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엄마?”
“엄마아.”
아이가 세실레의 품에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허리 품을 끌어안은 손아귀 힘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야무졌다.
세실레는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자 대신관이 허겁지겁 다가와 아이를 떼어내고자 했다.
“이, 이런.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직 미숙하여…….”
“시러! 시러어! 엄마, 엄마!”
하지만 아이는 발작하듯 울음을 터트리며 더욱 품에 안겨들었다.
엉엉 울어대는 울음소리가 서럽기 짝이 없었다. 덩달아 세실레의 웃옷도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세실레는 잠시 고민하다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스스럼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쉬이, 괜찮아. 울지 말렴.”
“엄마아?”
“……그래.”
세실레의 확답을 듣자마자,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울던 아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져갔다.
***
갑자기 곤란한 존재가 생겨버렸다.
세실레는 저를 엄마라고 철석같이 믿는 아이를 바라봤다. 그는 그 이후로 계속 세실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벌써 황후궁이었다. 망설이던 세실레는 고개를 틀어 겨우 말을 꺼냈다.
“……저기.”
“왜여, 엄마?”
아이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눈동자는 신뢰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사실 나는 엄마가 아니란 식의 말을 꺼냈다간 또다시 울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세실레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대신관이 다가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또한 지금 상황이 몹시 곤란한 듯 보였다.
“저, 제가 책임지고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으으…….”
아이는 대신관이 다가오자마자 두 눈을 글썽였다. 마치 동아줄이라도 쥐듯 다른 손으론 세실레의 치마를 꼭 붙잡은 채.
그러는 중에 황후를 맞이하러 나온 도르데아가 그들을 보고야 말았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세실레와 아이를 번갈아 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폐하.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아, 이 아이는.”
“엄마아…….”
아이의 목소리에 도르데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서 변명했다간 아이가 다 들어버릴 터였다.
‘그러곤 또 엉엉 울겠지.’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실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예에?”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립미다아.”
세실레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이가 앞으로 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깊게 굽힌 허리가 야무졌다.
예상치도 못한 예의 바름에 도르데아 또한 마주 서 인사했다. 도르데아가 허리를 굽히자 뒤에 섰던 시녀와 기사들마저도 고개를 숙였다.
난데없는 인사 행렬은 세실레가 아이를 들어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
세실레의 발언에 황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황제와 첫날밤도 보내지 않았다 알려진 황후가 갑자기 아이를 데려왔다. 그런데 그 아이가 황후더러 엄마라 불렀단다.
충격적인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나갔다.
“그…… 들으셨습니까?”
“아, 어린 신관 말입니까.”
“예. 망측하게도 황후 폐하를 엄마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신다고…….”
세실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 갖는 이는 넘치도록 많았다. 게다가 황궁을 돌보는 시비들의 수만 수백이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완전히 숨길 방법 따위는 없었다. 소문의 당사자인 세실레조차 숨길 생각이 없기도 했고.
곤란한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도르데아는 소문을 막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하지만 세실레와 아이 신관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세실레는 도르데아를 향해 대수롭잖은 표정으로 달래기까지 했다.
‘신경 쓰지 마. 별일 아니니.’
‘별일이 아니라니요?’
‘내가 원하는 일이란 뜻이야, 도르데아. 내 말뜻 이해하지?’
그 후로 도르데아는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황후궁의 시녀들도 침묵했다.
덕분에 세실레와 아이 신관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것도 먹어볼래?”
세실레는 아이의 앞에 초콜릿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아이가 입을 벌려 앙, 초콜릿을 낚아챘다.
그 모습이 꼭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와 맛있게 받아먹는 아가 새 같았다. 귀여운 모양새에 시녀들의 입가에도 훈훈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분 너무 닮아서 진짜 모자지간 같으세요.”
“그래?”
“네, 너무너무 잘 어울리세요.”
시녀가 답지 않게 사족을 덧붙였다. 주위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래간만에 고요하던 황후궁이 시끌벅적해졌다. 도르데아 또한 그들을 제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황후궁 가득 온기가 맴돌았다. 평온한 분위기에 세실레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는 세실레를 가만 보다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엄마.”
“응?”
“기분 조아?”
입안 가득 초콜릿을 우물댄 탓에 입가가 얼룩덜룩했다.
세실레는 손을 뻗어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응. 기분 좋네.”
“으응, 그러면 나도 조아.”
동시에 아이의 입가에도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눈이 감기며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볼을 힘껏 끌어올리며 웃은 덕에 뺨에 혈색이 돌았다.
마냥 해맑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천진한 웃음에 세실레의 눈꼬리도 자연스레 접혔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내내 조심스레 상황을 살피던 도르데아의 입가에 마저 웃음이 맺힐 정도였다.
하지만 이 상황이 영 못마땅한 사람이 있었다. 테레사였다.
그녀는 내내 정체 모를 어린 신관의 행동거지를 샅샅이 살피는 중이었다.
‘……뭐지?’
테레사가 따로 대신관에게 물어본 바로는 세실레가 방문한 날, 갑자기 어린 신관이 나타났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의 목덜미엔 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을 보면 신관인 건 확실한데.’
테레사는 문양을 손수 확인했다. 문양에 위조나 거짓된 흔적은 없었다.
게다가 어린 신관이 뿜어내는 힘은 명백히 세렌디 신의 것이었다,
그마저도 범상치 않았다. 고농도의 신력이 가득 응축되어 있었으니까.
그 힘이 어찌나 정순했던지 세실레마저 잠시 아이의 신력에 홀렸을 정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아이는 분명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순한 힘끼리 서로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린 신관이 별달리 세실레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세실레를 엄마라 부르며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가 아이에게 의지를 부여해주었으니,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로는 충분히 그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눈에 거슬리지?’
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아이는 신관이었다. 그렇다면야 세실레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꾸만 묘한 의심이 일었다.
‘……일단은 지켜만 보자.’
아이 신관이 가진 신력은 매우 두드러졌다. 게다가 세실레가 신관들에게 마음을 주는 건, 테레사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테레사는 아이에게서 눈을 뗐다.
대신 며칠 전부터 황후궁 앞을 알짱거리는 불청객이 찾아온 걸 눈치채곤, 눈살을 찌푸렸다.
‘또 찾아왔군.’
테레사는 혀를 차며 도르데아에게 다가갔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자리를? 그러게.”
어지간해서는 세실레의 곁을 떠나지 않는 테레사였다. 언제 먹고 자는 건지 모를 정도로 그녀의 호위는 철통같았다.
그런 만큼 테레사가 자리를 비우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다. 도르데아는 무언가 급한 일이 있구나 싶어 묵묵히 수긍했다.
막 테레사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차, 내내 침묵하던 세실레가 테레사를 불러세웠다.
“테레사.”
“네.”
“어련히 잘하겠지만, 상해를 입히거나 하지는 마.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가서 전해. 답은 당신만 알고 있어서, 나는 더 손 쓸 수 없다고.”
“네.”
의미심장한 대화에 방 안의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고 테레사는 주저 없이 방을 나섰다.
세실레는 테레사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세실레가 하는 양을 아이가 똑같이 따라 했다. 세실레는 아이가 저를 따라 하는 것을 발견하곤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잘못된 버릇을 가르칠 수는 없지.’
마음을 다잡은 세실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이건 나쁜 거야.”
“나쁭 거?”
“그래.”
“근데 왜 엄마는 맨날 하아 해?”
아이의 말에 세실레가 얼굴을 붉혔다.
“……앞으로 안 그럴게.”
설마하니 까마득히 어린 아이에게 지적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맨날 한숨만 쉬었나.’
아이의 말이 맞았다. 세실레는 심심하면 한숨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그랬네.’
뒤늦은 깨달음에 세실레가 머쓱할 무렵, 바깥에서 큰 소리가 일었다.
언쟁하는 소리였다.
세실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후궁의 정원에서는 황태후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라는 테레사의 경고를 무시한 게 분명했다.
참다못한 테레사가 결국 황태후를 업어 들었다. 이전이었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테레사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이 년간 황태후의 위상이 많이 추락하긴 한 모양이었다.
구경은 거기까지였다. 세실레는 무심히 고개를 돌리며 읊조렸다.
“테레사. 적당히 하래도.”
“테레사?”
“응? 아아. 맨날 저기 서 있던 사람이야.”
세실레는 테레사가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설명에 아이가 눈을 말똥거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