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불근 새?”
“응, 맞아. 네 눈엔 보이는구나?”
한 번도 아이의 앞에서 변신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단번에 꿰뚫어 본다.
‘심상찮은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세실레가 아이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다른 신관들과 달랐다.
사람들은 아이가 꼭 세실레와 닮았다고 하지만, 외양뿐이었다.
세실레의 눈에는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미묘한 붉은 기운이 눈에 띄었다.
섬뜩하리만치 강한 힘. 하지만 은빛을 휘도는 붉은 기운 또한 신력이었다. 아이는 세렌디 신이 보낸 아이가 맞았다.
‘곁에 두고 지켜봐야겠어.’
왜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밝힐 때까지 곁에 둘 생각이었다.
세실레가 고민에 잠겨 있자 아이가 손을 뻗어 세실레의 소매를 당겼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테레사가 불근 새 이르미야?”
“응.”
“그럼 나눈?”
“너?”
“응, 내 이르믄?”
아이의 질문에 세실레는 잠시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었다.
사실 그건 다른 신관들도 매한가지긴 할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물어보는 데 없다고 하기도 뭐하고.’
그랬다간 저 큰 눈을 글썽이다 또다시 울음을 터트려 버리겠지. 세실레는 침묵했다.
그러나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세실레가 머뭇거리는 것으로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아이가 우물대던 입술을 콱 물었다.
은백색의 속눈썹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윽고 먹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름도 업서?”
“그게…….”
세실레는 곤란한 듯 뒷말을 삼켰다.
그녀가 침묵하자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늘진 얼굴 아래로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고민하던 세실레는 손을 뻗어 아이의 눈가를 훔쳤다. 그새 하얗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세실레는 토라졌는지 팩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이의 등을 도닥이며 물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이르믈?”
“응. 너만 괜찮다면.”
세실레의 물음에 아이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세실레가 곧장 입을 열었다.
“루……베르는 어때?”
“루베르?”
“응,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이름을 이렇게 지어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세실레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감돌았다.
‘좋아할지 모르겠네.’
기다림이 길었다. 아이는 잠시 입술을 말더니 이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 조아! 루베르 조아!”
아이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마냥 기쁜지 손가락만 꼬물대다 방긋 웃었다.
“루베르. 나눈 루베르야.”
“그래. 루베르.”
“응.”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세실레는 한참이나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소란스럽던 정원도 잠잠해졌다.
하지만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는 루베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루베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엄마. 나 안 가면 안 대여?”
어린 신관이 황궁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황실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점도 있었지만, 신관으로서의 교육도 받아야 했다.
‘성녀님, 아이가 밤이 되면 꼭 신전에 돌려보내 주십시오.’
대신관의 당부를 떠올리던 세실레는 루베르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루베르,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보자.”
“히잉, 가기 시른데…….”
“대신, 아침엔 다시 와도 돼.”
“아침에? 엄마가 데리러 오꺼야?”
“그래.”
“으응, 그럼 나 갈게. 나 차칸 아이지?”
세실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만 말았다. 그러곤 아이를 데려다주라며 시녀들을 향해 눈짓했다.
하지만 루베르는 세실레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손힘이 아이답지 않게 강했다. 결국 도르데아까지 달라붙어서야 작은 손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 오기로 버티던 루베르의 입에서 허망한 음성이 흘렀다.
“으우.”
“루베르. 일부러 그러면 못 써.”
“하지마안.”
“안 돼. 가서 수업도 들어야 한 대. 그래야 멋진 신관이 되지.”
“웅…….”
루베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 여전히 가기 싫은 모양이었지만, 더 여지를 주어서야 루베르만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세실레는 단호한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잘 자고 내일 보자.”
“……네.”
루베르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시녀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세실레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있으면 해가 질 터였다. 이 지겨운 황궁을 잠시 떠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
세실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외출복 좀 가져다줘.”
시녀들이 고개를 숙인 뒤 바삐 발을 놀렸다. 그녀의 행보를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루베르의 존재는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르베우타 또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세실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인해야 하는 서류가 잉크로 흠뻑 젖어 들 때까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멍한 주군을 지켜보던 쟈르스의 미간에 금이 갔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
“정 궁금하시면, 자리를 만들어보십시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반쯤 썩은 생선의 것과도 비슷했다.
쟈르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는 황제의 불성실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대로면 내가 먼저 과로사하겠군.’
그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쟈르스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아르베우타가 든 서류를 살폈다.
아르베우타가 든 서류엔 가짜 문서가 숨겨져 있었다. 만약 가짜 문서를 알아보지 못하면, 현 상황의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줄 생각이었다.
‘지금이로군.’
때마침 가짜 문서가 나타났다. 쟈르스는 침묵한 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섰다.
문서는 쟈르스가 직접 손을 본 것이었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무엇이 틀렸는지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교묘히 꾸민 서류였다.
물론, 아르베우타가 죄를 묻는다면 꼼짝없이 감옥행이었다. 하지만 쟈르스에게선 두려움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는 황제가 잘못된 거지.’
마침 다음 장을 넘기던 아르베우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가 빽빽하던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쟈르스에게 내밀었다. 동시에 삐뚜름하게 섰던 쟈르스 또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거.”
“왜 그러십니까.”
“이상한데.”
“어디가 말입니까.”
넋 놓고 도장만 찍어대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황제가 제법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쟈르스의 눈동자에 영악한 빛이 깃들었다.
황제는 아직 1단계 테스트를 통과했을 뿐이었다. 2단계는 문건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3단계는…….
“지르코스 지방에서 세금이 고작 이것밖에 안 걷혔다고? 거긴 세율이 서부보다 0.6% 높은 곳 아닌가? 그보다 이거.”
“…….”
“네가 위조했지.”
“제법이시군요.”
쟈르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항복 의사를 표하듯 두 손까지 들어 올린 채였다.
뻔뻔한 작태에 아르베우타는 어이가 없었다. 황제를 상대로 이런 짓이라니.
삼대를 멸해도 할 말이 없는 대역죄였다.
그는 쟈르스를 가만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지 찌푸려진 미간이 깊게 팼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제대로 일을 하고 계신 게 맞는지 의심이 가서요.”
“다 읽고 있었잖아.”
“비서실은 항상 완벽하니까요. 도장만 찍으신다 해도 차질은 없었을 겁니다.”
“하여간 말 한마디 지는 법이 없군.”
평소라면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 당부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힘마저 없었다.
아르베우타는 피곤한지 연신 독하게 우려낸 차만 들이키자 쟈르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만나서 물어보면 해결될 일입니다.”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부부의 도리라는 게 있었다. 적어도 아르베우타에게만큼은 해명할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실레가 만나기 싫다잖아.”
“폐하께서 언제부터 그리 신사적이었다고요.”
“……너.”
“죄송합니다. 하지만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다.”
쟈르스의 호소는 진심이었다.
일만큼은 칼같이 처리하던 황제가 꼭 아슬아슬한 흔들다리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황후가 돌아오고, 다시금 제국에 활력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이때, 저런 태도는 독이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말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만약 정말로 세실레의 아이라면.’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신관이라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남아인데도 인형처럼 예쁜 데다, 세실레와 같은 은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고 했다.
‘어떡하면 좋을지.’
무엇보다 펜듈럼이 아직 불안정했다. 이럴 때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그는 금이 간 펜듈럼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매끈한 겉면에 움푹 팬 흠이 만져졌다.
흠을 통해 마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다행이라면, 세실레의 귀환으로 정화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펜듈럼도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때 가서 물어봐도 됐다. 그것도 아니면, 신전에 몰래 침입해 알아내도 됐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르베우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쟈르스가 품에서 무언갈 꺼내어 내밀었다.
“제가 황후 폐하의 행선지를 알아 왔습니다.”
“행선지?”
“예, 아시겠지만 황후 폐하께서 매일 밤 외출하지 않습니까. 황후궁의 시녀에게서 직접 건네받은 것입니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아르베우타가 잽싸게 쪽지를 낚아챘다.
쪽지를 훑는 눈빛이 며칠을 굶긴 맹수처럼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