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황궁에서 배운 것이라곤 모두 이러한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문제에 휘말리기 싫거든 문제를 일으키라는 식의.
‘제법인걸.’
세실레가 그를 탐색하는 사이, 쟈르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방문을 고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자세를 편히 해도 좋아.”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쟈르스가 자세를 바로 했다.
꼿꼿하게 선 등을 중심으로 두 발이 가지런히 섰다. 살짝 아래로 향한 시선은 세실레의 발끝조차 향하지 않았다.
완벽한 예법이 눈에 거슬리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흠 잡힐 것을 알고 미리부터 조심하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루베르를 걸고 넘어진 이였다.
‘게다가 황제의 편이고.’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세실레는 냉혹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무슨 일이지? ‘우리’ 루베르를 두고 할 말이 있다고 했다던데.”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쟈르스의 입가가 아주 살짝 떨렸다.
‘‘우리’ 루베르라니.’
대개 황족들은 누구를 총애하는지 쉬이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황후는 당당히 루베르를 총애하고 있음을 밝혔다.
즉, 소문을 숨길 생각도 없을뿐더러 그를 핑계로 얄현을 요청한 쟈르스를 곱게 보아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생각한 것보다 일이 더 꼬이려는 모양이었다. 쟈르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큰일 났군.’
보너스에 홀려 이런 일을 맡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고민하던 쟈르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기존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우선, 황후의 신임부터 얻기로 했다.
쟈르스는 황후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을 열었다.
“루베르 님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만, 신분도 없는 이가 황후궁에서 머무르는 건 법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실레는 쟈르스의 머리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만약 여기서 그가 법도 운운하며 루베르를 더는 황후궁에 들이지 말라는 시원찮은 말을 하면 바로 내쫓을 요량이었다.
황후의 시선이 어찌나 형형한지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쟈르스는 한숨을 삼키며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루베르 님께 임시 작위를 내리는 게 어떠십니까. 그리하시면 황궁에 도는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신관들에게도 같은 작위를 내려주심으로써 신권을 더욱 공고히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임시 작위라니. 의외의 제안에 세실레가 침묵했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젠가 루베르가 크면 임시 작위를 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쟈르스가 이런 제안을 해올 이유가 없었다.
쟈르스는 오롯한 황제의 사람이었다. 듣기론 황태후가 쟈르스의 가문을 인질로 잡고 협박할 때조차 변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갑자기 내 편을 드는 이유가 뭐지?’
세실레는 골몰히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에도 내게 유리한 제안이야.’
쟈르스의 행동은 곧 황제의 뜻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자신을 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부부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고 하기엔 서로 간에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힘을 실어주려는 건가?’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황태후가 쥐고 있던 권력은 이제 오롯이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권력을 양분할 필요가 없었다.
고민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실레는 더 생각하는 대신 쟈르스를 살폈다.
번듯한 얼굴이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얼굴은 잔잔한 웃음기만 머금고 있었다.
‘계산된 거겠지.’
세실레는 황궁의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특히 황궁 생활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경계했다.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을 가는 이들이었다. 쟈르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물어보면 그만이지.’
예전과는 달리, 그녀에겐 권력이 있었다. 세실레는 쟈르스를 심문하기로 했다.
거짓을 말한다면, 이능을 써도 좋으리라. 세실레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군. 그대가 왜 나를 도우려 하는지, 이유만 명확하다면 말이야.”
“그야 저는 신하,”
“신하 된 자의 의무라 말할 생각이라면 입을 다무는 편이 좋을 거야.”
허튼 말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투의 칼 같은 답이었다.
그 순간 쟈르스의 머릿속을 스치는 소문이 있었다.
‘황후께선 이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셨댔지.’
듣기론 불구도 치료하고 하늘도 날 수 있는 무한한 힘이랬다. 덕분에 황후가 세렌디 신의 현신이라며 시끌벅적하지 않던가.
그러나 아직 황후의 힘에 대해선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설마 생각도 읽으시는 건 아니겠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바깥을 흘긋 살폈다.
다행히 태양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황후의 힘은 밤에만 발한다고 했으니 아직은 괜찮았다.
‘다행이군.’
그가 내심 안도하는 사이, 답변을 기다리던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답이 늦는군.”
재촉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쟈르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세실레가 한발 빨랐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한 건 아니겠지?”
사실 세실레는 쟈르스가 무어라 말을 하든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애당초 그의 알현을 허락한 건 본보기에 불과했다.
쟈르스는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유명인사였다. 그가 알현에서 비난을 받았단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면 귀찮은 것들도 한발 물러서겠지.’
세실레는 황궁의 생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에 약했고 소문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것은 비교하는 거였다. 상대방에게 가치를 매기곤 비교우위를 재는 짓들.
그러기에 쟈르스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한땐 이런 자들을 경멸했지만.’
다시는 바보같이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지키기 위해 쳐낸다. 조금의 양심을 버린다면,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세실레의 입가에 조소가 머물렀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군.”
눈앞의 남자는 말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반박하려는 듯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선연히 보였다.
그녀는 쟈르스가 채 입술을 떼기도 전에 일갈했다.
“나가. 더는 듣고 싶지 않군.”
***
쟈르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었다. 정신을 차리니 알현실 밖이었다.
쫓겨난 것이다. 정신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황후에게 압도되어서.
“……이 내가. 쫓겨났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다는 듯 두 눈이 공허했다.
쟈르스는 연로한 의원들 앞에서도 막힘없이 연설을 이어갔다. 수십 개의 질문이 쏟아져도 말 한 번 더듬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일대일로 대면을 하다 쫓겨나다니. 머리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알현실에는 그와 황후,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후가 대동한 시녀와 기사, 그리고 서기관이 함께했다.
게다가 알현 내용은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 아니, 기록으로 남기도 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이번 알현은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쟈르스 님, 황후 폐하께 된통 깨지셨다면서요?”
그래, 지금처럼.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알현실 앞에 서 있는 쟈르스에게로 비서실 후배가 다가왔다.
안타깝다는 얼굴이 그를 면밀하게 살폈다. 후배의 시선이 달이 없던 때, 미친 자를 탐색하는 이들의 눈빛과 비슷했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경력에 이렇게 흠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쟈르스가 정상인 것 같다고 판단을 마친 후배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분명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너.”
“네, 네?”
“그 소문, 어디서 들었어.”
쟈르스의 매서운 눈빛에 후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흘끗 복도를 가리켰다.
내궁으로 향하는 복도였다. 내궁과 황후궁은 이어져 있으니, 황후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게 분명했다.
여기서 더 소문이 퍼지는 일은 막아야 했다. 쟈르스는 말없이 후배가 가리킨 쪽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동자는 황후에게 인정을 받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불타올랐다.
***
세실레는 알현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트집 잡았다는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덕분에 귀찮은 일을 덜었다.
그런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걸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뛰느라 생긴 소음이었다.
‘바쁜 일이 있는가 보지.’
세실레는 당연히 그 대상이 자신은 아닐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뒤편이 부산스러워졌다.
오고 가는 소리가 컸다. 개중에 언뜻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세실레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곧 엄한 표정을 지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싸늘한 눈초리가 쟈르스를 훑었다.
가쁘게 달려왔는지 쟈르스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밭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숨이 차든 말든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도리어 조금 전 가졌던 죄책감마저 사라질 정도로 무례한 행동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기서 타당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대로 매장될 터였다. 세실레 입장에선 잘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쟈르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경황이 없는지 고개를 들어 세실레와 눈을 마주했다.
두 눈에 담긴 결연함에 세실레는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겨우 숨을 돌린 쟈르스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오기와 집념으로 똘똘 뭉친 눈빛은 처절하게까지 보였다.
그에 세실레는 옅게 이마를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소문이 나도 조금 곤란하고 말 일이었다. 이렇듯 목숨 걸고 달려들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저리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실레는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례하군. 대화는 끝난 것으로 아는데.”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폐하.”
“내가 왜 그래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