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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29화 (2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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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인장이 필요합니다.”

“……그렇군.”

인장은 황후가 공적 업무를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장은 현재 황태후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녀가 궁 깊숙이 숨겨 놓고 세실레에게 건네지 않은 것이다.

그 전엔 펜듈럼 때문에 찾아주지 못했고 그 후엔 아르베우타 또한 인장을 찾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황태후의 권위도 펜듈럼의 저주도 한층 옅어졌다.

더는 인장을 찾는 것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

세실레는 아침부터 내내 책을 읽었다. 지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고자 공부를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그를 위해 용어 사전까지 찾아가며 읽고 나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한창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뒷목이 뻣뻣했다.

세실레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벌써 한낮이었다.

‘이쯤 되면 루베르도 수업을 마쳤겠지?’

루베르의 마중도 나갈 겸, 오래간만에 신전에 들러볼 생각이었다.

세실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르데아가 다가와 물었다.

“채비할까요?”

“아니. 그냥 신전에 다녀올 거야.”

신전은 황후궁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황후궁과 신전을 잇는 자그마한 오솔길만 지나면 됐다.

별다른 채비도 필요 없었다.

세실레가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뒤로 도르데아와 테레사가 따라붙었다.

그 순간 세실레의 머릿속에 무언가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의심하라.’

제왕학책에 적혀있던 말이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생각해 보니 의아해졌다.

‘도르데아는 왜 갑자기 변한 거지?’

도르데아는 의심할 여지 없는 황태후의 측근이었다.

하지만 회귀 후, 그녀는 태도를 달리했다.

이 년 동안 황후궁의 살림을 맡은 것도 도르데아랬다. 세실레가 확인해봤을 때, 이년 간의 관리는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중은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 전엔 무력하여 이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그간 자신이 너무나도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세실레는 인상을 찌푸리다, 몸을 돌려버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

신전에 가는 동안 세실레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혹시 도르데아와 황제가 손을 잡았나?’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쟈르스를 황후궁으로 보낸 건가.’

또다시 자신을 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모양이었다.

‘대비해야 하는데…….’

불쾌한 생각에 입술을 짓씹을 무렵, 그녀를 발견한 신관들이 서둘러 다가왔다.

“성녀님! 오셨습니까.”

“네. 루베르는요?”

“루베르는 아직 수업 중입니다.”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끝날 테니 정원이라도 산책할 요량이었다.

화려하게 핀 꽃이 신전을 가득 메웠다. 한참이고 새하얀 정원을 응시하던 세실레의 머릿속에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루베르가 수업 듣기 싫다고 했었지.’

세실레 역시 수업에 좋은 기억이 없었다. 지나치게 엄한 훈육만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루베르의 교육 환경 또한 신경이 쓰였다.

설령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신관의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실레가 몸을 돌려 물었다.

“그렇다면 수업을 구경해봐도 괜찮을까요?”

세실레의 물음에 신관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감히 성녀님을 상대로 ‘대신관에게 물어보고 올 테니 조금 기다려 달라.’는 말 따위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신이었다. 성녀님을 상대로 주저했다는 걸 알면 대신관에게 크게 혼날지도 몰랐다.

생각을 마친 신관이 고개를 숙인 채 큰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이지요! 성녀님께서!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단 일 초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기 행동이 지나치다는 건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테레사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뱉어냈고 도르데아마저 고개를 저었다.

냉랭한 분위기에 슬쩍 고개를 든 신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듯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는 그를 두고 세실레가 말했다.

“안내해주신다면서요?”

“아,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분명 과하게 행동하지 말라 한번 말을 들은 뒤였다. 뒤늦게 그 기억을 떠올린 신관은 위축되어 있었다.

‘내가 성녀님의 명을 어기다니!’

소멸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장 뒤에 선 신수, 테레사만 봐도 그랬다. 그녀는 감히 명을 어긴 신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지.’

신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대로 파직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덜컥 겁이 났다.

‘난 이제 끝이야.’

그때 구세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타박하긴커녕 상냥한 어투에 어째선지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주책맞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신관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꾹꾹 찍어내고 말았다.

그를 보며 세실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우는 걸까.’

자신 때문인가 싶어 당혹스럽기도 했다.

‘무리한 부탁이었나.’

곤란하면 거절해도 됐을 텐데 먼저 괜찮다고 한 건 그쪽이었다. 세실레는 잠시 고민했지만, 신관은 묵묵히 길을 인도했다.

우는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보는 눈이 많지.’

세실레는 신관의 눈물을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네 사람은 어느 방 앞에 다다랐다.

장엄한 아치형의 문이 그들을 반겼다. 달의 문양이 고스란히 새겨진 문이었다.

훌쩍대던 신관은 말없이 문고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새하얀 달이 터지듯 빛을 내며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진땀을 빼는 대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백발의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그 곁엔 루베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접고 있는 종이는 책을 찢어낸 것 같았다.

“……루베르. 그럼 이건 이해한 건가?”

“…….”

차가운 침묵에 대신관은 또 땀만 닦아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신관은 그제야 자신이 노크조차 하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에 신관이 멋쩍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뒤늦게 세실레의 등장을 알아차린 대신관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이어 루베르의 손에서 엉망으로 접히던 딱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루베르는 개의치 않고 냅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실레에게 달려왔다.

“엄마!”

루베르가 와락 안겨들었다. 세실레 또한 거리낌 없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하지만 방금 보았던 루베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영 지워지질 않았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루베르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공부가 싫으면 책을 찢어 쪽지 정도는 접을 수 있었다.

‘하긴 한창 그럴 나이지.’

세실레는 빙긋 웃고만 말았다.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루베르가 고개를 빼꼼 들며 순수하게 웃었다.

“엄마아?”

“응.”

“나 보고 시퍼서 와써요?”

“물론이지.”

세실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베르 또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도 엄마 보고 시퍼써!”

“그랬어?”

“응. 저 할아버지 재미없어.”

루베르가 대신관을 보며 혀를 내밀었다. 대신관은 그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였다.

“허허, 오셨습니까. 미리 마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녜요. 제가 멋대로 찾아온 거니까. 그런데.”

세실레는 말을 하다 말고 탁자 아래에 떨어진 쪽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루베르와 대신관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걸 눈치챈 세실레가 말갛게 웃으며 물었다.

“루베르가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닌가 봐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재밌게 수업을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제 잘못이지요.”

허허로운 웃음에 세실레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머물렀다. 대신관의 수업이 엄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루베르같은 말썽꾸러기 학생도 충분히 포용해줄 수 있는.

‘다행이다.’

안도감이 들었다. 루베르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이러고 있으니 진짜 루베르의 엄마라도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자 루베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응?”

“엄마가 웃으니까 나도 기분 조아.”

해맑은 웃음이 얼굴 가득 번졌다. 순수한 미소에 세실레 또한 밝게 웃었다.

“응, 엄마도 기분 좋아.”

아무려면 어떨까. 따듯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꼭 루렝브렌 산맥에 있었을 때처럼, 가슴을 적셔오는 온기에 세실레는 루베르를 꼭 끌어안았다.

***

황제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나 황태후는 인장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황제가 황태후궁을 찾았을 당시 화색을 띠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그가 황후의 인장을 입에 담는 순간부터, 황태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겁을 집어삼킨 채 눈가를 파르르 떨 뿐이었다.

무어라 화를 내려던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그는 뒤편에 자리한 이들에게 눈짓한 후, 황태후가 앉은 테이블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어머니.”

“…….”

“어차피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이 아닙니까.”

다정한 목소리로 뱉는 말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빼앗길 것 힘 빼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머니라 부르는 것조차 다른 의미를 담은 것 같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이미 황제의 수하들이 방 곳곳을 뒤지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꼭꼭 숨겨 놓았대도 이 정도면 언제고 찾아낼 터였다.

그걸 황태후 또한 모르지 않았다.

불안한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유독 말라 움푹 팬 볼이 창백했다.

그러다 그녀는 덥석 아르베우타의 손을 잡아채며 말했다.

“네가, 네가 감히 날 배신하려고 하는 거니? 네가 어떻게, 네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아르베우타가 흘겨보았다. 그가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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