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의 선전포고에 주점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다. 동시에 시선 집중을 받게 된 세실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도 그의 곁에 앉아있던 동료들이 그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아, 그만하게. 자네가 억울한 일 당한 건 내가 알지. 그래도 이리 횡포를 부리다 경비병이라도 오면 자네 손해 아닌가.”
“손해? 손해면 어때. 어차피 난 지금 더 잃을 것도 없어!”
그러더니 남자가 갑자기 세실레의 팔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너도 내가 우스워? 없이 사는 놈이라고 우습냐고!”
세실레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얼굴엔 분기가 어려있었다. 어디에도 풀지 못해 응어리진 화가 비틀려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곤란하긴 했지만 이런 사람을 상대로 험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세실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습지 않으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그 순간 남자의 입이 딱 다물렸다.
실컷 떠들던 입이 얌전히 다물리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이미 가게의 모든 시선은 사내가 있던 테이블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남자가 당황한 듯 눈동자만 굴렸다. 얼떨떨해 보이는 그를 향해 세실레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요.”
그제야 남자의 입을 다물게 하던 힘이 풀렸다.
***
세실레는 주점 밖으로 나왔다. 식사는 맛있었고 목 넘김이 좋은 맥주도 수준급이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가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착석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또 가고 싶을 정도였다.
맛있는 음식에 이야기도 곁들어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밤 나들이였다.
하지만 술을 마신 탓인지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느릿하게 눈이 깜빡이는 것이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도 같았다.
‘너무 마셨나.’
세실레는 잠시 나무 등치에 기대어 쉬었다. 이능으로 바로 숙취를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 이마를 간질였다. 숨통이 훅 트이는 기분에 세실레는 깊이 숨을 내뱉었다.
‘시원해.’
그러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도리어 황궁에 있을 때보다 더 답답했다.
결국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가슴께를 틀어쥐었다.
얇은 옷자락이 손안에서 멋대로 구겨졌다.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남자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우리 애가 잡혀갔어! 치료제인지 뭔지를 만든다고 잡혀갔다고.’
치료제, 그건 세실레가 돌아오고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효과 불명의 약이었다.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기에 처음엔 그저 환자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치 지금의 황태후가 허상에 시달리듯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기이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의 피를 마시면 증상이 싹 가신다는.
‘그게 말이 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이들은 허무맹랑한 말이라도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런 모양이지.”
세실레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순간 토기가 치밀었다. 세실레는 나무를 붙잡곤 그대로 몸을 숙였다.
“으욱.”
그러나 속이 쉬이 게워지지 않았다. 도리어 헛구역질만 계속되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렀다. 피곤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걸 외면한 채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래, 적어도 벌여놓은 일만큼은 모두 마무리해야만 했다.
‘움직여. 움직이자.’
세실레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곤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갓난아이, 울음소리. 그와 연관된 모든 흔적을 훑었다.
그런 다음 세실레는 붉은 머리 사내와 가장 비슷한 기척을 찾았다.
수십, 수백 개의 장면이 스치며 가뜩이나 복잡하던 머리가 터질 듯했다. 다시금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는 중에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상황을 보아하니 곧 거사를 치를 모양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그리로 움직여야 했다. 가서 남자에게 아기를 되찾아주고 그다음엔 괴소문을 뿌리 뽑아야 했다.
멋대로 갓난아기를 강탈한 귀족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될 터였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쉬이 머릿속이 비워지지 않았다.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무작정 들이켠 맥주가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고작 이런 문제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심란해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제대로 해내는 게 하나도 없다 싶어 자조적인 웃음마저 나왔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던 세실레의 몸이 비틀거렸다. 하필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몸이 잠시 중심을 잃었다.
이대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차, 누군가가 세실레의 팔을 잡아챘다.
단단한 아귀힘은 그녀를 단단히 붙들어 다시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군지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르베우타였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더욱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반갑지 않은 이의 등장에 세실레가 잡힌 손을 거칠게 빼내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에…….”
“…….”
“……아니. 어떻게 절 알아본 거죠?”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이전에 그녀가 노파의 모습을 했을 때도 자신을 알아봤었다.
테레사는 신수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가 어떻게 성별마저 바뀐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거세져 갔으니까.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정신이 어찔해지며 다시금 몸이 비틀거렸다.
휘청이는 그녀를 아르베우타가 단단히 지탱해 안았다. 깍지낀 두 손이 단단히 얽히며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품에 안긴 사람에게선 지독히도 향긋한 내가 났다.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킬 만큼 매혹적인 향이었다.
당장이라도 향에 취해 정신을 놓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아르베우타는 작은 목소리로 세실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잖아.”
의미심장한 말이 세실레의 귓가를 두드렸다. 잠시 침묵하던 세실레는 겨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곤 조용히 읊조렸다.
“……거짓말. 미행 따위의 추잡한 수를 쓴 거겠지.”
타당한 의심이었다. 황후궁에서부터 뒤따르는 이를 붙여놓았다면 오늘 밤 남자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실레의 답에 아르베우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단 걸 알면서도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아르베우타는 더 말하는 대신 걸치고 있던 웃옷을 벗어 세실레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갑작스레 어깨를 감싸는 따스한 기운에 세실레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물기를 머금고 일렁이던 눈동자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실레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거친 움직임에 아르베우타가 걸쳐 주었던 웃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세실레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온기를 머금었던 두 손 사이로 스며드는 찬기가 시려, 아르베우타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새벽 중에 황궁으로 돌아온 세실레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생기 없는 눈빛이 파리했다. 하염없이 밤거리를 헤맸는지 피부도 차가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그녀에게서 옅은 혈향이 풍긴다는 것이었다.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살펴도 몸엔 흠집 한 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테레사는 조용히 세실레의 곁으로 갔다.
세실레는 외출복 차림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의 체구보다 훨씬 큰 남성의 옷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주무시지.’
하지만 말을 건네기엔 세실레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지친 듯 늘어진 팔이 꼭 인형처럼 힘이 없었다.
근래 들어 가장 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테레사는 결국 나직이 입을 열었다.
“폐하.”
“…….”
“취침 준비를 돕겠습니다.”
지나치게 늦은 새벽이라 도르데아는 돌려보냈다.
테레사야 몇 날 밤을 새워도 문제가 없었지만, 도르데아는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세실레가 도르데아의 행방을 궁금해할까 봐, 테레사는 묵묵히 말을 덧붙였다.
“도르데아 님은 취침 중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저뿐이니 제가 돕겠습니다.”
하지만 세실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들거나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화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자리를 비우지 않는 건데.’
심상찮은 상황에 테레사는 자책했다.
자리를 비운 것치고는 신전에서 얻은 수확이 미미했다. 관련된 정보가 없다시피 했다.
소득은 없고 손해만 막심한 상황이었다.
테레사는 초조한 표정으로 세실레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실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다.
“……가.”
“…….”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테레사는 침묵했다.
지독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세실레를 모신 이후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세실레의 변화에 테레사는 나름의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잇지 않았다.
여기서 더 캐묻기는 무리라 판단한 테레사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테레사는 꼼꼼히 불을 끄고는 방을 나왔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오자 유독 텅 비어 보이는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밤 특유의 서늘함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힘주어 쥔 주먹이 잘게 떨렸다.
테레사는 배회하듯 침실 앞을 맴돌다가,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베르, 그라면 무언가 알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