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하나같이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사실 쟈르스는 야망가가 아니었다. 도리어 빠른 은퇴를 바랐다.
적당히 경력을 쌓다가 백작위를 물려받으면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느냐고 묻는다면 기구한 사정을 읊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손대는 족족 사업을 말아먹지 않았어도.’
역사가 유구한 백작 가라고 해도 자본은 중요했다.
명예로만 먹고 살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경제력으로도 귀족의 급을 나눴다.
때마침 상업이 발달하면서 다른 귀족들이 그렇듯 델링켄 백작도 사업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소질이 없었다. 소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손을 대면 안 되는 정도였다.
처음으로 사업체를 운영한 백작은 얼마 가지 않아 거하게 망했다. 거기서 그쳤다면 적당히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극은 그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빚을 지기 시작하면서 벌어졌다.
빚은 빚을 낳았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부풀려졌다.
촉박해진 백작은 고리대금에까지 손을 댔고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하필이면 그때 쟈르스는 아카데미에서 학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쟈르스가 졸업하고 영지로 돌아왔을 땐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쟈르스는 황궁에 취직했다.
경제와 안전. 두 가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 데다, 황제와 어릴 적 친분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리 없이 황제의 비서로 임명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두각을 드러냈다.
권력을 쥐게 된 쟈르스는 공권력을 등에 지고 가문을 지켰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해 이젠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힘이 부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휴양지로 유명한 영지라면 사업을 벌이거나 사치세 따위를 걷기도 용이하고, 바다와도 가까워 몸을 숨기기도 좋으니까.
계산을 마친 쟈르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선 아르베우타를 보며 말했다.
“북부에 있는 은광까지. 싫다고 하시면 그만둘 겁니다.”
당당하게 황실 재산을 탐내는 그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웃었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황태후 측의 인사들을 쳐냄으로써 황실의 금고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그 정도야.”
망설임 없는 대답에 쟈르스는 조금 허탈해졌다.
‘쯧, 금광 정도는 부를 것을.’
참으로 아쉽게 되었다며, 쟈르스는 황제와의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많았다. 그동안 쟈르스는 야금야금 잇속을 챙길 생각이었다.
***
세실레는 낱낱이 서류를 파헤쳤다. 업무가 영 낯설었지만, 그렇다 해서 눈 뜨고 코 베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쟈르스가 넘긴 보고서 어딘가에 있을 빈틈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처리한 업무는 조금의 부족함이 없었다. 이러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테레사가 결국 먼저 입을 뗐다.
“왜 그러십니까.”
“쟈르스 말이야.”
“예, 오늘도 야근하고 있더군요.”
“그것뿐이야?”
거침없는 물음에 테레사가 연이어 답했다.
“……황제의 집무실에도 들렸습니다.”
“들려서?”
“은광을 주니, 휴양지를 주니, 하더군요.”
“은광? 휴양지?”
“네. 황제가 이 일을 먼저 제안한 것이 맞는 모양입니다.”
세실레는 고민에 잠겼다.
‘가문이 위태롭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황제가 돈으로 쟈르스를 꼬드겼을지도 몰랐다.
고민하던 세실레가 테레사를 보며 물었다.
“테레사.”
“네.”
“우리 돈 많지?”
뜬금없는 질문에 테레사는 눈만 깜빡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겨우 정리하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아니, 그런 대답 말고. 도르데아, 네가 좀 말해봐.”
“황후궁의 재산 목록을 가져올까요?”
“그래.”
순순한 대답에 도르데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방을 나섰다. 도르데아가 방을 떠나자 세실레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쓸 만하던데.”
“쟈르스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그래. 안 그래도 행정관이 필요했으니까.”
궁이 돌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렇다면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까진 도르데아의 노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슬슬 한계였다.
돈으로 움직이는 인재라면 자신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때마침 도르데아가 재산 목록을 가지고 왔다. 목록을 받아든 세실레가 도르데아를 보며 말했다.
“가서 쟈르스에게 전해. 황후를 두고 거래하려는 것을 확인했으니 황족 능멸 죄로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말이야.”
“네.”
“황제가 제시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도.”
통 큰 외침에 황후궁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세실레는 일을 마치고 카우치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루베르가 달려와 안겼다.
덩달아 루베르의 손에 들린 종이가 팔락거렸다.
루베르는 서류에 쓰인 글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백자기 뭐예요?”
“백작은 작위를 말하는 거야.”
간략한 설명에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으나 세실레는 말없이 루베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루베르가 눈을 접어 웃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호선을 그리며 감겼다. 부드러운 뺨엔 홍조가 옅게 맺혔다.
그 채로 품 안을 파고드는 움직임이 사랑스러웠다.
세실레가 웃으며 물었다.
“누구한테 배워서 애교가 이렇게 많아?”
“엄마한테 배워써요.”
당당한 대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상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줄 거리라곤 루베르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위 배정을 해줘야 하는데.’
사실상 신관들에게 작위를 내려봐야 딱히 감동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에 의의를 두는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정말이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어쩌면 다른 속셈이 있는지도 몰랐다.
세실레의 입에서 무심코 중얼거림이 흘렀다.
“……괜히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응? 못 들었어요.”
“아냐. 아무것도.”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세실레는 잠시 고민하다, 멋대로 카우치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루베르가 의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엄마, 나 돌아 갈게여!”
“그래.”
세실레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다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피곤했던지 금방 잠이 몰려들었다.
루베르는 그 앞에 서서 세실레의 눈가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든 게 확실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루베르가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때마침 덮을 것을 들고 들어오던 시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 문 아이가 열기엔 무거울 텐데.”
실제로 황후궁의 문은 무게가 제법 있어, 성인 여성이 열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루베르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시녀는 이내 생각을 마치곤 안으로 들어섰다. 잘못 본 것이리라 치부하며.
***
테레사는 황제의 집무실로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그 어느 곳보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덕분에 테레사는 천장 위, 비어있는 틈새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은밀하게 숨어든 것이 무색하게도 황제와 쟈르스의 이야기는 별 것 없었다.
“식사는 잘하고?”
“네. 루베르 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군.”
테레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신수인 자신이 인간들의 이야기나 엿듣고 있는 신세가 되었나 싶었다.
게다가 그녀가 보기에 세실레의 걱정은 정말이지 불필요했다.
황제가 그녀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애지중지하면 모를까.’
테레사가 한숨만 내쉴 무렵, 누군가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테레사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틀어 옆을 보았다.
그곳엔 루베르가 있었다. 의외의 인물에 테레사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너……어떻게.”
그러나 루베르는 대답 대신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해.”
그 말을 끝으로 테레사와 루베르의 몸이 팍, 하고 사라졌다.
***
서류를 뒤적이던 아르베우타가 위를 훑더니, 무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쥐새끼가 사라졌군.”
“네? 누가 있었습니까?”
아르베우타의 말에 쟈르스가 의문을 표했다.
아르베우타는 말없이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엔 각종 염료를 입혀 그린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신화 속 내용을 옮긴 천장화는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쟈르스는 그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훑었다.
비단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집무실의 천장화를 모조리 외워버린 지 오래였다. 아주 작은 묘사조차도 머릿속에 전부 있었다. 개 중 흐트러진 부분을 찾아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쟈르스는 곧 어느 타일 하나가 비뚜름해져 있음을 눈치챘다.
“확실히 산 아래, 오십구 번째 나무의 문양이 틀어져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