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새로운 곳?”
“네. 시녀들이 추천해준 곳입니다.”
테레사의 당당한 목소리에 세실레는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입을 뗐다.
“네가 언제부터 시녀들과 어울렸다고…….”
“저도 친한 시녀가 있습니다.”
“거짓말 마. 나도 귀가 있는데.”
세실레의 단호한 일축에 테레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테레사는 황실 내에서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저 때문임을 알고 있는 세실레는 뒤늦은 사과를 전했다.
“미안,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
“……그럼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그래, 어딘데? 오늘은 그곳에 가자.”
세실레의 선선한 대꾸에 테레사는 안도하며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좀 멉니다. 반대 방향이거든요.”
“그래. 이쪽이라는 거지?”
“네.”
세실레가 몸을 틀고 나서야 테레사의 시선이 원래 가려던 방향을 향했다. 그곳엔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그는 커다란 덩치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케이크 상자를 든 채였다.
‘허튼수작을 부리는군.’
테레사는 형형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 몸을 팩 돌려버렸다.
***
테레사가 베이커리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세실레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녀는 슬쩍 베이커리 쪽을 훑었다.
베이커리 골목 옆에 아르베우타가 서 있었다.
‘그 때문이군.’
무슨 일인지 케이크 상자까지 든 채였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설령 저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곤 테레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아르베우타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괜스레 달싹이던 입술도 금세 다물렸다.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케이크 상자를 쥔 손아귀에 힘이 가득 실리다, 이내 맥없이 풀렸다.
세실레의 자취를 좇던 눈동자가 허공을 배회했다. 붉은 눈이 끝없는 갈증에 메말라갔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인내해야만 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으므로.
지독히 뜨거운 피가 몸 구석구석을 휘돌아, 그의 심장을 더욱 거칠게 휘어잡을수록.
지독한 마기에 홀린 뇌가 정신을 잃고 그녀를 취하라며 유혹하지 않도록.
그리해서 또다시 반복된 비극이 이어지지 않도록. 그는 인내하고 또 기다릴 예정이었다.
상자를 쥔 팔에 핏줄이 돋았다.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늘어졌다. 어둑했던 하늘이 차츰 붉게 물들었다.
아르베우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벌써 아침이군.”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다.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이젠 또다시 일상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그것이 참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며 아르베우타는 황궁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
쟈르스는 안색이 창백한 황제를 보며 혀를 찼다.
밤새 황후의 뒤를 쫓다 버림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알려주지 말 것을.’
황후를 만나고 나서, 정신을 좀 차리란 뜻이었는데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이럴 땐 잔소리를 하는 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쟈르스는 한숨이 흐르려는 것을 겨우 삼키며 말을 이었다.
“뭘 하시느라 이제 오십니까.”
“……이거나 먹어.”
“이게 뭡니까?”
쟈르스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다. 고급스러웠을 케이크 상자는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겉 포장이 이러하니 안의 내용물은 안 봐도 빤했다.
그는 상자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곤 빤한 사실을 입에 담았다.
“또 차이셨습니까.”
쟈르스에게 있어 황제의 개인사야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가 넋 놓고 업무에 소홀히 한다면 말이 달라졌다.
황제를 따라 야근, 특근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비서관들의 비난까지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이미 한 명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뒤였다.
‘정시 퇴근은 이미 물러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상실감에 빠진 주군이 기운 차릴 수 있도록 정신없이 일을 던져주는 것이 신하의 도리였다.
그는 자비 없이 상체만 한 서류뭉치를 들었다. 그러곤 패잔병처럼 앉아있는 아르베우타의 앞에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바깥바람 쐬셨으니 이제 일하십시오.”
“너는 진짜…….”
“못 주무셨단 말은 마십시오. 이 년 동안 괴물처럼 버티시던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아르베우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답하기도 귀찮다는 투였다.
그는 묵묵히 깃펜을 쥐곤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순순히 일을 시작하는 모습에 쟈르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맺혔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르베우타가 돌연 펜을 내려놓더니 시종을 부른 것이다.
“……황후는 무얼 하고 있다던가.”
“황후궁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렇군. 같이 점심을 하자고 전해주게.”
“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쟈르스가 혀를 찼다.
매일 일과가 같았다. 그러니 시종이 들고 올 답도 빤했다.
‘시간이 없다고 거절하시겠지.’
예상대로 시종이 같은 답을 들고 왔다. 말하는 것조차 민망한지 말꼬리를 늘인 채였다.
“저, 그것이…….”
“바쁘다던가?”
“그렇습니다.”
황후궁에서 쉬고 있으면서 함께 식사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말없이 펜을 들뿐이었다.
쟈르스는 보조 테이블에서 그를 지켜보다 서류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도 야근 확정이었다.
‘주인 잘못 만난 죄지, 죄.’
쟈르스가 남몰래 구시렁거리기도 잠시,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이 말을 꺼냈다.
“폐하, 황태후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알현을?”
내내 굳어있던 아르베우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벌써 바깥을 돌아다닐 정도라니.’
거동조차 힘들 정도라고 보고 받은 것이 엊그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기저기를 쏘다닌다. 어제 전달받은 소식을 상기하던 아르베우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제 황후궁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지?”
“네, 멋대로 침입하려던 것을 테레사가 입구에서부터 막아섰다 들었습니다.”
“잘됐군.”
아르베우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지금 당장 가지.”
***
아르베우타는 오래간만에 황태후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전과 달리,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눈가엔 그늘이 드리웠고 얼굴은 살이 빠져 수척했다. 그나마 최근엔 휴식을 취했던지 뺨에 혈색이 조금 돌았다.
엉망이었던 손톱도 곱게 다듬어진 뒤였다. 이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그나마 사람 꼴을 한 셈이었다.
아르베우타는 그런 황태후를 내려다보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서 그녀가 너스레를 떨며 별 시답잖은 말을 하면 바로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더는 황태후의 농간에 발맞춰줄 생각도, 필요도 없었다.
지난 이 년간, 황태후의 세력은 모두 사그라들었고 친 황제파가 기득권을 장악했으니까.
그를 황태후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소소한 인사말을 먼저 꺼냈다.
“그간 잘 지냈느냐?”
“네, 잘 지냈습니다.”
별달리 이어질 말이 없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아르베우타는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
찻잔을 다 비우면 자리를 뜰 예정이었다. 사위를 물린 탓에 찻물을 채워줄 시녀도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단숨에 뜨거운 물을 삼켰다. 그러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르베우타가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다급해진 황태후가 성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황후는 어떻게 지내느냐?”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냉랭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황태후는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힘들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꼭 만나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아르베우타는 침묵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황태후는 자존심 따윈 내팽개쳤는지,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나는 용서를 빌어야 해.”
“그게 무슨 소리…….”
아르베우타는 뒷말을 삼켰다. 그가 알기로 더는 악령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황태후 또한 심신의 안정을 얻은 게 아니던가.
그런데 갑자기 용서해달라니, 비단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다른 일이 있는 건가.’
고민은 잠시였다.
아르베우타는 어제, 황태후가 황후궁의 계단조차 밟지 못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렇다는 건 세실레가 황태후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아르베우타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몸을 돌렸다. 냉정한 반응에 황태후가 다급히 그에게 매달렸다.
마지막 기회라 여겼는지 파리한 얼굴엔 오기마저 어렸다.
“그, 그럼 가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봐 줘. 무슨 답을 알고 있단 건지! 단서라도 달라고 하란 말이야!”
“……단서?”
“그래. 그 기사가 그랬어. 답은 내가 알고 있다고. 그런데 나는 도통 모르겠단 말이다. 그 애가 날 괴롭히려고 거짓말을 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아가. 넌 내 아들이지 않니?”
절박한 표정에 아르베우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거짓말을 할 정신이 남아있나 보군.’
아르베우타는 몸을 돌려 황태후를 돌아보았다. 낯엔 온화한 기색이 머물렀다.
갑작스레 달라진 분위기에 황태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르베우타는 손을 뻗어 황태후를 품에 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그, 그래.”
“당신은 절 낳으신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