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악령은 쉬이 물러가지 않았다. 도리어 황태후가 발악할수록 더욱 즐거워했다.
목을 조르고 정신을 교란하다, 끝끝내 정신을 잃을 때까지 괴롭혀댔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침실은 적막 그 자체였다.
의아해진 황태후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곧 악령들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곤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처음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그녀를 괴롭히던 악령이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황태후의 입꼬리가 씰룩대었다.
옆으로 휘듯이 치켜 올라가는 입매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이 년을 악령과 함께 동고동락한 황태후는 외양마저도 사람의 모습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었다.
“어, 없어?”
그녀는 몸을 일으켜 사방을 샅샅이 뒤졌다. 이불 밑, 침대 밑. 하물며 벽화마저도 꼼꼼히 살폈다.
언제나 그곳에 악령들이 숨어, 그녀를 괴롭힐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침실 가득 빽빽이 들어차 있던 악령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황태후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없어! 없다고! 없어!”
소위 말하길 미친 것처럼,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품에 쥐고 있던 인형을 마구 휘두르며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리는 모습이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체면이나 체통을 지키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지쳐 있었다.
오랜 감금 생활로 근육량 또한 심각하게 저하되어 몸에 힘이 없었다.
심지어 주변을 뒤진답시고 한껏 움직인 탓에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되었다.
오랜만에 무리한 몸이 휘청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황태후는 그저 기뻤다.
악령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쉼 없이 웃음이 흘렀다. 그렇듯 바닥에 누워 낄낄대는 모습이 실로 흉했으나 그녀에겐 품위를 따질 여유 따윈 없었다.
“없어. 진짜 없어. 아무도 없어.”
그 말대로였다.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쓰러진 몸을 일으켜 줄 시녀 하나조차도.
***
세실레가 황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빛 한 점 없던 밤하늘에 달이 떴다. 잠들었던 신관들도 모조리 일어났다.
무엇보다 세실레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다녔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황후를 봤다는 목격담도 늘어만 갔다.
“나 어제 수도의 베이커리에서 황후 폐하를 만나 뵌 것 같아.”
“예끼 이 사람, 거짓말도.”
“거짓말 아니야. 눈부신 은발이었다고. 게다가 어찌나 아름다우신지!”
목격담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항상 밤에만 나타난다는 거였고 둘째론 적갈색 머리칼의 기사가 곁을 지킨다는 거였다.
그들은 주로 밤거리를 산책하거나 병들어 다친 이들을 치료해주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론은 금세 세실레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천사라던데! 천사가 분명해.”
“암암, 당연하지. 성녀시지 않으신가. 세렌디 신의 딸이시라고.”
덕분에 황궁은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유 또한 다양했다.
악령에게 넋이 나간 가족을 도와달라는 청부터, 그저 얼굴 한번 뵙고 싶다는 요청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를 위해 뒷돈까지 오고 갔지만 세실레는 그들 중 단 한 명과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테레사와 뜻밖의 방문을 행할 뿐이었다.
***
황후궁에도 또 한 번 낮이 찾아왔다. 세실레는 인기척을 느끼고도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에 시녀가 주저하며 입을 뗐다.
“폐하.”
“…….”
“황제 폐하께서…….”
“시간 없다고 해.”
“알겠습니다.”
시녀는 무어라 더 말을 잇는 대신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푸른빛 눈동자가 조용히 감겼다.
세실레는 오후의 햇빛을 즐기는 중이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따위가 세실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황후궁은 본성과 멀어, 세간의 시끄러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기분 좋아.’
세실레는 카우치에 몸을 기댔다. 햇빛을 받고 있으니 노곤했다.
밤만 되면 돌아다니느라 바빴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실레의 활동 주기를 생각하면 지금은 자야 할 때였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풍성한 속눈썹이 감기며 천천히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잠든 세실레의 곁에 테레사가 섰다. 그녀는 고운 양털 모포를 가져다 조심스레 세실레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
“무얼 하고 있다던가.”
“주무신다고 합니다.”
“그렇군.”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 후 세실레가 그를 문전박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세실레를 거절할 때 사용하던 방법, 그대로.
항상 시간이 있느냐며 물어오던 세실레의 청을 그렇게 밀어내었다.
그 방법이 최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인정해야만 했다. 거절당하는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실레가 긴 시간 동안, 그의 이러한 배려 없는 거절을 수백, 수천 번쯤은 맛보아야 했다는 사실을.
“자업자득이로군.”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씁쓸함이 어렸다.
세실레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는 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
세실레는 해가 지고서야 잠에서 깼다.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때, 느지막이 일어나 세수를 했다.
그런 다음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정원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황후궁의 시녀들은 처음엔 그녀를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다. 막상 황후를 마주하니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중엔 세실레를 곧 내쳐질 황후라 무시하던 사람도 있어서 불안함이 더했다.
이들 중 황태후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몰라.’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세실레는 온화한 주인이었다.
이전엔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면, 지금은 그저 조용했다.
가만 보고 있으면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것 같아서 넋을 놓게 되는 일마저 종종 생겼다.
거기다 바깥에서의 소문까지 들은 시녀들은 곧 평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뭐, 이제야 사람 같아지신 거지.”
그들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다음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황후가 저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다며 입을 모아 수군댔다.
“소문에 의하면 세렌디 신을 만나 뵙고 오셨다고 해.”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짜라니까? 그거 못 들었어? 황후 폐하께서 귀환하시기 전에 루렝브렌 산맥에서 지진이 났다잖아.”
“루렝브렌 산맥?”
“그래. 그곳에 세렌디 신의 신전이 있다고 하던걸.”
그럴듯한 말에 이야기를 듣던 시녀들이 눈을 크게 떴다. 놀라움이 깃든 눈동자를 보며 한 시녀가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오빠가 친위대라서 잘 아는데, 그때 황제 폐하께서 알케덴으로 가셨대. 그리고…….”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그들의 사이로 도르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르데아의 형형한 시선에 시녀들은 입을 합, 다물었다.
도르데아는 황태후의 측근 중 유일하다시피 악령에게 시달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일로 인해 말이 많았지만, 바꿔말하자면 도르데아는 현재 황궁에서 가장 권력 있는 시녀였다. 권력을 쥔 대부분이 황태후의 측근이었고 사실상 그들은 은퇴하게 되었으므로.
게다가 도르데아는 지난 이 년 동안 황후궁을 비우지 않으며 위치를 공고히 했다. 황후궁의 관리를 톡톡히 해온 것이다.
그 탓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재정부 관료들은 이젠 도르데아의 얼굴만 보면 발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이 일로 도르데아는 황후에 대한 충성심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그건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세실레가 귀환하자마자 그녀가 속한 로델린 백작 가문에 줄을 대려는 사람이 수백은 몰렸으니.
‘하지만 허실일 뿐이지.’
도르데아는 지금의 칭송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도르데아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황후의 훈육을 담당하면서, 손속이 자비롭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황태후의 소속이기도 했고.’
한때 영광이었던 자리가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황후의 눈 밖에 나는 순간 도르데아는 물론이고 로델린 백작 가문도 끝이었다.
혹시나 쫓겨날 때가 오면, 이 년간의 일을 말하며 자비를 구할 준비까지 마쳤다.
하지만 준비는 모두 부질없어졌다. 이 년 만에 마주한 황후 폐하는 도르데아를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으므로.
‘오랜만이라고 하셨던가.’
참으로 싱거운 인사였다. 그 외에 별다른 책망도 칭찬도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 인사를 끝으로는 나눠 먹으라며 수도의 유명 제과점에서 사 온 디저트를 나눠주었다.
기이한 행동에 어리둥절했지만, 결과적으로 황후 폐하께서 직접 선별한 디저트는 매우 맛이 좋았다. 도르데아 조차 따로 디저트를 주문했을 정도로.
도르데아는 세실레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아니, 이젠 그녀가 감히 평가내릴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뒤에서 말이 오가서도 안 되었고.
상념을 마친 도르데아가 앞에 선 시녀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그러곤 엄한 목소리로 그녀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시녀로서의 기본이 없구나.”
“죄, 죄송합니다.”
“어찌 황후궁의 시녀가 황후 폐하의 일을 그리 쉽게 떠들고 다닌단 말이야.”
타당한 훈육에 시녀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르데아의 말대로였다.
만약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황후가 기분 나빠하면 황족모독죄까지 성립될 수 있었다.
황족모독죄는 최대 사형까지도 가능한 중죄였다.
게다가 알케덴에서의 사항을 모두 기밀에 붙인 지금이라면, 군사기밀을 퍼뜨렸단 죄로 국가보안법까지도 적용 가능했다.
그에 가장 열심히 떠들던 시녀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도르데아가 혀를 찼다.
“잘못하다간 혀가 잘리는 수가 있으니 항상 조심하도록.”
“예, 예! 물론입니다.”
시녀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도르데아는 그녀들을 뒤로하곤 걸음을 옮겼다.
황후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원에 없었다. 테레사도 마찬가지였다.
허탕을 친 도르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밖에 나가신 건가.”
어찌하여 황후가 이리 바깥을 나다니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려던 도르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세실레의 행동에 제약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