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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30화 (30/110)

30

“진정하시죠.”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누구 때문에!”

“애당초 과욕을 부리지 않았으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싸늘한 어조에 그녀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양, 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렸다.

무섭거나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한 분노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네가 감히……, 감히 내게 이리 굴고도 무사할 것 같아?”

그녀가 앞에 놓인 찻잔을 쥐었다. 잔을 던지려는 듯한 행동에 그의 곁을 지키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아르베우타는 그들을 저지하곤 황태후의 앞에 가 섰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온 찻잔이 그의 몸에 부딪혔다, 바닥으로 튀었다.

아르베우타는 식은 찻물을 뒤집어썼고 바닥에 부딪힌 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 정도로 다치진 않았다. 그저 기분이 좋지 않을 뿐이었다.

“폐, 폐하.”

당황한 기사가 서둘러 달려들었으나 황제는 그조차 막아섰다. 그의 시선은 황태후를 향해 있었다.

황제가 황태후를 보며 상냥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보십시오.”

“너…….”

“이게 당신이 부릴 수 있는 횡포의 전부입니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제가 그동안 얼마나 온정을 베풀었는지,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황태후는 입을 다문 채 마른 손을 꾹 쥐었다.

제 아들이라 여겼던 것이 송곳니를 숨긴 맹수인 줄 알았으면 결코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악령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당하고만 있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난 이 년간, 그녀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공들인 탑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난데없이 이능을 지녀 자신을 이렇듯 비참하게 만든 세실레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무력했으니까.

그나마 고집스레 갖고 있던 황후의 인장마저 금방 빼앗길 게 분명했다. 그것마저 빼앗기고 나면 그녀는 더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황태후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눈을 번뜩였다.

“네가 날 죽이려는 걸 그 애도 알아?”

“…….”

“그 애. 내가 자기 때문에 죽었단 걸 알고서도 마냥 속 편해하진 못할 성격일 텐데.”

“…….”

“게다가 백성들도 의아해하겠지. 황후가 귀환한 뒤, 황태후가 죽었다. 둘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더라. 어쩌면 야사(野史)에 황후가 황태후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문구가 적힐지도 모르지.”

황태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일단 살아남고만 나면,

‘언젠가 내 세상이 올 테니까.’

황태후는 권력을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히죽이는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황제에게선 아무런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후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까지 황태후를 내려다보던 아르베우타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급하시긴 한가 봅니다.”

“……뭐라?”

“당신이 세실레의 안위를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정말 주제 파악 못 하는군. 당장 삼키는 음식에 독이 있을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섬뜩한 경고에 황태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때마침 침실을 수색하던 기사가 황후의 인장을 찾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찾았습니다.”

아르베우타는 기사에게서 황후의 인장을 넘겨받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인장은 본래 주인에게 갈 테니, 그런 줄 아십시오.”

아르베우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방을 나갔다. 뒤따라 온 기사들도 침실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방 안엔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저가 어떠한 모욕을 당했는지를 상기해낸 황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들었다.

“네 이놈! 네가 감히 내 위에 서려 들어!”

그러나 그녀의 외침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사라졌단 악령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황태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공포의 장소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가짜 악령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저가 만들어낸 가짜임을 인지하기엔 그녀는 지나치게 쇠약해져 있었다.

“가, 저리 가!”

외침에도 소용없이, 허상이 다시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세실레는 내내 긴장했다.

쟈르스에게 너무 쉬이 일을 맡겼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황궁 사람들은 악독했다. 어떤 식으로든 안심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녀는 쟈르스에게 허락했던 업무 권한을 다시 뺏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쟈르스가 보고를 위해 올린 서류는 그녀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게 뭐지?’

세실레는 자신이 무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보아도 종이에 써진 내용은 똑같았다.

심지어 그 밑엔 황제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거짓으로 인장을 찍지는 않았을 테니, 적어도 여기 적힌 내용은 모두 진짜란 뜻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세실레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앞에 부복한 쟈르스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걸 일주일 만에 해냈다고?”

“네, 황후 폐하께서 따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충분해.”

세실레는 할 말을 잃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쯤 되니 조금 무서웠다. 세실레는 조용히 그가 건넨 서류를 옆에 내려놓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잖은 이득을 봤으니 타박하기도 뭐 했다. 세실레는 옅게 한숨을 뱉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물러가도 좋아.”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쟈르스가 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문대로 쟈르는 대단한 인재였다.

신관들의 임시 작위부터 자잘하게 치러지는 연례행사, 귀환 축하 파티, 사직한 행정관들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한 채용과정에 담당 인력 배치까지.

이 모든 것들을 일주일 만에 끝낸 것이다.

이 정도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지만, 상식선에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하지만.

‘분란 지역 정리라니.’

세실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쓰인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그곳에는 변방, 해적이 들끓는 지역이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곳은 제국이 내내 골머리를 앓았던 지역이었다.

해적선의 움직임이 매우 교묘해 잡아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실레는 급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돌려 테레사를 보며 물었다.

“……설마 너는 아니지?”

“무얼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말이야. 네가 도운 건 아니지?”

“네, 저는 아닙니다.”

테레사가 칼같이 대답했다. 설마하니 자신이 그를 도왔겠냐는 듯, 말투에서 단호함마저 묻어났다.

테레사의 확답에 세실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애당초 이러한 규모의 일 처리는 한낱 행정관이 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황제의 도움이 있었다고 봐야겠지.’

세실레는 제 옆에 곱게 놓인 황후의 인장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안주인으로서 공식 업무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인장이었다.

내내 황태후가 틀어쥐고 있어 세실레는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백옥을 갈아 만든 인장은 둥근 보름달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 바라보던 세실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꿍꿍이지.’

세실레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옆에 내려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그를 눈치챈 테레사가 즉각 물었다.

“안으로 모실까요?”

“그래. 좀 쉬어야겠어.”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세실레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테레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자의 뒤를 쫓아.”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섰다.

***

테레사가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쟈르스는 황후궁을 나서자마자 황제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아르베우타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지?”

“성공적이었습니다.”

“세실레는 뭐라고 하고?”

“우선은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런데 저는 언제까지 황후궁에서 일합니까?”

“계속. 그리고 한 시간마다 보고하러 오고.”

“……네?”

황제의 못 돼먹은 심보에 쟈르스가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쟈르스의 불만 따위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황후궁이랑 여기랑 얼마나 멀다고 그러나.”

“걸어서 삼십 분 거리입니다.”

“그럼 내가 가면,”

“퍽이나 들여보내 주겠습니다.”

타당한 타박에 아르베우타는 잠시 침묵하다, 쟈르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임무가 막중해. 알고 있지?”

“그러시겠죠.”

“그래. 한 시간이 무리면, 하루 한 번은 보고하러 오도록.”

“하아, 제가 애당초 왜…….”

쟈르스는 제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다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어차피 무어라 말해봤자 듣지도 않으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모시는 주군이 괴물이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상관이 둘이라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황후는 아직 그를 향한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매일 보고를 하러 오라니.

그는 문관이지, 무관이 아니었다. 이러다 과로사로 죽을 판이었다.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 쟈르스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그럴듯한 미끼를 던졌다.

“대신 연봉 세 배.”

“필요 없습니다.”

“매년 상여금으로 연봉 열 배를 주지.”

“…….”

“이번 일을 마치면 추가로 영지도. 아, 남부의 휴양지는 어떤가.”

그 순간 쟈르스의 입에서 짤막한 욕설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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