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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21화 (21/110)

21

세실레는 갑자기 우르르 달려들어 무릎 꿇는 신관들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세실레는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이렇듯 지극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이토록 맹목적인 충성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저기…….”

세실레가 망설이자 바닥에 넙죽 엎드린 신관들이 다시금 소리쳤다.

“저희를 밟고 가소서!”

“밟아주소서!”

사람을 밟고 지나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머뭇대던 세실레의 눈에 신관들의 의복이 들어왔다. 새하얀 옷에 흙이 묻어 엉망이었다.

그러나 신관들은 그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엎드려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기 전까진 저러고 있으려나.’

꼼짝도 하지 않는 그들을 가만 바라보던 세실레가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으니 일어나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밟고 가십시오!”

“괜찮으니 일어나시라 했어요.”

단호한 목소리에 그제야 대신관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는 민망한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신전을 정비하느라 주변이 엉망입니다.”

그제야 신관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편히 몸을 세우지 않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세실레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이어서는 끝이 없겠어.’

환대가 지나쳤다. 이런 식의 인사를 묵인했다가는 신관들은 앞으로도 그녀의 앞에서 저렇듯 허리를 숙일 게 분명했다.

그건 부담스러웠다. 세실레는 곧장 몸을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다음번에 다시 찾아올게요.”

담담한 목소리에 질책하는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꼭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몸을 떨더니, 다급히 세실레를 붙잡았다.

“서, 성녀님! 누추한 자리나마 와주신다면…….”

절박한 목소리에 세실레의 걸음이 멈췄다. 꼭 그렇게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투였다.

그제야 세실레가 부드러이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 이렇게 호들갑 떨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요.”

대신관은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세실레가 몸을 돌려 신전으로 향했다.

***

몇백 년간 버려진 신전은 어지간한 별궁보다 넓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장식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신전을 따라 펼쳐진 널따란 정원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엉망이었다. 수백 명을 동원해야 겨우 수습할 규모였다.

하지만 신전을 손볼 인원은 신관 몇이 끝이었고, 청소가 시작된 지 채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예배당도 후원도 여전히 먼지투성이였다. 어느 곳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 때를 벗겨낸 곳이라곤 계단뿐이었다.

‘이것 참, 계단에 모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신관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을 모셔야 하건만, 어디로도 안내할 곳이 없었다.

곤란한 표정을 응시하던 세실레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신전은 상당히 지저분했다. 심지어 꽃을 심겠답시고 사방으로 땅을 다 파헤쳐놔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신관은 고작 열 명 남짓이었다. 이 넓은 곳을 저 인력으로 깨끗하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꽃에 물만 줘도 하루가 다 가버릴걸.’

주변을 둘러보던 세실레는 팔을 뻗었다.

때마침 밤이었다. 지금이라면 손쉽게 더러운 신전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다.

세실레의 손등 위로 달이 그려졌다. 하늘을 조용히 밝히고 있는 엷은 달의 모양새와 똑같았다.

달빛이 세실레의 손등 위로 오롯이 모여들었다. 그 주변으로 깊은 남색의 대기도 함께 일렁였다.

손등 위에서 은색의 빛무리가 섬광처럼 터졌다. 동시에 하늘에서도 푸른빛이 팍, 하고 터졌다 사라졌다.

허름하던 신전이 순식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오래 묵은 먼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낡은 장식들이 새것으로 바뀌었다. 파헤쳐진 정원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가득 피어났다.

오묘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지켜보던 대신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아.”

그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생각을 떠올릴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묵묵히 세월을 버티며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기나긴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

“……감사, 감사합니다.”

대신관의 입에서 울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그마저도 목이 멘 듯 말이 겨우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세실레로서는 대신관의 반응이 과하다고만 생각했다.

세실레가 차분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답했다.

“별 것 아닌걸요.”

세실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무스름하던 신전이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무심코 계단을 오르다 난관에 그려진 문양을 손으로 쓸었다. 고개를 돌리니 층마다 새겨넣은 달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세실레는 기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곳에 왔던 적이 있던가?

세실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곳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으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익숙했다. 눈에 익은 문양이며 장식들에 차차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뭐지? 분명 언젠가…….’

세실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발견한 테레사가 입매를 굳혔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니. 그냥 언제 한 번 와 본 적 있는 것 같아서.”

“와보신 적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세실레가 엷게 웃었다.

“알아, 착각이겠지.”

세실레는 그 말을 끝으로 선선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세실레와는 달리 테레사의 눈동자는 엷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테레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세실레의 뒤를 따랐다.

***

신전 내부는 정갈하고 고아했다. 방문객이 많지 않았지만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곳이 없었다.

아치형 창문에선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사방을 밝혔다. 간간이 걸린 조명은 그저 보조 용도인 듯 자연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설치되었다.

아름다웠지만 사람 냄새가 풍기지 않는 곳이었다. 황궁 생활에 익숙한 세실레조차 신전의 삭막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이제야 막 의지를 얻었다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살면서 제정신이진 못하겠지.’

건물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되었다. 쉴만한 곳이나 잘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생활감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세실레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그녀의 뒤를 신관들이 쫓았다.

졸졸졸, 따라오는 모습이 꼭 엄마 새를 따르는 아기새 같았다. 그들을 가만 지켜보던 세실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따라오지 마세요.”

“네, 성녀님!”

소용없었다. 그들은 세실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붙었다. 그것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따라오지 말라니까.’

하여간 절대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이다.

잠시 씁쓰름한 웃음을 짓던 세실레는 고개를 틀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그 아래에 멀뚱히 서 있는 웬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

“아, 오늘 태어난 신관입니다.”

“오늘 태어났다고요?”

오늘 태어났다기엔 아이는 예닐곱 살은 되어 보였다.

자신과 똑같은 눈부신 은발과 영롱한 푸른빛 눈동자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포동포동한 볼도, 앙다문 입술도 귀여웠다.

아이는 어딜 가서나 사랑받는다더니, 맞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세실레의 입가에도 서서히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 감탄사를 흘렸다.

“귀엽다…….”

“그렇지요? 저희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실레는 대신관의 감탄을 뒤로하고 걸음을 뗐다.

그녀는 홀린 듯 아이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제자리에 멈춰 서선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세실레는 키가 작은 아이를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곤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

“알려주기 싫어?”

세실레가 말갛게 웃었다.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를 가만 지켜보던 대신관이 뒤늦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막 태어나 아직 의지가 없는 상태입니다.”

“의지? 자유의지를 말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마 성녀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면 저희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될 겁니다.”

그제야 세실레는 테레사가 했던 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인형처럼 가만 서 있기만 했던 거구나.’

아마 저들도 이 아이와 마찬가지였겠지. 그렇게 몇 년이고 시간을 죽이며 보내왔다니,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쓰러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엾단 생각이 들자마자 세실레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새하얗고 고운 손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새하얀 빛이 일렁이며 아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빛이 천천히 아이에게 흡수되었다. 동시에 초점 없이 흐릿하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마냥 새하얗기만 하던 뺨에 복숭앗빛 홍조가 어렸다. 주기적으로 깜빡이던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가 세실레의 품에 와락 안겼다.

“으……응?”

세실레는 당황해선 입술만 달싹였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신관들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댔다. 테레사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한 손을 검집에 댔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모든 사달의 원인인 아이가 무어라 입을 떼기 전까지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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