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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32화 (3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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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울 정도의 천재성에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다 외웠나?”

“매일 보는 풍경인데 못 외웠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당연하다는 듯한 대꾸에 아르베우타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걸 그린 화가도 다 외우지 못했을 텐데, 저런 망발이라니.

아르베우타는 상념을 접고 말을 이었다.

“그 위에 숨어있더군.”

“누가 말입니까.”

“테레사랑 꼬맹이.”

“꼬맹이? 루베르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참으로 골치 아픈 적수를 마주했다는 양, 미간을 찌푸렸다.

“테레사가 신관들을 깨우고 나서 일이 복잡해졌어. 아무래도 루베르의 뒷조사를 해봐야겠군.”

쟈르스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지난번 보았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당연히 루베르에 대한 조사도 있었다.

그러나 루베르에 대해선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그가 하는 일이라곤 황후궁과 신전을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황후를 엄마라고 부르는 점이 멋쩍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 황후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상기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실제로 세렌디 신을 두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제국민도 많았고 말이다.

쟈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조사해봤지만 별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당장은 상황 파악하기 급급했을 테니까.”

“그럼, 그가 이제부터 본 모습을 보일 거란 뜻입니까?”

“그래. 아마 일을 벌일 거야.”

쟈르스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루베르의 나이가 고작 예닐곱이었다. 그조차도 외양이 그럴 뿐이었다.

실제로 태어난 지는 일 년도 채 안 되었다. 그런데 일을 벌인다니, 참으로 과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심란한 표정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 돼. 실제 나이는 어마어마할 테니까.”

“그 어린 신관이 말입니까?”

“그래. 분명 세렌디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겠지.”

신의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그를 보며 쟈르스가 머리를 짚었다.

‘저번엔 괴물로 변하더니, 이젠 신을 보고 뭐라 하고.’

신을 모욕하는 주제에 정작 성녀인 황후에겐 목매다는 것이 우습기까지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쟈르스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오늘의 보고는 마쳤다.

쟈르스는 이만 퇴근할 생각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쟈르스는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 앞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도르데아였다. 그녀를 발견한 쟈르스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갑자기 나타난 도르데아에 쟈르스가 당황하기도 잠시, 그녀가 곧장 황후의 명을 전했다.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감히 황후를 상대로 거래하는 정황을 포착했으니 황족 능멸 죄로 처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황후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시면 용서해주실 겁니다.”

“…….”

“황제가 제시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도 전하랍니다.”

전언을 들은 쟈르스의 낯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충격에 혼란에 빠진 그를 보며 도르데아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어찌하겠습니까.”

이미 쟈르스는 황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데도 이러는 건, 더는 두 주인을 모시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쟈르스는 정말로 감옥에 가게 되리라.

황제가 나서서 막는다면 해결되겠지만, 그가 황후의 뜻에 거역할 리 없었다.

쟈르스는 침묵했다. 어찌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아르베우타가 나왔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지 가타부타 없이 말을 꺼냈다.

“다녀와.”

“다녀오라니,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이상한 말이군. 어째서 황후의 곁에 가는 것이 그대를 버리는 게 되는 거지?”

뻔뻔한 대답에 쟈르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여간 황족이란 족속들은.’

쟈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

쟈르스가 황후궁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은 귀족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일전 황태후가 위협할 때도 끄떡도 없던 쟈르스였다. 황제의 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주인을 바꿨단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보수와 함께.

당연하다는 듯, 온갖 소문이 들끓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두 분 사이가 좋아지신 걸지도 모르겠군요.”

“듣기론 아니라던데요?”

“그러면 황제께서 델링켄 백작 가를 가만두겠습니까.”

“당장은 가만히 둬야지요. 황후께선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문제라면, 최근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황제께서 매일 황후 폐하의 안부를 물으신다더군요.”

그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의 입에서 끄응, 앓는 소리가 흘렀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면 좋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황제 폐하께서 짝사랑이라도 하고 계신 건 아닐 테고.”

탄식처럼 흐른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황후를 홀대하기로 유명했다.

인제와 그녀의 눈을 가려 이득을 취하면 모를까, 순순히 제 살 내주는 짓을 할 리는 없다는 것이 공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이번에 황후궁에 배치된 예산만 얼만지 아십니까?”

듣고 있던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황후궁의 예산이 황궁 운영비와 맞먹는 수준이라는 사실과 실상 쓰일 데 없는 예산이 금고에 쌓이는 중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쯧즈.”

그 말에 내내 침묵을 지키던 원로 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켜보면 알겠지요. 지금은 상황을 살필 때입니다. 곧 황태후께서 복귀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라며 귀족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테레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일순 새하얀 빛이 일더니, 어느새 눈을 뜨니 숲이었다.

루베르가 신력으로 테레사를 숲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숲은 새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했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훑던 테레사가 루베르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내내 그가 수상쩍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힘을 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의 힘도 어마어마했지만.’

그마저도 숨기고 있었다는 듯, 드러낸 루베르의 신력이 상당했다.

저 작고 연약한 몸에서 뿜어내는 기운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정순하고 고결한 기운이 테레사를 압도했다. 루베르의 힘에 압도되어 피부마저 저릿할 지경이었다.

분명 뿌리가 같은 힘임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이렇게 강력한 기운이라니.’

지상에서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존재는 몇 되지 않았다.

그에 무언가 떠올린 테레사가 더듬더듬 말문을 뗐다.

“당신 설마…….”

“쉿, 거기까지.”

루베르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답했다. 세실레의 앞에서와는 달리 또박또박한 발음이었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황한 그녀를 보며 루베르가 킥킥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냥 편히 루베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떨떠름해 보이는 테레사를 두고 루베르가 몸을 휙 돌렸다. 그는 내리쬐는 태양이 못내 뜨겁다는 듯. 풀쩍 뛰어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서야 루베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턱받침을 괸 채로 테레사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신수. 앞으로의 계획은?”

“네? 아, 계획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테레사를 보며 루베르가 생긋 웃었다.

“너도 참 태평하단 말이야. 그래서야 엄마가 순순히 하늘로 돌아오겠어?”

루베르의 타박에 테레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실책입니다.”

“널 탓하려는 건 아냐. 애당초 네 임무는 엄마를 지키는 거니까.”

루베르는 두 다리를 흔들었다. 사뭇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였지만 그를 보는 테레사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루베르는 세렌디 신의 최측근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토록 정순한 힘을 지녔을 리 없으니까.

‘어째서 성녀님께 그런 호칭을…….’

테레사가 이마를 찌푸렸다.

세렌디의 최측근은 그녀를 부모처럼 따랐다.

그들은 자식된 도리로서 세렌디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성했다.

세렌디의 후계가 세실레라지만, 그녀는 아직 후계에 불과했다.

루베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펴보던 루베르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기서 질문! 나는 지상까지 왜 내려왔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뭐, 천천히 고민하도록 해.”

루베르가 해맑게 웃었다. 어딘가 섬뜩한 말과는 달리 표정만큼은 천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고 나니 그의 말을 그저 넘겨들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지.’

아무리 짐작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루베르는 머리 굴리느라 바쁜 테레사를 지켜보다,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를 보며 테레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근래에 들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마냥 좋은 징조로만 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테레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승계가 진행되려는 건가.’

세렌디라고 영생을 사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세렌디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 엄마라고 했지.’

어쩌면 그 이유가 승계에 있을지도 몰랐다. 불길한 예감에 테레사가 입술을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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