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미 주변에 선 기사들은 이미 기겁하여 저 멀리 도망친 뒤였다.
제 주군을 공격할 수도, 그렇다고 맨몸으로 막아설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쟈르스만이 멀뚱히 자리에 서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황후 폐하께서 머무르실 법한 곳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캬아악!”
“테레사가 도주하다 흘린 것입니다.”
“캬악!”
쟈르스의 말에 흉포한 팔을 휘두르려던 아르베우타의 몸이 움찔했다.
테레사는 세실레의 수호자였다. 세렌디가 제 딸을 내치며 베푼 마지막 온정이란 뜻이었다.
그런 테레사가 추측한 거처라면, 세실레가 실제로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테레사와 세실레는 묘한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무의식중으로 계산을 끝마친 아르베우타가 아주 조금, 유순해졌다.
그는 제 날카로운 손톱에 행여 지도가 찢어지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x자가 표시된 몇 군데를 가만 응시하다, 말없이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개중엔 루렝브렌에 위치한 삼백 년쯤 전에 폐쇄된 신전 또한 표기되어 있었다.
***
쟈르스는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진 제 주군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게 황제라니.”
그는 이 틈을 타, 마음껏 황제를 흉봤다. 기실 그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머리가 좋아 황제의 비서로 선출되었을 뿐이었다.
그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올라가는 동안, 주변의 그 누구도 쟈르스의 미래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황제가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쟈르스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운도 더럽게 없지.”
쟈르스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괴물이 된 아르베우타의 입김에 희뿌예진 안경을 닦아내었다.
그러곤 마찬가지로 저를 괴물 보듯 쳐다보는 친위대를 보며 물었다.
“뭔가?”
“아, 아닙니다.”
“놀 생각 말고 일들 해.”
쟈르스의 일갈에 친위대는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다.
그들은 제 주군을 두고 도망쳤다는 수치심과 일개 문관보다 못한 담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좌절한 지 오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쟈르스는 임시로 마련한 거처에 들어가 서류를 펴들었다.
“할 일이 태산이군.”
그러나 하는 말과는 달리 홍차를 진하게 우려내는 손길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깊은 차 맛을 음미하고서야 일에 착수했다.
이 또한 주인을 잘못 만난 저의 죄라 생각하며, 여유롭게 서류 업무를 처리하는 손놀림엔 거침이 없었다.
***
괴물이 된 아르베우타의 외양은 야생곰을 닮았으나 그보다 더 거대했다.
사람 키만 한 장딴지는 단숨에 암벽을 타오르는 근력을 갖췄고 성인 남성의 손바닥보다 날카롭고 커다란 손톱은 백 년 된 나무도 쉬이 베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몇백 배를 상회하는 동체 시력은 저 멀리 있는 사물의 움직임마저 포획했다.
거기엔 옅게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흐릿한 연무 또한 포함이었다.
그 무엇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캬아악!”
본성만이 남은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거친 울음소리가 흘렀다.
그는 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안개를 확인하자마자 무섭게 산을 올랐다.
킁킁, 주변을 훑는 콧구멍에서 콧김이 흘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눈치챌 수 없는 흔적도 지금의 아르베우타에겐 아주 커다란 힌트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세실레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세실레의 기운, 체취, 목소리 등이 사방에 남아있었다.
그는 세실레가 흘린 아주 옅은 향기에도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산기슭에 겨우 다다랐음에도 벌써 세실레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아르베우타가 도착했을 무렵 세실레는 테레사와 대화 중이었다.
“테레사.”
세실레의 입에서 듣기 싫은 이름이 흘렀다.
그 순간 아르베우타의 목에서 긁는듯한 그렁거림이 흘렀다.
“그르르릉…….”
아르베우타는 괴물이 되어버렸으나 아직은 각성 단계에 불과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날뛰는 단계는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 만큼 그에겐 한 줌의 이성과 인간다운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러한 감정들이 아르베우타를 들쑤시며 그의 머리꼭지를 돌게끔 만들었다.
“너는 어디로 가고 싶어?”
세실레가 질문했다. 그 순간 흉포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캬아아아악!”
이를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국이 있는 오키드리아 대륙만 벗어난다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갸와아아앙!”
아르베우타는 테레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제국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다.
하루빨리 아르베우타가 온전히 괴물이 되어버려, 그의 손으로 대지를 피로 적실 날만을 기다렸다.
이대로 며칠만 지나면, 테레사의 바람대로 될 터였다.
아르베우타는 지금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으니까.
“갸륵.”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사방에서 흐르는 향이 그의 이성을 자극했다.
나무에 숨은 새에서도, 스치는 바람에서마저도 세실레의 향이 풍겼다.
은은한 백합의 향.
그를 놀리듯 스치다 사라지는 향기에 아르베우타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나무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코에서 김이 샜다.
저 위를 노려보는 아르베우타의 눈에 차차 살기가 어렸다.
이윽고 그는 이어지는 둘의 대화가 듣기 힘들다는 듯 빽빽이 솟은 나무를 멋대로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거친 움직임에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던, 치밀하게 솟아있던 나무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발 디딜 때마다 땅이 푹푹 파이며 흙더미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덕분에 돌연 산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산을 타, 단숨에 산 중턱에까지 올랐다.
“크르르륵.”
점점 세실레가 가까워졌다. 덩달아 아르베우타의 전신을 돌고 있는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저 앞에 있다.’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아르베우타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성을 잃고 세실레를 한입에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세실레를 상처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제 손아귀에 그녀를 넣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사실에 아르베우타가 환희에 휩싸여 포효했다.
“캬르르륵!”
그는 제 가슴을 마구 내려치며 기쁨을 표했다.
쿵쿵, 소리가 크게 울리자 주변의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바빴다.
이제 한 걸음, 세실레를 목전에 두고 있는 때, 갑자기 세실레가 있는 곳으로부터 강한 빛무리가 일었다.
번쩍이며 흩어지는 빛무리에 아르베우타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몸을 굳혔다.
섬광이 터지며 이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 탓이었다.
‘세실레는 이능을 사용할 수 있다.’
그가 세실레를 찾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요령 좋게 도망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아르베우타는 숨죽여 몸을 숨겼다.
그러곤 아주 조용히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어둠이 걷히고 일출이 시작되는 순간,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세실레를 덮치기 위해서. 그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산등성이에 몸을 숨긴 채로 신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실레가 있었다.
***
따스한 온기가 세실레의 뺨을 간지럽혔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꽃내음에 세실레의 곱게 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새 시간은 흘러 한낮이 되었다.
세실레는 몸을 온전히 내리쬐는 태양의 온화함에 느른히 몸을 늘어뜨린 채 자신을 둘러싼 부드러운 것에 얼굴을 비볐다.
“으음…….”
더없이 포근한 감촉이었다.
무엇을 가져다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황실에서 쓰던 수천 겹의 깃털을 덧대어 만든 침구보다 더욱 따스하고 편안했다.
그래서일까. 원래라면 잠에서 깨고도 남았을 시간에도 세실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꺼풀은 도통 떠질 줄을 몰랐다.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고즈넉한 신전 터에 울려 퍼졌다.
짹짹대는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꽃가루가 날리며 그녀를 깨워대도 세실레는 나른히 내리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순간 바람이 일어 세실레의 긴 머리를 흩날렸다.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세실레를 가만 지켜보던 아르베우타가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그러나 괴물이 된 아르베우타의 손은 세실레의 몸만 했다.
게다가 그는 괴물이기 전에도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이였다.
결국, 설핏 스친 손톱에 옅은 상흔이 생겼다.
아르베우타는 세실레의 얼굴에 살짝 맺힌 핏물을 보곤 어쩔 줄 몰라 했다.
요란한 움직임이었다. 아르베우타의 무릎 위에 누워있던 세실레의 몸 또한 덩달아 움직였다.
“으응.”
그제야 잠결에 취해있던 세실레가 눈을 떴다.
그리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만한 곰돌이를 발견하곤 배시시 미소지었다.
“귀여워…….”
꿈에 취한 세실레의 입에서 몽롱한 음성이 흘렀다.
동시에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
괴물이 된 아르베우타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건장한 기사마저도 그 모습을 마주하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하지만 저혈압이 있는 세실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은 흐릿했고 머리는 무거웠다. 몽롱한 와중에 검은색의 털과 동그란 눈과 코만이 보였다.
세실레는 멍하니 그것이 산 만 한 크기의 곰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엔, 세실레는 너무 졸렸다.
애당초 꿈속이었다. 꿈에서 상식을 따지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가느다랗게 눈을 떴던 세실레의 눈이 다시금 감겼다.
‘으음, 졸려. 다시 잘래.’
그런데 어째선지 곰돌이의 몸이 덜덜 떨렸다.