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세실레는 곰돌이가 자신을 깨우려고 재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흐릿한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응시하던 세실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그녀는 잠투정을 시작했다.
“나 졸려. 더 잘래. 응?”
애교 어린 목소리였다. 사랑스러운 음성에 아르베우타의 얼굴은 이제 벌겋다 못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그의 이성은 끊어지기 직전의 실낱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토록 강력한 자극이 강타할 줄, 그는 맹세코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세실레를 건들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르릉.”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괴로운 것인지 좋은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울음소리가 사뭇 애타게까지 들렸다.
하지만 세실레의 귀에는 그것이 보채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졸음에 빠진 세실레는 자꾸만 저를 재촉해대는 곰돌이에게 투정을 부렸다.
“졸린다니까.”
세실레가 아르베우타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러곤 길게 자란 털 뭉치에 온몸을 파묻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길게 숨을 뱉어냈다.
“흐음.”
“……흡.”
아르베우타가 숨을 멎었다. 세실레의 숨결이 교묘하게도 아르베우타의 배를 간질인 탓이었다.
묘한 간지러움이 일어 그를 괴롭혔다. 당장 긁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지만 세실레가 졸린다고 했어.’
아르베우타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숨을 참아보기도 했고 주먹을 꽉 쥐기도 했다. 그러나 세실레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기어코 악문 잇새로 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흘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세실레를 그저 내버려 둘 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하필 나무 등치에 기대어 잠든 것이 불편해 보여 안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저 안아다 포근한 잠자리로 옮겨주려던 것뿐인데, 세실레의 나긋한 몸에 홀려 그러질 못했다.
설마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미치겠군.’
아르베우타는 날뛰는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검술 훈련을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손에 힘을 꽉 주어 버티다, 바위를 돌가루로 부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슬슬 한계였다.
차라리 그녀를 깨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려던 차, 그의 목전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들이밀어 졌다.
“꺼지십시오.”
그 앞에, 어째선지 얼굴에 잔뜩 검댕을 묻힌 테레사가 있었다.
테레사는 매서운 눈으로 아르베우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캬르륵.”
테레사의 등장에 아르베우타가 세실레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켜 위협하듯 테레사의 앞에 섰다.
아르베우타는 아직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 또한 아니었다.
아르베우타의 몰골을 목격한 테레사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렀다.
“꼴 좋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도리어 품에 안긴 세실레가 혹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조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실레를 안은 모습에 테레사가 아르베우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짓씹는 목소리엔 짙은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캬륵.”
“싫으십니까? 혹여 그분께서 깨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주군께서 당신을 받아주시리라 믿습니까? 그 흉측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리지나 않으시면 다행일 텐데요.”
테레사의 말에 아르베우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의 이러한 모습을 알지 못했다.
그가 괴물이다 못해, 뻔뻔히 낯을 쳐들고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을 알게 된다면 경멸에 찬 눈으로 외면해 버릴지도 몰랐다.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슬픈 음성이 흘렀다.
“캬르릉…….”
세실레는 잠에 취해있었다. 그녀의 ‘귀엽다…….’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그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세실레가 깬다면 높은 확률로 아르베우타를 보고 놀랄 터였다.
그를 본 누구나 그랬으니까.
세실레가 저를 보며 도망치려 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될 텐가.
빤했다. 아마 정신을 잃곤 미친 듯이 날뛰겠지.
어쩌면 세실레를 제 손으로 공격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걸 테레사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르베우타와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다음 비꼬듯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구석에 처박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당신과 제국을 위한 일이라고.”
“캬아와앙!”
“아니면 동반 자살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또다시 황후 폐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시려고요.”
비웃는 입매와는 달리 테레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그러는 중에도 손에 쥔 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칼은 정확히 그의 경동맥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따스한 햇볕과는 달리 검푸른 살기가 스산했다. 동시에 테레사의 주위로 오한이 들만치 차가운 공기가 들어찼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테레사 또한 본체를 드러내야 했다. 세실레의 수호자인 테레사는 낮에도 이능을 발할 수 있었다.
테레사는 곧 새빨간 깃털을 가진 커다란 새로 변했다.
매서운 기세에 아르베우타가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
기어코 세실레를 놓아주지는 않겠다는 집념에 테레사가 냉소했다.
“끝까지 이기적이로군.”
아르베우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발로 거세게 허공을 휘둘렀다.
그 무렵, 세실레의 입에서 조용한 물음이 흘렀다.
“……벌써 아침?”
아까완 달리 목소리가 확연히 또렷해졌다. 느리게 눈을 뜬 세실레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를 안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보곤 눈을 깜빡였다.
“이건…….”
세실레는 입을 다물고 아르베우타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주한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세실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렴풋이 무언가가 기억이 나려는 것도, 나지 않으려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세실레는 무심코 손을 뻗어 아르베우타의 털 갈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털이 부스스 흩어지며 그 안에 숨은 맨살이 드러났다.
서서히 덩치가 줄고 근육이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천천히 아르베우타는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괴물의 정체를 알게 된 세실레의 눈이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어떻게 여기에.”
세실레의 물음에 아르베우타는 말없이 붉은 눈을 감아 내렸다.
대신 세실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뒤, 그녀의 왼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제가 저의 신을 뵙습니다.”
정중한 목소리에 세실레는 아무런 말도 이을 수 없었다.
***
세실레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막 잠에서 깬 뒤였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살짝 벌어졌던 세실레의 입술이 이내 굳게 닫혔다. 당황으로 물들었던 눈동자는 금세 고요해졌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어쩐 일이세요.”
세실레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에, 아르베우타는 예상했으면서도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이 어찌하던 세실레가 알 바는 아니었다. 세실레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자신을 외면하던 황제가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세실레는 짐작한 대로 말을 이었다.
“저를 데리러 오셨나요?”
“세실레, 나는…….”
“그런 것 치고는 차림이 지나치게 가벼우시군요.”
세실레는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곤 어느새 이곳으로 돌아온 테레사를 보며 명했다.
“아직 날이 차니, 숄이라도 덮어드리렴.”
“네.”
세실레는 어찌하여 테레사가 돌아왔는지 또 아르베우타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궁금해할 여력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를 악문 채 덜덜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다, 눈을 질끈 감곤 깊이 숨을 내쉴 뿐이었다.
‘괜찮아. 바뀐 것은 없어.’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다. 오늘 황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면 그를 마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실레는 떨리는 손을 힘주어 쥐며 말을 이었다.
“제가 없어지니 제국에 악령이 들끓어 견디실 수가 없으시던가요?”
“……세실레.”
“보아하니 제가 없으면 폐하께서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모양이로군요.”
아르베우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모조리 옳았으니까.
얇은 숄 하나만으로 겨우 치부를 가린 아르베우타가 씁쓸히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이 맞아.”
“…….”
“그러니 황궁으로 돌아와 달라고 해도 될까.”
애틋한 목소리였으나 그뿐이었다. 그저 필요하니 돌아와 달라는 것.
세실레에겐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세실레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렀다.
확답을 하기엔 머리가 지나치게 어지러웠다. 당장 이대로 쓰러진다 해도 이상치 않을 정도였다.
세실레의 몸이 휘청였다. 그런 그녀를 부축하고자 아르베우타와 테레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두 사람을 모조리 제쳐버렸다. 날이 밝아 아직 이능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둘 다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도 여전히 좋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필요하니까 저러는 거겠지.’
그래,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이용가치 없는 황후로 살다, 폐위될 날만 기다리는 것보다야 무엇이든 힘을 가진 편이 더 유리했으니까.
자신의 존재에 제국의 존폐가 걸려 있으니 이전처럼 대우하진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돌아가지 않기엔 고작 이 몸에 걸린 생명이 너무 많았다.
생각을 마친 세실레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 드리죠.”
“정말인가?”
아르베우타가 반색했다. 그의 얼굴에선 숨기지 못한 기쁨이 묻어났다.
하지만 세실레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아니, 도리어 날카로워진 시선이 그를 향했다.
“대신 제 행보는 이전과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허니 각오를 해두셔야 할 것입니다, 폐하.”
“물론이야. 무엇이든 그대가 내키는 대로 해도 좋아.”
“더불어 제 호위, 테레사의 죄도 묻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도 약속하지.”
세실레는 순순히 수긍하는 아르베우타를 확인하곤 몸을 돌렸다.
그녀는 사뭇 오만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로는 안 되지요. 제게 애원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황실에 붙어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셔야 할 거예요. 조금이라도 제 심기를 어지럽혔다간, 다음 날 제가 그 자리에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