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치솟았던 분노가 고요히 가라앉은 세실레의 눈동자는 한없이 평온했다.
차분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쉬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황실 일원들이 그토록 바라던,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거리낌 없이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교묘하고 영악하다는 건 저와는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막상 해 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실레는 땀이 찬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런데 어째선지 몸이 뜨거웠다.
특히, 하늘 위가. 세실레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신수로 화한 테레사가 그녀를 낚아챘다. 뜨거운 열기가 세실레를 덮쳤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어느새 하늘 위에 있었다.
그러자마자 아르베우타의 절박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세실레!”
그러나 테레사는 이미 빠르게 하늘 위로 올라간 뒤였다.
***
세실레는 본능적으로 붉은 깃털을 잡아챘다. 얼굴을 강타하는 바람에 도통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빠르게 비행하는 새 위에서 중심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실레의 몸이 비틀거리자 그제야 테레사가 낮게 날기 시작했다. 한결 유해진 움직임에 세실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렀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테레사를 불렀다.
“테레사.”
“…….”
“너지? 너 맞지?”
비행하는 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세실레는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알케덴이었다.
‘아니, 알케덴을 넘어, 오키드리아 대륙을 떠나려는 거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내 세실레 더러 대륙을 떠나자고 말해왔던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세실레는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그녀는 매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레사. 당장 멈춰.”
“…….”
“내 말을 거역할 셈이야?”
“…….”
“그럼 나는 평생 너를 미워할 거야.”
세실레의 질책에 테레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찰나의 동요를 알아차린 세실레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륙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했잖아.”
그 순간 테레사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이 순식간에 땅으로 하강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테레사가 곧장 그녀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가벼운 몸짓으로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러곤 세실레를 보며 성을 토해냈다.
“어째서! 어째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너…….”
“왜 그런 곳에 매이려 하십니까.”
처음 보는 테레사의 모습에 세실레의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테레사가 왜 이러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테레사가 묻는 것에 대해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내가 없으면 제국이 멸망한대.”
“그러라고 하십시오.”
“아무 죄 없는 사람들마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세실레는 먼젓번 일을 잊지 않았다.
죽어가던 소년은 그녀더러 천사라 했다. 지금의 상황이 모두 그녀 때문이란 걸 알았다면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알케덴의 음식점 주인도 베이커리 아저씨도 생각났다. 그들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세실레는 그들을 모두 저버릴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나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죽어가게 둘 순 없어.”
세실레의 두 눈이 반짝였다. 푸른 눈동자엔 단단한 결의가 들어찼다.
테레사는 세실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결국 테레사는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
세실레는 테레사의 등에 올라탔다. 수도까지는 거리가 꽤 되어,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늘을 나는 건 기분 좋았다. 나부끼는 머리칼을 느끼며 말없이 아래만 내려다보던 세실레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테레사.”
“네.”
“그런데 너…… 새였구나.”
뜬금없는 물음에 테레사의 몸이 휘청였다. 그녀는 당황한 듯 부리를 딱딱 부딪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아냐. 속였다곤 생각 안 해.”
선선한 대답이었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테레사가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신수입니다.”
“신수?”
“네. 세렌디의 딸인 당신을 지키기 위해 신께서 보내셨지요.”
생각해보지 못한 말에 세실레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혼란에 빠진 듯 보이는 그녀를 위해 테레사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를 지키기 위해 내려진 만큼 저는 어느 때고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밤에는 폐하보다 훨씬 약하지만요.”
그녀의 말에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밤의 세실레가 펼치는 이능은 한계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지금까지 세실레가 무얼 하려 들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마음만 먹으면 상상조차 못 한 일도 가능할 게 분명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세실레를 두고 테레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저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만큼은 오롯이 폐하의 편이니까요.”
“내 편…….”
세실레는 그 말을 가만 읊조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테레사만큼은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기억하지 못했었는데, 이제야 기억났다. 유일하게 안부를 물어주던 이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유일한 세실레의 편, 회귀 전부터 곁을 말없이 지켜온 신수.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세실레는 테레사를 의심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아니요. 남을 의심하는 건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니 저 말고 다른 사람은 모두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 같은 태도에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세실레는 맑게 웃으며 답했다.
“응. 그럴게.”
머리 위로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
황궁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어둑한 밤이었다. 세실레를 황후궁에 내려놓은 테레사는 못마땅하다는 듯 하늘을 맴돌았다.
거칠게 포효하는 날갯짓을 뒤로하고 세실레는 황후궁의 중심, 술성의 위에 올라섰다.
‘기어코 도착했네.’
제국의 본성보다도 먼저 지어졌다는 곳이었다. 영롱한 달 아래에 핀 꽃을 형상화했다고도 했다.
술성을 중심에 두고 둘러싼 여섯 개의 궁, 총 일곱 개의 궁 주변으로 아름다운 호수가 굽이굽이 흘렀다.
세실레는 빛을 잃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달이 투영되어 밝게 빛났어야 할 호수가 새까맸다. 저곳에 달을 돌려줄 때가 되었다.
세실레가 밤하늘을 향해 손을 펴들자 손등 위에 자리한 달이 빛나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손등에 새겨져 있던 달이 차츰차츰 허공으로 떨어져 나갔다.
손바닥보다 자그맣던 달은 허공에 떠오르며 크기를 키워가다, 이윽고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커졌다.
새카맣던 하늘이 일순 새하얗게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 멀리, 변방을 지키던 근위병조차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뭐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싶어 혼란이 만연하려던 차,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다, 달이다!”
“달이 떴다!”
순식간에 적막에 물들어 있던 세상이 크게 들썩였다.
악령을 피해 집 안에 숨어있던 이들마저 맨발로 거리에 뛰쳐나왔다.
넋 놓고 폭력을 행사하던 이들의 주먹질이 그쳤고 마약으로 겨우 버티던 노숙자의 눈동자에 총기가 어렸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비틀거리며 대로변으로 나와, 영롱하게 하늘을 밝히는 달의 존재를 눈에 담았다.
곧 그들은 하늘 위에 올곧게 뜬 달을 보며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아아, 신이시여.”
그토록 애원하던 달이 돌아왔다. 덩달아 거리에 기다란 뿔 나팔 소리가 일었다.
황궁에서부터 울려 퍼진 소리가 이어 이어, 변방에까지 울려 퍼졌다.
이는 사방으로 흩어져 황후를 찾아 헤매던 기사단의 소집을 명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황후를 찾았다는 뜻과도 같았다.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와아아!”
누군가가 소리침과 동시에 폭발적인 함성이 일었다.
그간 악령에 시달렸던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세실레의 존재를 축복했다.
축포가 터졌다. 제국 내에 세실레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황후 폐하, 만만세!”
“만만세! 황후 폐하 만만세!”
목 놓아 우는 목소리에 세실레는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이 그녀의 가슴께에 빠듯하게 차오른 탓이었다.
***
세실레가 황궁에 돌아왔다.
눈이 있는 이는 하늘 위에 영롱하게 뜬 달을 보곤 함성을 내질렀고 눈이 먼 이는 그들의 함성을 듣고 황후의 귀환을 알아차렸다.
악령에게 시달리느라 방구석에 처박혀 몸을 덜덜 떨던 이들 또한 세실레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그들을 괴롭히던 악령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건 스스로 침실에 갇혀 온갖 환각에 시달리던 황태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 살려줘.”
오늘도 그녀는 시꺼멓게 죽은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말았다.
흐릿하게나마 눈을 떠 주변을 살피면, 악령이 선연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령은 비단 그녀를 시선으로만 괴롭히지는 않았다.
멋대로 손을 쳐들어, 목덜미를 훑고 치맛자락을 들척이며 깜짝깜짝 놀라는 반응을 즐겼다.
“꺄아아악!”
황태후는 비명을 질러대며 품에 꼭 안고 있던 인형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라질 악령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리어 대놓고 낄낄 웃으며 황태후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나랑 놀자.
“꺼져!”
-나랑 놀아줘.
“꺼지라고!”
격한 음성을 토해내던 그녀의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과호흡 상태가 된 그녀의 입술 색이 시퍼렇게 질려갔다.
그런데 어째선지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