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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20화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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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레는 별다른 변장조차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가벼운 차림에 로브를 걸친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언뜻언뜻 눈부신 은발이 로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테레사는 주변을 경계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세실레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밤이기도 했고, 딱히 모습을 가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테레사로선 지금 상황이 썩 내키지만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지.’

황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테레사로선 환영할 일이었다.

문제라면, 세실레가 자꾸만 험한 일을 하려 든다는 거였다.

저번에도 빈민굴에 걸어 들어가더니 전염병 환자의 손을 잡고 나왔다.

폐병에 걸렸다던 환자는 한참이나 기침을 하며 세실레와 얼굴을 마주했다.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조차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걸 보아선 공기 중으로 전염되는 병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세실레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노파의 말을 모두 들어주더니 병을 낫게 해주고 먹을 것까지 쥐여주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포옹까지 했다.

테레사로선 굳이 험한 일을 찾아서 하는 세실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또다시 으슥한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켜보던 테레사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렀다.

그러자 세실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면 먼저 그럼 돌아가도 돼.”

“……아닙니다, 그저.”

“그저?”

“저는 황후 폐하께서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질문이었다. 테레사의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테레사가 미간을 찌푸리자, 세실레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시는 겁니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세실레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렀다. 사실 그녀 또한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의무감일 수도 있었고 방황하는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냥 황궁에 있기 싫은 걸 수도 있었다.

세실레의 얼굴에 힘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레사가 대뜸 말을 꺼냈다.

“외롭기도 하실 테지요.”

“……응?”

뜬금없는 말에 세실레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외롭다니, 그랬던가?’

고민하고 있는데 테레사가 세실레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선 혼자가 아니십니다.”

“그래, 너도 있고.”

“저뿐만이 아닙니다. 신께서 당신을 위한 종을 여럿 내리셨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세실레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하자 테레사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모두가 잊었지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당신께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자들이요.”

“충성?”

“예, 바로 신관들입니다.”

테레사의 말에 세실레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신관이라니.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결혼식을 올릴 때 신관들이 식을 진행하긴 했다. 듣기론 태어났을 때도 곁을 지켰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종이라니.’

단 한 번도 신관을 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을 잡지 못하는 세실레를 보며 테레사가 이어 말했다.

“아마 지금쯤 깨어났을 겁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심과 동시에 자유의지를 가지게 되었을 테니까요.”

“……자유의지?”

“예. 그 전엔 그저 신이 만든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사람처럼 사고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신기한 이야기에 세실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실 사람이 아니었다니.’

조금 무뚝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던 세실레로선 놀라운 이야기였다.

세실레 뿐만이 아니었다. 신관들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다.

대다수는 신관이 존재 여부조차 몰랐다. 겨우 명목을 이어가는 신학에서조차 간간이 언급되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테레사의 말을 듣고 있으니 흥미가 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망설이던 세실레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만나볼래.”

“모시겠습니다.”

테레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세실레가 신관들에게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그들에게 일을 맡겨야지.’

애당초 그러라고 있는 이들이었다. 테레사는 이 이상 세실레가 험한 일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

꽃으로 뒤덮였던 정원이 황폐했다. 새하얗던 신전 또한 거무스름한 먼지를 뒤집어쓴 지 오래였다.

너른 평야는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밤이 되면 악령이 나올 듯 스산해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수백 년간 세렌디의 신관들이 지켜온 터전이었다.

세실레가 황궁을 떠나고 잠들었다곤 하나, 잠들기 전에도 그들의 행동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동안 신관들이 해온 일이라곤 제국의 행사 때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의 시간엔 인형처럼 각자의 자리에 앉아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땅에서 난 존재가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일조차 불필요했다.

그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았으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신이 만들어낸 인형 비슷한 것이었다. 사고할 머리가 없었기에 신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신이 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한때 신탁을 들으려는 이들이 신전을 찾았지만, 이젠 그마저 방문객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골라 제작된 새하얀 신전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신전의 입구엔 계단이 있었고 그 앞엔 장대한 문이 있었다.

문 앞을 내내 지켜오던 신관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실레가 돌아온 후로는 아니었다.

“야! 거기 먼지 똑바로 안 털어내?”

“아니.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몇백 년 된 먼지가 그리 쉽게 사라진답니까?”

“몇백 년 동안 문지르면 닦이겠지, 뭐.”

대신관의 시큰둥한 대꾸에 벅벅 먼지를 닦아내던 문지기 신관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정원을 가꾸던 신관이 혀를 찼다.

“어째 두 분은 표정이 그리 다채로우십니까?”

“네가 없는 게지. 으, 저 시체 같은 표정 좀 봐라. 소름이 다 끼치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저러고 살았다니.”

두 사람이 끔찍하단 얼굴로 몸을 오스스 떨자, 정원 담당 신관이 땅을 내리치는 손을 빨리했다.

덩달아 퍽퍽, 삽질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화났느냐?”

“……,”

“쯧쯧, 그리 성격이 더러워서야.”

타박하던 대신관이 정원 담당 신관의 이마에 솟은 불룩한 핏줄을 보곤 조용히 몸을 피했다. 더 건드렸다간 필시 불상사가 생기리란 직감이 든 탓이었다.

그는 말없이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농땡이를 피우려는 거냐는 야유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허허, 날이 좋구나.”

대신관이 막 후원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그의 눈앞에 웬 아이가 서 있었다. 키가 그의 허리만큼도 오지 않는 작은 꼬마였다.

그를 발견한 대신관이 눈을 크게 떴다.

“웬 아이지?”

“…….”

“꼬마야, 넌 누구냐?”

대신관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저 멀뚱히 서선 크고 예쁜 눈을 깜빡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돌처럼 굳은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꼭 성녀께서 돌아오시기 전의 저들과 같은 모양새였다. 게다가.

‘은발에 파란 눈이라니.’

성녀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은발과 파란 눈의 조합이 성녀에게만 허락된 것은 아니었지만, 저토록 맑고 신성한 색은 성녀 외엔 허락되지 않았다.

입을 떡 벌린 대신관이 서둘러 꼬마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곤 냅다 아이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목덜미에 깃든 달의 표식을 발견한 대신관의 입에서 희열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새로 온 아이로구나!”

아이가 그와 동지라는 사실에 대신관의 얼굴에 흥분이 감돌았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후로 새로운 동료를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있던 신관마저 흙으로 변해 사라지는 시대였다.

그런데 때마침 성녀가 귀환하고 이렇게 새로운 신관마저 나타나다니.

대신관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감격에 눈시울을 붉혔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군.”

그는 아직 제 발로 걷지 못하는 듯 보이는 꼬마 신관을 덥석 안아 들었다. 그러곤 대놓고 뒷담화를 하는 이들 사이를 당당히 가로질러 갔다.

“대신관은 좋겠다. 혼자서 뒷짐 지고 놀……에엥?”

“후훗, 내가 놀러 간 줄 아는 게냐?”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랍니까?”

“그야 신의 계시를 받고 데려온 아이지. 새로 와서 아직 의지를 받지 못한 모양이야.”

문지기 신관이 걸레를 집어 던지고 달려왔다. 삽질하던 정원 담당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가지 않아 멀리 있던 신관들 또한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덕분에 신전 앞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꼬마 신관의 모습에 당황하며 볼을 붉혔다.

“아, 너무 귀여운데요.”

“이렇게나 작고 꼬물거리는 생명체가 있다니.”

순식간에 칙칙하던 신전이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꼬마 신관은 너무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

괜스레 뿌듯해진 대신관이 무어라 자랑을 이어가려던 차, 그의 시야에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세실레가 보였다.

“아, 아니!”

“또 왜 그러십니까?”

“그, 그, 그게 아니라. 성녀님께서……!”

그의 외침에 신관들의 고개가 모조리 돌아갔다.

대신관의 말마따나 세실레가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꽃을 심기 위해 파헤쳐 놓은 흙더미 위를 딛는 걸음이 사뿐했다. 신발에 흙먼지가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하지만 뒤를 따르는 기사는 다른 생각인 모양이었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하다던 신수의 표정이 험악했다.

흠칫, 몸을 굳힌 신관들이 서둘러 세실레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곤 냅다 무릎을 꿇으며 울부짖었다.

“성녀님, 차라리 저희를 밟고 지나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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