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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28화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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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목소리였다. 이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경고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뜻을 이해하고 물러섰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다짜고짜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소리쳤다.

“이대로 가면 제 어린 동생은 굶어 죽습니다.”

“그럴 리가.”

“진심입니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황제 폐하께서 저를 해고한다 했습니다.”

“……해고?”

처음 듣는 소리에 세실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쟈르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네. 저희 가문은 선대가 진 빚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데다 적도 많습니다. 그간 수석 비서관으로 입지를 공고히 해 버텼지만, 이대로 고향으로 내려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겁니다.”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다짜고짜 죽는다는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심 가는 부분이 많았다.

‘수석 비서관이나 되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상식적인 선에서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귀족들의 내밀한 속사정이나 스캔들에 어두웠다.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곁을 지키고 선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는 세실레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다가.’

세실레가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기민하게 파악한 쟈르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가문이 흔들리면 영지민들 또한 고충에 시달릴 것입니다. 악덕 고리대금업자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 돈을 얻어내려 할 테니까요.”

“…….”

“그러니 차라리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쯤 되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제국민이 걸린 일이니 나라의 안주인으로서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역으로 당했군.’

세실레는 못 내켜 하며 입을 열었다.

“네 말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 정도까지 하는 데 들어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 쟈르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어째서 황후 폐하의 편을 드느냐고 하셨지요. 답은 간단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하시라 했기 때문입니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저는 사실만 말할 뿐입니다.”

침착한 대답에도 세실레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믿지 않는 표정에 쟈르스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래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시겠다면 차라리 저를 거둬주십시오.”

그 순간 세실레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도통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이윽고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쟈르스였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저와 제 가문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세실레로서는 입안에 돋은 혓바늘처럼 곤란한 부탁이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뗐다.

“……루베르는 내가 작위를 내릴 생각이었다. 네 도움은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 물러가.”

“그럼, 알현은 성공리에 마친 것입니까?”

당돌한 질문에 세실레는 기가 차, 헛숨을 뱉었다.

고작 소문 하나를 종식하려고 하는 행동이 참으로 대단했다.

정말로 황제가 해고를 명하기라도 했는지, 연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의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날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바라던 것이 이건가.’

참으로 교묘한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저를 잡아두려고 했으면서, 짓누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니.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실레는 되도록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나도 기대가 되는군.”

“…….”

“차라리 거두어 달라고 했지? 그대가 그걸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지. 나도 궁금하군. 내 새로운 비서가 얼마나 일을 잘할지.”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세실레의 말은 곧 쟈르스를 거두겠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을 거둔다. 이것이 얼마나 큰 폭풍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세실레는 가타부타 없이 몸을 휙 돌려버렸다.

그 중 쟈르스만이 꿋꿋하게 세실레의 뒤를 따랐다.

흘끗 그를 살핀 세실레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재밌어지겠군.’

황제가 어찌 나오든 상관없었다. 이건 경고였다. 그녀를 붙잡고 싶다면, 이런 짓을 다시는 벌이지 말라는 경고.

수석 비서관, 그것도 소꿉친구 시절부터 함께한 최측근을 거뒀다.

세실레는 황제의 오른팔을 잘라낸 셈이었다.

황제에겐 제법 타격이 갈만한 일이었다.

***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처럼, 소름 끼치는 정적이 황궁을 맴돌았다.

사람들은 황후가 쟈르스 비서관을 거뒀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냉혹한 자였다. 지난 이년 간, 기다렸다는 듯 황태후의 측근을 내치는 그를 지켜본 이들은 몸을 떨었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괴물로 변한다고까지 했다. 괴물과 성녀, 이들은 이년 전 비극이 되풀이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황후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세실레는 낮에는 루베르와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바깥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황제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그 또한 같은 일과를 반복할 뿐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세실레는 반응 없는 황제에 당황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련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기묘한 긴장이 맴도는 가운데, 쟈르스가 세실레를 찾았다.

***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쟈르스가 갑작스레 방문을 요청하더니, 웬 서류 뭉치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세실레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물었다.

“……그게 뭐지?”

“일주일 내로 황후 폐하께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보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결과를 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쟈르스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의욕으로 눈빛이 이글거렸다. 하지 말라고 했다가는 귀찮게 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세실레는 서류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그렇다고 설명을 요구하기는 부끄러웠다. 결국 세실레는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래.”

“믿고 맡겨 주십시오.”

바삐 인사를 마치고 나가는 그를 지켜보던 세실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설마 이것도 황제가 명령한 건가?’

세실레는 제왕학은커녕, 정치, 경제에 관해서도 일절 배워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의 교묘한 세력 싸움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강요받은 것은 철저한 예법과 기본적인 교양뿐, 황태후는 세실레가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하지 않던 일을 하려니 피로했다.

게다가 상대는 황제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그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몸을 느른히 늘어뜨렸다. 황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왜 이런 일에 휘말려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짜증 나.’

정치며 경제 서적을 뒤적여봤자,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 또한 자유자재로 사람들을 지휘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천재가 아니었고 무언갈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러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능을 지니고 성녀로서의 가치를 입증했다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황후궁을 지키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또다시 반쪽짜리 황후가 되어버렸다.

씁쓸한 사실에 한숨을 내쉴 무렵, 벌컥 문이 열리며 루베르가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후다닥 달려오는 루베르를 보고서야 세실레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때맞춰 오는 루베르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았다.

세실레는 두 팔을 들어, 안겨 오는 루베르를 가만 껴안았다.

“어서 오렴.”

“웅! 엄마, 앙녕하세여.”

세실레는 루베르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그녀를 루베르가 다독였다.

***

쟈르스는 황후궁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폈다.

도르데아가 돌본다고 돌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황태후가 황후의 권한을 틀어쥐고 넘기지 않은 탓이었다.

황후는 황실의 대소사와 황도를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황제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어야 했으며, 성녀로서 갖가지 식을 이끌 줄 알았다.

막대한 임무가 이 년간 공백이었다. 대부분은 황제가 처리했다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신과 관련된 것은 특히.’

현 황제는 세렌디 신을 증오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혼란이 극에 달했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성녀로서의 황후의 역할은 중요했다.

황제 또한 이 부분을 지적했다.

‘만약 황후가 너를 거둔다면, 그땐 그녀에게 힘을 실어줘.’

현 황후가 가장 손쉽게 힘을 얻으려면 성녀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해야 했다.

공개 예배를 열고 이능을 발한다면 더욱 좋을 터였다.

하지만 그 부분은 조금 더 신뢰를 얻고 난 후의 일이었다.

우선은 사라진 황후의 인장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아무래도 황태후 궁을 뒤져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황태후는 꼭 병증이 다시 도지기라도 한 듯,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제압하기엔 그녀의 지위가 너무 높았다.

이곳에서 황태후를 제압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쟈르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황제의 집무실로 걸어오는 쟈르스를 목격한 이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친 황제파 중에선 쟈르스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이까지 있었다.

하지만 쟈르스는 개의치 않고 집무실 앞에 선 시종에게 눈짓했다.

시종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쟈르스의 접근을 막았다.

“……저, 이곳은.”

“방문을 알려.”

“하지만 당신은,”

시종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집무실 안에서부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쟈르스인가? 들라고 해.”

시종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쟈르스가 안으로 들어가 문이 닫힐 때까지, 복도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집무실 내부는 평화롭기만 했다.

황제는 들고 있던 서류를 놓고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왔지? 필요한 것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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