경계가 허술해지기 시작하더니 요새 들어선 없느니만 못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경비가 허술해졌다.
부모님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디젤라는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 저택에 갇혀 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야반도주라도 할 생각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디젤라의 눈에 경비의 변화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나를 불러?’
황실에서 먼저 디젤라를 찾을 줄은 몰랐다.
디젤라는 드높은 철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저 멀리 새하얀 대리석으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황궁이 보였다.
‘내가 얌전히 따를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지.’
자신을 초대하면서 비밀 장소로 부르다니. 그 오만함부터가 문제였다.
디젤라는 더는 어리지 않았고 부모님처럼 굽신거릴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먼저 황실로 찾아가, 기선제압을 할 생각이었다.
명목뿐이라지만, 공작 가문의 영애인 디젤라가 황실에 발 디디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디젤라는 그 자리에 가만 서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곧 교대시간이었다.
그때가 되면 남몰래 철문을 넘어, 황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
세실레는 우두커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벌써 저러기를 몇 시간째였다.
그러나 시녀들은 세실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루베르 님이 오시면 괜찮아지시겠지.’
와 같은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세실레가 루베르의 방문마저 거절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곧 테레사와 도르데아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황후의 침실 옆, 작은 방에 두 사람이 모여 섰다.
둘 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르데아는 인상을 찌푸렸고 테레사는 조금 멍해 보였다.
테레사가 넋을 놓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던 탓에 도르데아의 입에서도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짐작 가는 게 없단 말이지.”
“네. 도저히.”
“……본성 쪽이 조금 시끄럽던데, 혹여 그 일과 연관이 있으려나.”
도르데아가 지나가듯 던진 말에 테레사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테레사가 더 자세히 말해 보라며 도르데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도르데아는 머뭇거리며 말을 아꼈다. 쟈르스 비서관이 입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챈 테레사가 도르데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말씀하십시오!”
그제야 도르데아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황후궁 사람에게는 비밀이라며 입을 다물던 걸 겨우 캐냈다네. 듣기론 얼마 전에 비테르 후작이 의문의 살인을 당했다는 모양이야. 워낙 흉한 일이고 해서 부러 입을 열지는 않았네.”
도르데아의 말에 테레사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테레사가 절박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그 일이 벌어진 게 정확히 언제랍니까.”
“그게…… 이틀 전이라던가.”
테레사가 기억을 되짚었다. 세실레가 홀로 밤 나들이를 나갔던 때도 같은 날이었다.
그날 밤의 일을 곱씹어 보던 테레사가 안색을 굳혔다.
‘직접 상황을 살펴봐야겠어.’
테레사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사라진 테레사를 보며 도르데아 또한 인상을 굳혔다.
‘설마 흉악범죄에 황후 폐하도 엮여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도르데아는 괜한 불안을 덜어내려, 가느다란 숨을 뱉어내었다.
***
황궁 앞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자신이 황후의 여동생이라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온몸이 흙투성이였고 차림새도 변변찮았다.
게다가 성정이 어찌나 고약한지, 경비 몇이 막아서도 막무가내였다.
“하아, 진짜! 내가 황후의 여동생이라고요! 디젤라 르 세렌디테!”
“죄송합니다만, 신분을 증명할 게 없으면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에겐 황후가 공작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성녀를 배출한 공로로 얻어낸 반쪽짜리 작위라지만, 평범한 이들에겐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신분이었다.
그런데 디젤라의 차림새는 허름하다 못해, 저잣거리 평민보다 못했다.
게다가 증거랍시고 내미는 편지도 문제였다.
‘누가 황제 폐하의 친서를 저렇게 구겨?’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황후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니 이제는 이런 무모한 수를 시도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경비가 다시금 디젤라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들여보내 줘요. 나와서 확인해보라 하면 되잖아요!”
디젤라의 외침에 문지기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렀다.
“누구? 설마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요?”
대놓고 조롱하는 투에 디젤라가 이를 갈았다.
황궁의 경계가 삼엄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틈이 없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녀의 손엔 황제의 친서까지 들려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니.
디젤라는 경비에게 말하기를 포기하고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개구멍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에서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는 듯, 경비병이 손을 내저었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십쇼. 개미 한 마리 지나갈 틈도 없으니까.”
“누가 뭐래요? 재수 없어.”
디젤라가 짜증 난다는 듯 대놓고 문지기를 노려봤다.
시건방진 태도에 슬슬 경비도 짜증이 나려 하고 있었다.
“……뭐? 재수? 지금 뭐라 그랬어?”
“어머,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얄밉기 짝이 없는 태도에 경비가 위협적인 태도로 앞으로 나섰다.
그 틈을 노리고 있던 디젤라가 잽싸게 안으로 파고들려던 차였다.
“아악!”
“……?”
하필이면 막 문을 나서는 이에 의해 디젤라의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됐다.
가뜩이나 좁은 통로를 웬 남자가 막아선 것이다.
디젤라의 입에서 욕설이 흐르려던 차, 믿기 힘들 정도로 정중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디젤라 양이 아닙니까.”
갑작스러운 호명에 디젤라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엔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디젤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절 아세요?”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의 친동생분이시지요?”
그의 물음에 디젤라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경비병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히익!”
“흥, 내가 뭐랬어요?”
구명줄을 찾은 디젤라의 콧대가 높아졌다.
경비병은 자신도 미쳤다던 황태후처럼 되는 건가 싶어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
“딸, 꾹. 용, 용서를…….”
그를 가만 지켜보던 쟈르스가 대강 상황을 파악하곤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귀한 분을 알아뵙지 못하고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씨로 이해해 주시지요.”
상냥한 어투였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목소리에선 교양이 느껴졌다.
그에 디젤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물론이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쟈르스는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것과 동시에 디젤라를 훑었다.
디젤라의 행색은 참으로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드레스는 흙이 묻어 얼룩덜룩했고 귀족 영애다운 치장을 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신분을 증명할만한 거리도 없을 터였다.
‘그런 게 있을 리도 없지만.’
세렌디테 공작 가의 일원에게 주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말이 공작 가문이지, 실상은 일개 남작 가문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세렌디테의 일원은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외부 출입도 할 수 없었다.
바깥에 나가 사교 활동을 하거나 드레스를 맞춰 입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성녀가 생을 다하면 가문의 생명도 끝났다. 귀족 위를 박탈당한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황태후가 힘을 잃은 지금, 그렇게까지 가문을 핍박할 사람은 없겠지만 아직도 경비는 여전했다. 따로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저택 밖으로 나온 거지.’
답은 금방 도출되었다. 디젤라의 행색을 보아하니 몰래 도망친 게 분명해 보였다.
‘보안이 허술해진 모양이군.’
그러나 디젤라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쟈르스는 사뭇 친절한 척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디젤라가 당당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