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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26화 (2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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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낯은 새하얗게 질려 꼭 시체 같았다.

반론조차 꺼내지 못하는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비틀린 웃음을 지우지 않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로군요.”

“…….”

“그야 당연하죠. 저는 단 한 번도 죽었던 적이 없으니까.”

충격적인 대화에 황태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곧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게 무슨. 넌 분명 그때 아기였어! 아니, 내 배로 널 낳았단 말이다!”

소용없었다. 이미 아르베우타는 황태후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몹시 노여워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찌푸리고 있었다. 기세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기묘한 위압감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제야 조용해진 황태후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선뜻 입을 뗐다.

“당신이 불임인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뭐?”

“모른다고 믿고 싶었겠지.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외양만 어리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세실레와 나이를 맞출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황태후는 지금 아르베우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당시 관련자는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어디서 말이 샜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그녀는 아무런 권력이 없었다. 여기서 내쳐지면 그야말로 끝이었다.

황태후는 어떻게든 방도를 찾으려 떨리는 음성으로 애원했다.

“그, 그래. 네 말이 맞아. 부정은 안 하마. 그래도 고아인 네가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전부 내 덕이지 않니?”

아르베우타의 눈동자가 무미건조했다. 그는 마치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셨나 보군요. 황제가 된 것은 제 의지하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애초에 당신의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는 겁니다.”

“나,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게다가 당신. 선황제를 독살하라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황태후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조차 잊고 있던 과거를 황제가 꺼낸 탓이었다.

넋을 놓은 황태후를 두고 아르베우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쥐었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마지막 가는 길, 그 정도 소원은 들어 드리죠.”

***

“이건 뭐야?”

“사과!”

“이건?”

“딸기!”

“똑똑하네.”

세실레의 칭찬에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걸 칭찬한다는 듯, 뚱한 표정에 세실레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그럼, 루베르는 뭐가 좋아?”

“루베르는 딸기.”

“좋아. 그럼 우리 딸기 먹자.”

“응, 조아요!”

루베르가 입을 벌렸다. 세실레는 거리낌 없이 포크로 딸기를 찍어주었다.

역사상 황후가 누군가에게 손수 먹을 걸 주는 경우가 없었다. 친자식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도르데아는 이를 말려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세실레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오물오물 딸기를 베어먹는 루베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솔직한 감상으로 루베르는 보는 맛이 있었다. 귀엽고 살가웠다.

그녀의 무료한 일상에 한 줄기 빛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세실레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맛있어?”

“웅! 마시써요.”

“또 먹을까?”

“웅!”

세실레는 또다시 딸기를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루베르는 주저하지 않고 딸기를 앙 물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 잠시 바깥소식을 듣고 온 도르데아가 다가와 말했다.

“폐하.”

“왜?”

“수석 비서관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수석 비서관? 델링켄 백작 가문의 쟈르스를 말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세실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쟈르스 비서관은 일 외에는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회귀 전에도 그가 저를 찾은 적은 없었다. 바쁜 사람이니 그 사실이 딱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세실레는 모든 알현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던 차, 도르데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저……루베르 님과도 관련된 일이라며 꼭 만나 뵙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루베르랑 관련되어 있다고?”

“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세실레는 쟈르스 비서관의 접근 방식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루베르를 걸고넘어져?’

그가 똑똑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세실레가 모든 알현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겠지만.’

쟈르스의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루베르를 입에 담지 않았다면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루베르의 이름이 오르내릴수록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 또한 많아질 터였다.

어릴 적의 세실레처럼.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또 당할 거야.’

황궁이란 그런 곳이었다.

다행이라면 전과는 달리, 권력을 휘두를 명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생각을 마친 세실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네?”

“내일 오후에 시간이 된다고 전해.”

의외의 대답에 도르데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간 모든 알현을 거절해왔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알현을 잡으라니. 얼떨떨해진 도르데아는 저도 모르게 세실레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세실레의 표정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긴 했지마는.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스산하지.’

그새 도르데아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황후가 무언가 단단히 결심을 내린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도르데아는 대답을 마치곤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시녀를 통해 전해도 되건만 굳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유 모를 살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저를 향한 살기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몸이 떨렸다. 바짝 긴장된 탓에 머리가 어찔했다.

저릿저릿한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편 도르데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 모습에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그래서 무어라 전하면 됩니까?”

“내일 오후에 가능하시다더군. 구체적인 시간은 내일 전해주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시종이 소식을 전하려 몸을 돌렸다. 그를 가만 보고 있던 도르데아가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다 겨우 말을 꺼냈다.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니 조심하라고도 전해주게.”

시종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

쟈르스가 알현 허락을 받아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황후가 자발적으로 하는 첫 공적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궁 내는 물론이고 변방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사방이 떠들썩했다.

소문의 당사자인 쟈르스 또한 덩달아 입에 오르내렸다.

***

쟈르스는 산더미같이 쌓인 편지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소식 참 빠르군.’

고작 하루 사이에 얼마나 많은 편지와 요청이 들어왔는지 모른다. 이번 기회를 통해 어떻게든 황후와 연을 맺어보려는 무리였다.

다들 세력이 대단한 자들이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거절하더라도 그럴듯한 형식을 갖춘 편지를 보내야 뒷말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덕분에 귀찮은 일이 배로 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쟈르스는 태연한 척 서류를 팔락이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언뜻 보면 업무에 집중한 표정이었지만 황제의 시선은 계속해서 같은 페이지만 훑고 있었다.

위아래를 훑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오늘 쟈르스가 황후 폐하를 알현한다는 사실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정 그러면 직접 만날 것이지.’

쟈르스는 황제의 명을 받고 알현 약속을 잡았다. 바쁜 와중에 일거리를 더 얹어준 셈이었다.

그 대신 황제가 쟈르스의 일을 대신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라면 택도 없었다.

혼자 일을 떠안을 기세였다. 결국 쟈르스는 초강수를 두기로 했다.

“제가 올 때까지 일을 끝마치지 못하시면 알현 내용은 비밀로 할 겁니다.”

그제야 아르베우타의 눈동자가 명료해졌다. 서류를 넘기는 손길이 배로 신경질적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아르베우타가 짜증을 삼키며 대답했다.

“알겠으니까 잘하기나 해.”

“그게 가장 문제입니다. 도르데아가 전하길, 황후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다더군요.”

“아이 신관 때문에?”

“정확한 지적이시군요. 알면서 제게 명령하신 모양입니다.”

쟈르스가 헛숨을 삼켰다.

황제는 자기 일이 아니랍시고 황후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 분노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사람은 쟈르스, 본인이었다.

귀환 후,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황후였다. 그녀의 눈 밖에 났다가는 사회적 매장을 넘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 파묻혀 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왜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는.’

쟈르스의 착잡함을 읽어냈는지 아르베우타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너스, 두 배로 주지.”

“……돈이면 다 되는 줄 아십니까.”

“적어도 너는 그렇잖아.”

명확한 지적에 쟈르스는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 배, 주십시오.”

***

쟈르스는 알현 준비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시녀가 다가와 황후의 허락이 떨어졌음을 알렸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서둘러 외궁의 알현실로 간 쟈르스는 문을 앞두고 여러 번 심호흡했다. 그런 다음, 문 앞을 지키고 선 시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문을 알릴까요?”

고갯짓에 시녀가 그의 도착을 알렸다. 곧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쟈르스는 안으로 들어가 공손히 인사했다. 어디도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예의범절이었다.

그러나 세실레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루베르의 이름을 들먹인 쟈르스를 멀쩡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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