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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24화 (24/110)

24

아르베우타는 행선지를 확인하고도 계속 자리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망부석 같은 그를 보며 쟈르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비꼬았다.

“이대로 가만히 계셔도 상관없기는 하죠. 테레사란 기사한테 황후 폐하를 빼앗길지도 모르지만.”

“……뭐?”

아르베우타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쟈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안경을 고쳐 쓰며 묵묵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후 폐하를 엄마라 부른다는 이도 신관, 그 곁을 지키는 기사도 신수라면서요. 곧 달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르베우타는 숨을 들이켰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펜듈럼의 저주가 희미해졌다는 사실과 세실레의 귀환에 안주해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세실레가 모든 걸 알고도 이곳에 머무를까.’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이라면 세실레는 떠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물밀 듯 쏟아졌다. 결국 아르베우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는 내내 쥐고 있던 펜듈럼을 내려놓았다. 이런 것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그는 황급히 서둘렀다. 바삐 움직이는 아르베우타를 보며 쟈르스가 혀를 찼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집무실 문은 닫혀버린 뒤였다.

***

황실을 빠져나온 아르베우타는 시내에 섞여들었다. 사복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워낙 기골이 장대한 데다 분위기가 사나워서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흘끗흘끗, 그를 훑는 시선이 점점 많아졌다.

‘이러다가 수색이라도 당할 판이군.’

황후가 돌아왔으니 수도의 치안을 강화했다. 불시 검문 또한 마다하지 말라고 했다.

제 명령에 발목이 묶일 판이었다. 지금도 경비병 여럿이 그를 수상쩍게 보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아르베우타는 손에 쥔 쪽지에 적힌 가게를 발견하곤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다홍빛 간판을 단, 아기자기한 베이커리였다.

“어서 오세요!”

아르베우타는 정렬된 디저트를 낯선 표정으로 응시했다.

색색의 디저트를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그러고 있으니 입가에 엷은 웃음이 맺혔다.

‘취향은 여전하군.’

세실레는 단 음식을 좋아했다. 새삼스레 떠올린 사실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추억이 머릿속을 어른거렸다.

***

오키드리아 대륙은 유일하게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 대륙이었다.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은 날뛰는 악령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제정신인 사람보다 미친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낮 동안 패거리를 혼자 상대한 아르베우타는 깊은 상처를 입곤 숲으로 숨어들었다.

“헉, 허억.”

갈수록 숨이 거칠어졌다. 곧 밤이었다.

숲의 들짐승에게 물려 죽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거리로 나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테니까.

그는 상처 부위에 약초 가루를 뿌리곤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댔다. 잘 버텨왔으나 이젠 한계였다.

슬슬 그에게도 악령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곧 죽겠군.’

그가 조소했다. 벌써 피 냄새를 맡았는지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아른거렸다.

너무 지쳐 은신처를 찾을 여유조차 없었다. 한숨이 흘렀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지척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아르베우타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물도 다 떨어졌다. 살려면 물가로 가야 했다.

‘차라리 잘 됐군.’

그는 이를 천운이라고 여겼다. 상처를 치료할 때까지 물이 있는 곳에서 버티면 그나마 생존이 수월할 터였다.

아르베우타는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고 위협을 받을지 몰랐다. 그의 몸엔 힘이 바짝 들어있었다.

그가 막 수원지에 다다랐을 무렵,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는 물가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낯을 굳혔다. 입에선 채 정제되지 못한 욕설이 흘렀다.

‘하필이면 이럴 때.’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큰 부상을 입은 터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르베우타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곤 숨을 죽였다. 수풀 사이를 살피는 눈동자가 신중했다.

물가에는 웬 여자가 있었다.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가녀린 몸이었다.

실용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얇은 옷은 밤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미친 자인가.’

아르베우타는 한 번 더 그녀를 살폈다. 여자는 악령에 홀린 사람이라고 보기엔 생김새도 옷차림도 너무나 멀끔했다.

아니, 멀끔한 정도가 아니었다.

밤 중에도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 눈부셨다. 지상의 아름다움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긴 속눈썹이 나풀대듯 감겼다 뜨였다.

보기 드문 새하얀 피부엔 상처 하나 없었고 은은한 혈기를 머금은 뺨엔 옅은 웃음이 어렸다.

심지어 피부와는 대조되는 붉은 입술은 꽃을 물고 있었다.

‘……꽃?’

아르베우타가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아르베우타를 발견하고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 저 그게…….”

“…….”

“꽃에는 꿀이란 것이 있대서요.”

부끄러운지 변명을 시작한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고 있던 꽃송이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순간 아르베우타는 무심코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호숫가에 뜬 달이 묘연해선지, 아니면 이상한 여자가 부린 마법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호감과 긴장 사이를 오가는 감각이 영 낯설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자신의 감정에 무심한 편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호수로 다가가 수통에 물을 채웠다. 그러고 있으니 여자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이 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 생각한 아르베우타가 지나가듯 말했다.

“꽃에 꿀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장난삼아 갖고 노는 정도입니다.”

“……그런가요.”

그의 말에 여자는 꽤 실망한 듯 보였다. 속상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아르베우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마침 제게 꿀이 있는데, 조금 드릴까요?”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꿀은 매우 귀중한 치료제이자 식량이었다.

게다가 꿀을 얻으려면 꿀벌에 쏘일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정체 모를 여인에게 베푸는 호의로는 과했다.

하지만 일말의 후회조차 여자의 화사한 웃음에 의해 사라졌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해맑은 웃음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말간 얼굴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아르베우타의 얼굴엔 당혹이 어렸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아르베우타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이마에 손을 댈 뿐이었다.

“그런데 괜찮으신가요? 열이 나는데요.”

아르베우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여자의 손을 쳐낼 뻔하던 것을 겨우 참았다.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해졌다.

그러나 경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의 손이 닿은 이마부터 시작해서, 찬물이 끼얹어진 듯 춥더니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졌다. 심지어 상처도 순식간에 나았다.

아르베우타가 놀란 얼굴로 여자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선선한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꿀을 주신다면서요? 그 보답이에요.”

***

“……그랬었지.”

과거를 떠올리던 아르베우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이었다. 당시의 상황과 표정이 그의 머릿속에서 훤하게 재생되었다.

그만 기억하는 과거였다. 세실레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미 몇 번이고 단념한 뒤였으니까.

그래서 그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렇듯 불쑥 떠오를 때면 심장이 조이듯이 저렸다.

‘케이크라.’

아르베우타는 멍하니 진열대를 바라보다가 무심코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심상찮은 분위기에 몸을 사리던 직원이 선뜻 다가와서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포장해드릴까요?”

아르베우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곧장 케이크를 아기자기한 상자에 담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상자를 받아든 그는 순간, 가슴이 울컥 뛰는 것을 느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고작 이런 것으로 내내 짓밟았던 심장이 꿈틀댔다.

상자를 뜯어 세실레와 같이 케이크를 먹는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함께 할 이는 생각조차 않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르베우타는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케이크 상자를 쥔 손에 땀이 가득 찼다.

***

세실레는 어김없이 밖으로 나갔다. 뒤에는 불퉁한 표정을 짓는 테레사도 함께였다.

테레사의 불만을 모를 리 없는 세실레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싫으면 안 따라와도 된다니까.”

“하지만 혼자는 위험합니다.”

“음,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너보다 강할걸?”

단호한 말에 테레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세실레가 흘러가듯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신관들에게 맡기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걔넨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애들이잖아. 무엇보다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하고 싶어서 한다. 얼핏 보기엔 책임감 없이 들리는 말이었지만, 세실레에게 밤 산책은 중요했다.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은 이들을 돌본다는, 알량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행위는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을 치유할 때, 그들의 미소를 볼 때면 마음이 따스해졌다. 마치 자신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 힘으로 낮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원망과 미움은 뒤로 한 채,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세실레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히자 무어라 대꾸하려던 테레사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그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세실레를 불러세웠다.

“폐하.”

“왜?”

“실은 제가 새로운 베이커리를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그곳으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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