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아르베우타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보고를 받았다.
오늘따라 유독 황제의 표정이 좋지 않은 탓에, 서류를 건네는 비서의 표정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어젯밤 황도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망자는?”
“비테르 후작입니다.”
보안이 철통같아야 할 황도에서 귀족이 사망한 건, 심각한 사안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도리어 전보다 더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설명해.”
“비테르 후작은 고급 주택가에 있는 별장에서 휴식 중이었습니다. 나이는 47, 후유증 때문에 내내 후작령에 있다가, 근래에 요양을 이유로 황도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후유증을 제외하면 건강했다는 증언이 있고 현장 증거를 봐도 살인으로 추정됩니다.”
“사인은?”
“과다출혈인 것으로 보입니다만……별장에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보고서를 듣던 아르베우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이라면, 세실레를 만났을 때였다. 심지어 사망 시간도 둘이 만났던 시간과 비슷했다.
‘위험했군.’
귀족을 죽일 정도의 괴한이 거리를 돌아다녔다니, 괜히 오싹해졌다.
혹여나 세실레가 끔찍한 꼴을 봤으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표적 살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듯 소리소문없이 고위 귀족을 죽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생각을 마친 아르베우타가 비서의 옆에 선 근위대장을 보며 물었다.
“원한을 살만한 인물은?”
“평소에도 행실이 바르지 않았던 사람이라, 짐작 가는 용의자는 몇몇 있습니다.”
“그럼 그들부터 조사해봐. 청부 살인도 염두에 두고.”
“네. 그런데 한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아르베우타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몇 번이나 머뭇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후작이 수도에 올라온 후로, 황후 폐하께 알현 요청만 사백 번 넘게 했다고 합니다.”
“사백 번?”
“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알현 요청을 넣었다고 합니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당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하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지.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르베우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손을 저었다.
“제정신이 아니니 오죽하겠나. 그보다 이 사건, 황후의 귀엔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도록.”
“알겠습니다.”
아르베우타는 그들을 향해 나가라고 손짓했다. 둘은 정중히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으니 다시금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향긋한 체취, 달아오른 뺨,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어제 세실레는 유달리 힘들어 보였다.
‘좀 쉬면 좋을 텐데.’
황궁에 돌아와서도 쉼 없이 바깥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했지만, 아르베우타는 그것이 세실레 나름의 휴가임을 알았다.
게다가 세실레는 원래도 자신 때문에 누군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니 빈민굴을 찾고 어린 신관에게 마음을 쏟는 걸 테다.
그녀는 유독 약자에게 약했으니까.
한땐 그런 면조차 사랑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차라리 세실레가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조차 내 욕심이겠지만.’
더한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금에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걸로 족했다. 변화가 생겼다는 것. 그를 옥죄던 족쇄가 느슨해졌다는 것만으로도 기회가 생긴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제는…….’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싫어하는 기색이 만연해 뒤를 쫓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정도로.
어서 세실레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는 보고하러 올 쟈르스를 기다리며 초조한 표정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
아침이 되어도 세실레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황후의 묘연한 태도에 황후궁은 비상이 걸렸다.
그녀의 이상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아침 시중을 들러 온 시녀였다.
도르데아는 먼저 와있던 시녀를 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르데아는 시녀를 뒤로하고 테레사를 곁눈질했다. 너는 무언갈 아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테레사의 표정은 누구 못지않게 심각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실제로 테레사는 어젯밤 내내 잠들지 못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 탓이었다.
그녀는 새벽에 루베르를 찾아갔다. 하지만 루베르는 테레사를 만나주지 않았다.
단순히 늦은 밤이라는 이유일 리는 없었다.
세렌디 신을 모시는 이들의 주된 활동시간은 밤이었으니까.
‘숨기는 게 있는 게 분명해.’
테레사 또한 침묵하자, 도르데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쟈르스가 안경을 매만졌다. 쟈르스가 보기에도 황후의 상태는 이상했다.
멀리서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황후는 꼭 실 끊어진 인형 같았다.
‘……월급만 제대로 나오면 상관없지만.’
애당초 소란이 일어서 잠시 들러보았을 뿐이었다. 남자인 쟈르스는 황후의 침실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것조차 안 됐다.
쟈르스는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조용히 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는 곧 도르데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비서관께서 가서 알아봐 주시면 어떻습니까.”
“네? 무엇을 말입니까.”
“듣기로 어젯밤, 황제 폐하께서도 잠행을 나갔다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
“두 분이 만나셨다는 것 같더군요.”
쟈르스는 침묵했다. 도르데아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눈치챈 탓이었다.
어젯밤, 황제와 황후 둘 다 궁을 비웠다. 그 후에 황후가 저렇게 되었다.
이유가 황제에게 있을 확률이 크니, 알아 오라는 뜻이었다.
이런 일에 쟈르스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지요.”
***
쟈르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외궁에 들어섰다.
그러나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지?’
집무실 주변에 근위대가 서 있었다. 보기 드문 상황에 그는 낯익은 시종에게로 갔다.
그는 쟈르스가 황명을 들은 후 황후궁 소속이 되었단 걸 전해 들은 터라, 별다른 경계 없이 쟈르스를 향해 묵례했다.
“근위대가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아, 어젯밤 살인사건이 있었답니다.”
“살인? 얼마나 큰 건이길래.”
“비테르 후작이 죽었습니다. 그는 즉사했고 외부인이 출입한 흔적은 없다더군요.”
이야기를 전해들은 쟈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비테르 후작이라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황태후의 측근으로 과욕을 부리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꼴 보기 싫다곤 생각했지만 정말 죽어버릴 줄은.”
“하하, 저희로선 잘된 일이기도 하죠. 아, 이 일은 황후 폐하껜 비밀입니다.”
그의 말에 쟈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묻지 않아도 빤했다.
‘괜히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익숙했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놀랍게도 집무실 불이 꺼져있는 것이다.
취침 시간을 제하고는 거의 일에 매진하는 황제였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쟈르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께선?”
“잠시 밖에 나가셨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래도 황태후 측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서 말입니다. 황태후 폐하께서 복귀하지 못하는 마당에 비테르 후작마저 사망하니 불안한가 봅니다.”
“대충 알겠군. 저들을 쳐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냐고 항의한 모양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직접 사건 현장을 보러 가셨습니다.”
황제란 위치도 참 피곤한 자리라며 쟈르스가 혀를 찼다.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저는 이만 퇴근할 테니.”
“네? 일이 있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자리에 안 계시니 어쩔 수 없죠.”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 사망 사건을 처리한다고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 와중에 어젯밤 황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 것도 우스웠다.
쟈르스는 유유히 걸음을 뗐다. 궁을 빠져나가는 길에 긴 그림자가 졌다.
쟈르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씁쓰름한 웃음이 맺혔다.
“부럽다…….”
처음, 황후궁에 강제 배치되었단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가엾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도 야근이 확정된 그들은 퇴근하는 쟈르스가 마냥 부러웠다.
***
“이곳입니다.”
아르베우타는 비테르 후작의 침실로 들어섰다.
평범한 공간이었다.
평범하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하기는 했지만,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귀족이었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가히 수십, 수백의 보석을 박아 넣은 침대 헤드 위로 검붉은 피가 번졌다.
어찌나 많은 피를 흘렸던지 새하얀 거위 털 이불을 적시고도 바닥의 카펫까지 피로 흥건했다.
아르베우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침실에 노령의 후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요람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람 또한 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기괴한 광경에 아르베우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건 뭐지?”
“하녀가 말하길, 갓난아기를 눕혔던 곳이라고 합니다.”
“갓난아기라니. 후작에게 이렇게 어린 자식이 있단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게다가 후작은 자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제 침실에 둘만큼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원한을 살만한 인물을 추렸는데도 수십이 넘지 않았나.
아르베우타가 표정을 찌푸리자 근위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상해서 추궁했더니 평민의 아기를 데려온 거라더군요.”
“평민의 아이를?”
“네. 그게……후유증이 남은 귀족들 사이에서 갓난아기의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아르베우타가 머리를 짚었다.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퍼졌는지 우습기만 했다.
“허, 그런 사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고생을 하지.”
“……네?”
“자네 모르겠나. 평소 행실이 악할 수록 악령에게 심하게 시달렸다는 사실을.”
“아, 역시 그랬군요. 저도 짐작은 했습니다만 후유증과도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래. 후유증이 남았다는 뜻은 인본을 거슬렀다는 뜻이지. 신의 축복을 받을 자격조차 없으니, 부작용이 생기는 거다.”
세실레가 처음 오키드리아 대륙에 내려왔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모두가 악령이 사라져 환호하는 사이, 몇몇은 머리를 틀어쥐며 정신증에 시달렸다.
무슨 수를 써도 낫지 않았다. 심지어는 세실레가 직접 찾아가 살펴보았지만 치유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대륙의 불순물이었고 오염 덩어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