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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기운이 성스러운 힘에 반발하며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그 과정을 이겨내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회개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갓난아기의 피라니.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을 터였다.
아기의 고통으로 얼룩진 혈액엔 부정한 기운이 가득할 테니까.
부정한 기운이 신력을 억누르니, 당장 증상이 나아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더욱 큰 고통을 가져올 게 분명했다.
아르베우타는 혀를 차며 일갈했다.
“더 볼 것도 없군. 사건은 적당히 수습하고 덮어.”
“알겠습니다.”
아르베우타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갑자기 침실 문이 열리더니 한 기사가 부복하며 말했다.
“용의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뭐라던가.”
“그는 빼앗긴 아기의 친부로 거액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고리대금업자가 빚을 덜미로 아기를 데려가 버리자 술에 취해 주점에서 하소연했다더군요. 그런데 주점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청년이 그날 밤 아이를 찾아다 주었답니다.”
“……청년?”
“네. 갈색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아르베우타가 입매를 굳혔다. 순간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 세실레도 분명 같은 차림을 했었다. 갈색 머리에 까만 눈, 준수한 외모를 지닌 청년의 모습을.
‘그럴 리가.’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기사가 연거푸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이였다는군요. 게다가 아이를 돌려받았을 땐 어찌나 피부가 질려 있었던지 꼭 죽은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
“아기의 목덜미에 치명적인 상처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차차 사라졌답니다.”
이어지는 말에 아르베우타는 점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은 완벽 범죄, 일치하는 인상착의, 게다가 죽기 직전의 아기가 되살아나는 기적.
이 모든 일이 가능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세실레.’
어쩐지 그날 밤 안색이 좋지 않더라니,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이 있었다.
‘이 일이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돼.’
아르베우타가 기사를 보며 명령했다.
“그자는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다.”
***
세실레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든 것은 아니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런 끔찍한 짓을 해놓고 편히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사람을 죽였어.’
지난밤 벌어진 일을 떠올리니 손끝이 벌벌 떨렸다.
이름뿐인 성녀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살인을 저질렀다.
죽어가는 아이를 무사히 빼낼 방법은 많았다. 그럼에도 후작을 죽여버린 것은 그녀의 자의였다.
갓난아기의 목에 실을 매달아 조여, 피를 한 방울씩 모으던 그 잔악함에 질려버렸다.
도저히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는 흉측한 모양새에 숨이 막혔다.
그 순간,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추악한 벌레로 보였다. 아니, 벌레보다도 더럽게 느껴졌다.
죽여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역한 악취가 나는 벌레 이하의 무언가.
세실레는 순간 참지 못하고 능력을 사용하고 말았다.
‘너 같은 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어.’
정신을 차리니, 후작은 죽어 있었다.
그 사실에 절로 몸서리 처졌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억지로 쓰고 있던 성녀라는 가면조차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분이었다.
겨우 그녀를 지탱하던 무언가가 파스스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더는 살아갈 이유도 버틸 힘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자문해보았지만 무엇도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꾸역꾸역 살아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의무감 때문이었다.
‘곧 성녀가 태어나겠지.’
성녀는 보통 이십 년을 주기로 태어났다. 그러니 슬슬 신탁이 내려올 때가 되었다.
새로운 성녀가 태어나면 세실레는 자유였다.
그때가 되면 세실레는 황궁을 벗어날 계획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내가 이능을 얻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에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세실레가 입술을 짓씹었다.
***
황궁으로 돌아온 아르베우타는 곧장 집무실에 앉아 편지지를 펼쳤다.
펜촉에 잉크를 적신 그는 빠르게 편지를 쓴 뒤, 실링 왁스로 단단히 밀봉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는 곧장 시종의 손에 전해졌다.
편지를 전달받은 시종이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보낼까요?”
“세렌디테 가문.”
의외의 말에 시종이 눈을 크게 떴다.
내내 단 한 번도 황제의 입에서 나온 적 없는, 세렌디테의 이름이 영 낯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디젤라에게서 반드시 확답을 받아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시종이 편지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조차 초조했다.
아르베우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책상을 두드리다, 낮게 신음을 흘렸다.
‘성장했어야 할 텐데.’
아르베우타는 이번 혼란이 대륙의 초창기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펜듈럼이 깨진 것도, 후작 살인의 일도, 과거와 지나치게 비슷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세실레가 지상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가리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는 안 됐다. 세실레는 아직 이곳에 있어야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세실레를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디젤라가 필요했다.
디젤라는 아르베우타와 같은 부류였다.
그녀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자, 세렌디 신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각성자였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가는 아르베우타와는 달리, 디젤라는 쉼 없이 환생을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아르베우타는 디젤라를 찾아가, 그녀가 얼마나 각성했는지 살폈다.
‘이번엔 세실레의 여동생으로 태어나서 조금 놀랐지만.’
그러나 디젤라의 힘은 착실히 발전하고 있었다.
펜듈럼이 깨진 지금이라면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이야말로 디젤라를 불러들일 때였다.
‘문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지.’
각성하는 과정에서 이성을 잃은 디젤라가 세실레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아르베우타는 두 사람을 철저히 분리해놓을 생각이었다.
***
황궁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디젤라는 편지를 앞에 두고도 가만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팔짱을 낀 팔은 도통 풀릴 줄을 몰랐다.
그러는 중에 그녀의 어머니가 다가와 디젤라를 재촉했다.
“얘. 뭐하니. 어서 열어보렴.”
종용하는 소리에 디젤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착해빠진 어머니가 참으로 무르기 그지없다며 혀를 차는 것도 동시였다.
‘황궁에서 쫓기듯 저택으로 돌아왔으면서 편지 하나에 절절매다니.’
그날 일을 생각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마 잘난 황실 일원들은 그날 이후로 엄마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조금도 모를 게 분명했다.
“얼마나 잘났길래 가족을 이렇게 대하는 거지?”
디젤라의 투정 어린 음성에 공작부인이 그녀의 등을 때렸다.
질책하는 투에 디젤라가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왜 때려요!”
“얘는. 말버릇이 그게 뭐야.”
“제 말버릇이 왜, 아!”
디젤라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매서운 손에 멍이라도 들었는지 등이 후끈거렸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여전히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변호해 줄 마음이 남은 모양이었다.
“네가 누구 덕에 이렇게 편안히 살 수 있는 건 줄 아니?”
“편안히요? 엄마는 너무 망각이 빠른 거 아녜요, 악!”
다시금 타격음이 방을 울렸다. 디젤라는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씨이. 엄마는 언니만 좋아해.”
“그게 무슨 말이니. 낳아놓고 기르지도 못한 자식, 미안해서 이러는 거지.”
“거짓말.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언니는 똑똑하고 예쁜 데다 곧 황후가 될 몸이라며 애지중지하고 나는 맨날 찬밥 취급, 악! 그만 때려요!”
“얘는. 속이 그렇게 좁으면 안 되는 거야.”
또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공작부인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입술을 꽉 악문 그녀를 보며 디젤라는 고개를 저었다.
“어휴. 알겠어요. 우리 언니도 고생 참 많지. 알겠으니까. 이제 기분 푸세요.”
“……얘는. 내가 언제 화냈다고.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니?”
호기심이 슬픔을 이긴 모양이었다. 냅다 편지로 달려드는 모습에 디젤라는 고개를 저으며 봉투를 뜯었다.
“뭐, 별말 있겠어. 고작해야 안부 인사 정도겠지.”
디젤라가 편지를 펴들었다.
짧은 편지였다. 잠시간의 곁눈질에 모든 내용이 파악될 정도였다.
그를 잠시 읽어내리던 디젤라가 편지를 접어 소매에 감췄다.
수상한 모양새에 공작부인이 재차 그녀를 재촉했다.
“뭔데 숨기고 그러니?”
“……별 내용 없어요. 그냥 나 보고 싶다고 그러네.”
“어머,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마침 얼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공작부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황궁에서 그들을 초청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던 데다, 마지막 만남이 여러모로 안 좋게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공작 부인은 자신이 딸에게 참으로 무정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가서 사과를 할 참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편지를 보내도 됐지만, 언제나 거절당해 왔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세실레가 성녀로 채택된 이후로 세상과 고립되어 살아온 이들은 황태후가 더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저택 밖으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들뜬 그녀와는 달리 디젤라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디젤라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어쩌죠? ……나만 오라네.”
“……그러니?”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공작부인은 굉장히 실망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공허하게 비었던 눈동자는 금세 빛을 되찾았다.
그녀는 애써 미소지으며 디젤라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그래. 그럼 네가 가서 언니 상태는 어떤지 좀 봐주렴. 황태후께서 굉장히 예민하시니 조심하고.”
“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디젤라가 확신 어린 투로 답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머뭇거리다, 기어코 잔소리를 뱉어냈다.
“그 불같은 성격은 절대 내보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